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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족보 :  야곱 (1)

 
지난 주까지 우리는 주님의 족보에 나오는 인물 중 아브라함과 이삭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늘은 야곱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지난 주에 생각한 이삭의 삶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식과 소망을 주는 진실로 복된 삶이다. 가만히 앉아서 모든 것을 은혜로 누리는 삶은 얼마나 재미있고 신나는 삶인가! 우리는 때로 지난번의 어떤 사람처럼 몇 백억 짜리 복권에 당첨되어서 모든 수고와 고생을 그치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망상에 젖어본다. 그러나 나는 그럴 때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꿈이 아니라 이미 현실로 성취된 일이라는 사실을 되씹어 본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 물려 받아 다스리는 복을 얻었다. 물론 우리가 육신의 소욕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많은 돈을 가지지는 못했다. 만일 많은 돈이 행복한 인생을 가져다 준다면 우리는 그런 복을 얻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창조자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생명의 복을 얻었다. 이것은 복권 당첨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복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하고 완전한 복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1-39)

이삭의 인생, 이삭의 체험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된 복된 사람들의 인생과 체험을 대표한 것이다. 이러한 자의 권세는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요 이러한 자의 부(富)는 만물을 다 제것으로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부이다. 이런 인생의 특징은 수고와 분투, 걱정과 염려가 아니라 평안과 안식, 누림과 찬송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이삭의 체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신자의 체험은 아브라함과 야곱의 체험과 연결된 것이며 거기서 나온 것이지 그것과 별도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체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십자가의 체험이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옛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지 않았다면 이삭의 체험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뒤에 있었던 것이지만 내용적으로 볼 때는 이삭의 체험은 야곱의 체험을 거친 후에라야 비로소 견고하고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자기(자아)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할례 후에 약속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창17:19) 아브라함이 할례를 통해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이삭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을 거저 누리는 이삭의 삶은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철저히 제거되고 처리되지 않으면 결코 누릴 수 없는 세계이다.  


이삭에게서 우리는 사람 자신에게 있는 수많은 약함과 결함, 약점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특별한 종류의 사람 곧 그리스도인의 복된 삶의 자리를 볼 수 있었다. 그런 이삭 다음에 나타난 인물이 왜 야곱인가? 이것은 로마서 6장 다음에 7장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로마서 6장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로 말미암아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났으며 따라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위해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로마서 7장은 인간은 구제불능의 죄인이며 육신 안에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왜 6장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죽음과 부활을 말해놓고서 7장에 와서 다시 그런 말을 다시 꺼냈는가? 그것은 6장의 역사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승리와 안식의 삶은 오직 날마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손 아래 맡기는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체험은 로마서 7장의 체험이다. 이것이 없으면 로마서 6장에서 말한 의의 병기로서 그리스도의 삶, 하나님의 부와 승리를 나타내는 아들의 복된 삶은 실제적으로 체험될 수 없다. 십자가는 아브라함에게서도 부분적으로 체험되어졌지만 야곱에게 이르러 더욱 철저하고 분명하게 체험되어졌다.
 

[하나님의 선택과 다루심]

우리는 야곱에게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크게 두 가지 측면을 볼 수 있으니 그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다루심이다.

우리 모두는 은혜를 누리는 것은 좋아하지만 다루심을 받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려면 다루심을 받는 것은 생략될 수 없는 필수 과정이다. 야곱은 야심만만하고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남의 것을 많이 빼앗았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지 않으실 수 없었다.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다루심은 죄인이나 불순종하는 자를 처벌하시는 손길이 아니라 부름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그의 부름 받은 자리를 분명하게 인식시키는 손길이며 그 자리와 그 이름에 합당한 자로 변화시키는 손길이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빼앗는 자'이다. 그는 그의 형 에서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그의 발꿈치를 잡음으로써 빼앗는 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에게는 야망이 있었고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충만했기 때문에 무슨 일에서든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무언가 행하고 무언가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이삭에게 있던 평강과 안식이 없었고 수고와 분투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러한 야곱의 행동은 무익하고 헛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미 야곱을 이기는 자로 선택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야곱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수고와 노력이 아니라 이상(異象, vision)과 계시였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무엇을 해 놓으셨으며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수고는 허사가 되었으며 그의 인생은 헛된 노력으로 가득한 인생이 되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또는 이기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밀어내거나 잡아당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첫째가 되도록, 이기는 자가 되도록 정해놓으셨기 때문이다.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0-16)

이 사실을 알았다면 야곱은 일생동안 뛰어다니지 않고 그의 아버지처럼 조용히 안식하며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처럼 안타깝게도 야곱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은 말하자면 이미 잡은 것을 잡으려고 분주히 뛰어다니는 인생이 되고 말았다.

그는 그의 형을 속여 장자권을 빼앗았으며 그의 외삼촌을 속여 빼앗았다. 그러나 이런 삶은 야곱의 생명과 지음 받은 위치에 합당한 삶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삶이 보장받는 '아들'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이방인과 마귀의 삶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하나님의 간섭과 다루심이 필요했다.


야곱은 후천적으로 환경의 영향을 받거나 누구에게 배워서가 아니라 태생부터 천성적으로 큰 자가 되기를 원하고 그것을 위해 남의 것을 빼앗는 특성을 지닌 악착같은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창25:22) 분명히 이 싸움은 (어른들이 그런 것처럼) 의식적으로 싸운 싸움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생명 안에서 나온 본능적 싸움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만큼 야곱은 태생적으로 누구에게 지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두 아이들이 싸우는 것을 느낀 어머니 리브가는 하나님께 물었다.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창25:22)  이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 하나님의 뜻은 에서가 형으로 나오고 야곱이 동생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둘 중에서 결국 에서가 먼저 나왔다. 하지만 나오는 순간에도 야곱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에서가 먼저 나오자 야곱은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았다.(25:26) 이 때문에 그에게는 '발꿈치를 잡는 자'라는 뜻의 야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야곱은 동생으로 나왔지만 하나님에 의해 태중에서 이미 에서를 제치고 이삭의 축복을 잇는 후사로 정해졌다. 이것은 야곱의 어떠함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택함 받은 사람의 증거 혹은 특징은 무엇인가? 이 말은 곧 야곱이 참으로 이삭의 뒤를 잇는 후사요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라는 것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말과 같다. 물론 우리는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확실한 근거는 에서와 야곱의 삶의 체험에서 찾을 수 있다.

에서의 일생은 어떠했는가? 그의 일생은 대체로 편안하고 평탄했다. 그는 힘이 있고 성실한 자였으며 모든 것을 처음부터 자기 뜻대로 하는 자였기 때문에 특별한 고난이나 갈등이 없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고 말할 때도 그는 야곱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삶을 살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약속과는 무관한 사람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일생은 어떠한가? 그의 삶은 한 마디로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의 주어진 운명과 처지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어디로 가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다루셨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으며 도로 하나님의 목적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되 약속의 성취를 바라며 믿음으로 사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한 것이 아니라 육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하나님의 목적과 상관없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큰 자가 되는 것을 표방하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소망은 물거품이 되고 결국 그는 가장 가난하고 가장 곤고하고 가장 약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선택된 자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성경에 여러분이 확실히 구원받았으며 여러분이 확실히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었다는 기록이 있는가? 아마 여러분은 말하기를 '그런 기록은 없어도 하나님이 그의 음성을 듣는 모든 사람을 향해 선포하신 말씀이 곧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선택을 그렇게 주관적으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말할 수 있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 근거는 바로 우리가 지금 하나님에 의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우리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본래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을 원치 않았다.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이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만인이 다 추구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현실과 가치들을 무시하고 보이지 않는 하늘에 속한 가치들과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일에 대해 온통 마음을 쏟는 자리이다. 우리는 본래 어느 정도는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지만 그것을 밥과 옷과 생의 현실적인 필요들보다 더 추구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육신이 괴롭게 되더라도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 곧 사랑과 거룩과 의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부담을 안고 살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분으로부터 꼬임 받고 그의 덫에 걸려서 이렇게 된 것이다. 우리는 말하자면 어느 정도 제 정신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끔 주위 사람들을 보고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게 될 때 '내가 왜 이렇게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할 수만 있으면 여기서 벗어나서 남들이 다 가는 쉽고 편한 길로 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중 많은 사람은 그 동안 하나님을 떠날 수만 있다면 떠나보려고 무척 발버둥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용의치 않았다. 내가 안 떠나려고 해서 안 떠난 것이 아니라 뜻대로 안되어서 결국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 목사님들은 종종 신자들이 주님을 떠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참으로 사람이 주님을 떠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궁극적으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여러분에게 떠날 수 있으면 떠나보라고 말하고 싶다.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는 한 번쯤 떠나보는 것도 자기가 서 있는 자리의 복됨을 깨닫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괴롭고 힘들 때 "주님, 나는 더 이상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예수 믿는 생활을 그만 하겠습니다. 나는 내 편한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 경험에 의하면 주님은 그럴 때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와의 관계를 맺고 끊는 것은 네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달려 있는 것이다. 너는 끊어도 나는 끊지 않는다. 나는 네가 필요하여 비싸게 건졌기 때문에 너는 내 것이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나는 네가 가는 거기에 있을 것이며 네가 무엇을 하든지 결국은 나를 위해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렸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강한 증거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노력과 투쟁의 결과도 아니고 우리가 선하고 합당한 행실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우리가 선택하여 획득한 일이라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타락하여 사탄의 노예가 되고 날 때부터 죄를 짓는 자가 된 것이 우리의 선택에 의해 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우리의 선택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롬9:11,12) 언제 하나님께서 야곱이 에서보다 큰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는가? 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야곱은 하나님을 훌륭하게 좇았을 때 그랬는가? 아니다. 그것은 야곱이나 에서가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선택은 인간의 뜻이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긍휼히 여기심으로 인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누구를 긍휼히 여기시는가? 그냥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고 싶은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롬9:15)

하나님이 우리를 이와 같이 긍휼로 부르신 것과 우리의 부르심 받은 자리가 이처럼 견고한 것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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