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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곱 (2) -

 마태복음 1:1-17


야곱은 참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선택되고' '다루어지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형이다. 그는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심지어 나기도 전에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되어졌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하나님의 것' 즉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벧전2:9)이 되도록 일생동안 훈련을 받았다. 그의 일생은 자기(자기 뜻)를 내려놓고 하나님(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하나님에 의해 단련 받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노력과 투쟁의 결과도 아니고 우리가 선하고 합당한 행실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그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택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우리가 선택하여 획득한 일이라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므로 마음대로 버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셨는가? 여기에는 양면이 있다. 한편으로는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를 살게 하시고 평안과 안식, 기쁨과 만족 가운데 두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사람)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9:11) 즉 하나님의 뜻이 서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참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게 하시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그리스도 안에서 되찾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르신 자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실한 인간의 자리', '참 아들의 자리'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참 아들의 형상 곧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쉬지 않을 것이다.

많은 형제들의 경우에 처음 부르심 받은 자리는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초라했다. 그리고 더 많은 형제들의 경우에 현재의 모습도 (육신의 모습으로 볼 때) 초라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드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자리가 바로 그의 영광의 아들 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과정을 겪게 하시든지 결국 우리를 그 영원하신 아들과 같은 자로 빚으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금방 될 일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며 고통스런 과정을 겪음으로써 힘들게 이루어질 일이다. 부르심은 순간에 되는 것이지만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다루고 조성하는 일은 일생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많은 신자들이 꼭 야곱처럼 십자가의 체험을 일생동안 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의문을 가진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있으면 사람이 단번에 변화될 수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고통스런 연단이 필요한가 하고 생각한다.

하나님(성령님)이 사람을 단번에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신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마음대로 움직이는 자동 기계로 지음 받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변화시킬 때 언제나 성령님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일깨우시고 감동시키시는 방법을 쓰신다. 물론 바울처럼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단번에 폭발적으로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하나님의  급한 필요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일어난 일이지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로 인해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한 사람들도 후에 성령의 지속적인 다루심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야곱으로 돌아가 보자. 야곱의 일생은 참으로 많은 환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다루심을 받았는가? 욕심과 그로 인한 마음의 걱정 근심 염려, 불안과 요동치는 상태에서 해방되어 평안과 행복을 누리기 위함이었던가? 우리가 만일 그렇다고 말한다면 야곱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나의 전 생애 동안 평안을 가지지 못했다. 나는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도 이등이었기 때문에 형과 싸우느라고 평안치 못했고 그 이후 일생동안 이 사람 저 사람으로 말미암아 다투고 마음 상하는 일을 겪느라고 전혀 편치 못한 일생을 보냈다." 야곱의 생애는 마지막까지 육신적으로는 편치 못한 생애였다. 그는 고향이 아닌 애굽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일생은 오직 그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다루심을 받는 생애였을 뿐이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그에게 평안과 기쁨과 만족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땅에 살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약속에만 소망을 두는 사람이 되게 만드시는 것이었다. 야곱의 일생을 통해 얻은 유일한 소득은 (다른 것은 다 잃고) 오직 하나님을 얻은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탄에게 속은 인생을 제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다. 모든 것을 가지고서도 무언가 부족한 것처럼 허덕이며 더 가지기 위해 끝없이 다투고 뺏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불러서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서 안식하게 하는 것이다. 빼앗는 자 야곱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아담의 자손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오늘날 빼앗지 않고(경쟁하지 않고) 조용히 손 풀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살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그리스도)을 보게 만들며 그 안에서 안식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결국 야곱은 그렇게 되었다. 창세기 47장 이후의 기록을 보면 야곱은 기근을 만나 양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간 입장이었지만 애굽 왕을 만났을 때 조금도 굽실거리지 않고 도리어 손을 펴서 축복을 베풀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야곱에게는 크게 두 가지 하나님의 조치가 취해졌다. 첫째는 그가 동생으로 태어났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가 자기 몫의 삶을 보장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1.동생으로 태어남

야곱은 두 번째로 태어났다. 즉 에서의 동생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야곱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악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야곱은 천성적으로 2등을 할 수 없는 자였는데 출생은 2등이었다. 야곱이 나중에 형에게 교활한 방법으로 장자권을 획득하고 사술을 써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내게 된 것은 다 그가 2등으로 났기 때문에 한 것이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에 대해 열려 있었으며 그것을 갈망하였지만 그의 환경은 자연적으로는 그것을 얻기 어려운 환경이었다는 것이 바로 야곱의 모순된 상황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어렵고 꼬인 여건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는 야곱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야곱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야곱은 머리가 좋고 에서는 힘이 세었다.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일 중 하나가 영리하기는 하나 힘이 없는 사람이, 힘은 좋으나 무식한 사람 밑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입장에서 볼 때 터무니없는 것이며 괴로운 것이다. 야곱은 나면서부터 이런 환경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다루시기 위해 조성하신 환경이었다.

그러므로 야곱의 인생 경험은 부르심 받은 사람들 중 특별히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야곱은 결코 특별히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영리하면서도 힘은 없고 약속의 후사가 될 소망은 강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장자가 아닌 상태로 태어난 사람이었을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마치 무슨 큰 문제라도 있는 사람인양 오랫동안 후라이펜에 넣고 볶았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부르시고 다루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목표는 결코 죄인을 불러 보통의 선한 사람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통의 선한 사람은 성실하고 좋은 자연인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은 보통 때는 과도한 욕심을 품거나 무리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며 할 수 있는 한 선을 행하며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사람이며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흔치 않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목표가 될 수 없는가? 그것은 그들이 그 건전한 상식과 교양과 좋은 성품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하나님의 진리를 말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정직하시며 언제나 사랑이 많으시며 언제나 거룩하시다. 그러나 선한 자연인은 보통 때는 죄를 짓지 않으며 깨끗하고 바르지만 야곱과 같은 처지에 이르면 즉 부득이한 상황에 이르면 죄를 짓는 것도 불사하며 무리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빌라도를 안다. 그는 결코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몰아붙일 사람은 아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요19:12,16)

빌라도는 상식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주님에 대해 조사한 후 무죄 석방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를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될 수 없다는 무리들의 말에 굴복하여 결국 불의한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사람은 자기 이익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데서는 상당히 의롭고 공정하다. 그러나 자기 이익과 크게 결부된 일에 이르면 그 상식과 교양이라는 것은 날아가 버리고 만다. 세상도 죄만 짓는 것은 아니며 상당한 정도로 선과 의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는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세상과 그리스도의 차이는 최후의 극한적인 상황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세상도 여유 있을 때는 남을 돕기도 하고, 선하고 공정한 판단도 하며 양보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크게 손해보아야 할 자리에 이르면 건전한 상식과 교양과 여유를 거두어들이고 대신 이기적이고 동물적인 본능을 나타내고 만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손해보고 희생당하더라도 선과 의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생명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세상에게는 영생은 없고 오직 이생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삶은 결코 양보하거나 희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생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세상에서의 이익과 영광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빌라도는 결코 나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할 수만 있었다면 분명히 주님을 놓아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으면서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의를 이룰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빌라도의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들의 생명을 깊이 받아들임 없이 건전한 상식과 교양만으로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최후의 순간에 견디지 못하고 주님을 배반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환경과 경험은 특별히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리하고 생각이 멀쩡하면서도 여건이 그것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필요한 환경이며 경험이다. 우리는 다 너무 똑똑하고 잘났기 때문에 그대로 있으면 다 남을 다스리고 모든 영광과 존귀를 자기가 차지하려고 하지 남에게 순종하거나 남의 유익을 위해 자기 영광을 버리고 남의 필요에 자기를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정말로 영리하고 괜찮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은 다 자기가 영리하고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것을 다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로는 다 자존심이 강하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은 자기 위에 있는 (대단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머리 숙여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이러한 상태를 처리하려고 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그를 위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아는 반드시 분쇄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평소에 우리가 제법 괜찮은 사람이며 결코 무리한 일이나 억지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자라는 사실에 안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야곱의 상황, 곧 모순되고 자아가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 있을 때도 조용히 하나님의 손을 기다리며 그를 의지하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 인생이 빛나게 될 것을 소망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다 변화를 겪어야 한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고 떡을 주시면 감사해 하고 하나님을 믿고 위험에 처하면 불평하는 사람은 상식적이고 좋은 사람은 될지언정 하나님의 목적에 적합한 자는 아니다.

자아의 만족은 옛 사람(자아)의 터무니없고 헛된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죽임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부르신 자들을 육신에 대해 실제로 죽은 자가 되기까지 따라 다니며 반드시 죽이시고야 만다. 우리는 야곱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처리하시고 그를 이스라엘로 만드신 후에야 비로소 그의 열두 자녀를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큰 하나님의 나라를 탄생케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그 옛 사람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를 처리하심에 있어서 구약 시대에 야곱을 분쇄하시듯이 우리 자신을 막 바로 분쇄하심으로써 우리를 처리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를 죽이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처리하시는 근본적인 방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넣으셔서 함께 죽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죽이시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과거지사가 되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옛 사람의 생명을 대신하여 우리 속에 살고 있다. 하나님이 지금 하시는 일은 우리가 지금 이미 죽은 자임을 여러 방법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에 대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종종 자아가 원하는 것들을 뺏어 가시거나 세상에서 버림과 멸시를 받도록 만드신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고생과 고난으로 지금 우리를 죽이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가 (자기에 대해서든 세상에 대해서든) 이미 죽은 자임을 드러내시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다. 환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다루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이미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고 오직 하나님을 대하여서만 살아 있으며, 세상에서 세상 것으로 말미암아 안식과 만족을 누릴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평안과 기쁨을 누릴 자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깨달음으로 인해 실제로 하늘에 속한 복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다.

여러분의 주변 환경을 생각해 보라. 여러분을 깊이 이해해주고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며 여러분을 위해 주는 사람은 매우 적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분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며 여러 가지 일로 여러분을 괴롭고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나 재수가 없어서, 무엇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상황은 바로 여러분을 다루셔서 그의 부르심의 목적에 맞게 여러분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손길로 말미암아 나타난 상황인 것이다.  

야곱에게는 멍청하고 형만 좋아하는 아버지 이삭이 있었고, 자기를 사랑해주기는 했으나 교활한 꾀를 내어서 무리하게 장자의 권한을 상속받게 하려고 하다가 결국은 형과 원수가 되게 만들고 집을 떠나 긴 고생길로 나서게 만들었으며 결국은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된 어머니 리브가가 있었으며, 그리고 5분 먼저 났으면서 언제나 자기 위에 있어서 자기를 이등으로 만든 형이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자기를 속이며 고생시킨 외삼촌 라반이 있었고 서로 싸우는 두 부인이 있었고 말썽 많은 여러 자녀들이 있었다. 얼핏보면 그들은 다 어쩌다 보니 그냥 야곱 곁에 존재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야곱이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택정 받았다면 그들 역시 야곱을 위해, 즉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하기 위해 만세 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야곱 곁에서 야곱의 삶에 영향을 미치도록 배치된 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 환경이나 직장 환경 또는 이런 저런 이웃들, 그리고 교회 환경에 대해 불만을 품지 않기 바란다.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특히 우리가 불편을 느끼고 불만을 느끼는 대상은 아마도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의 결혼 생활로 인해 불평하지 않기를 바란다. 저는 감히 여러분의 남편이나 여러분의 아내, 그리고 여러분의 부모님과 자녀들이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육신적으로 말하자면 결혼 생활에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할 것이다. 사실 나는 자기 남편에게 만족한다고 말하는 아내 자기 아내에게 만족한다고 말하는 남편을 거의 본 일이 없다. 결혼하기 전에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결혼 생활에 대한 단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경우에 실제 결혼 생활은 그런 꿈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적으로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를 좋게 여기든지 싫게 여기든지 그 사람은 우리에게 필요한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참으로 아신다. 우리 생각에는 내게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저런 사람을 붙이신 것이다.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맞게 주신 바로 그 사람이다.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들의 결혼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 판단하고 잘못 행하여 처음부터 남편이나 아내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잘못된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일은 하나님이 잘못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해서 즉 육신의 정욕을 좇아 그릇 선택하거나 남의 충고를 무시하고 잘못 판단해서 택하지 말아야 할 일을 택하여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우리를 다루실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상황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순종하면 그 잘못된 상황 속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 문제는 객관적 환경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 변화된 마음이 된다면 어떤 환경도 우리에게 궁극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2.사랑하는 부모와 집을 떠나 고생 길에 오르게 됨

야곱이 사술을 써서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뺏고 아버지의 축복을 약탈한 후에 그는 에서의 미움을 받아 부득이 집을 떠나 먼 타향으로 가야만 했다. 그는 리브가의 권유에 따라 에서의 노가 풀릴 때까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나중에 우리는 야곱에 라반의 집에서 겪은 일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지만 거기서 야곱은 라반과 레아, 라헬 그리고 여종들과 거기서 난 여러 자녀들로 말미암아 많은 고통을 겪었다. 특별히 그는 외삼촌 라반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는 야곱보다 더 교활하고 탐욕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 역시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가 그러한 하나님의 손길, 곧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다루심의 손길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가 본 것은 오직 그의 아버지의 어리석고 무심함과 그의 어머니의 영리하고 편협함, 그리고 형의 거친 성격과 증오, 외삼촌의 교활함과 악함, 여러 부인들의 지긋지긋한 애정 다툼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이 그것을 볼 때까지 고삐를 놓지 않고 계속 조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고생과 실망이 반복되는 길고 긴 날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는 그 모든 날들은 하루도 헛된 날들이 아니었다. 그가 만난 모든 사람과 모든 일들은 다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으며 그로 하여금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에 속한 사람이 되도록 작용한 가르침이었다.

내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나는 갈수록 내게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어느 것도 하나님의 목적과 상관없거나 의미 없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내 가까이에서 나를 반대하거나 나를 괴롭게 하는 환경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된다. 내 아내와 자녀, 부모님, 교회 형제들, 이웃들 어느 누구라도 궁극적으로 나를 해롭게 하거나 주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들 사람은 없으며 다 결과적으로 나를 유익하고 온전하게 만드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내 곁에 갖다 놓으신 사람들을 조금도 귀찮게 여겨서 떠나 보내고 싶지 않으며,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따라 이런 저런 사람들을 내게 더 붙이심으로 나를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다루시기를 원한다.

야곱의 인생은 험악한 인생이었지만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도록 단련을 받은 특별하고도 복된 인생이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이 야곱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 사람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인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해 소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과정 과정이 어렵고 고통스러울수록 우리의 소망은 더 크고 온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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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주님의 족보 (4) - 이삭 - (마1:1-17) / 2003. 5. 4 이상봉 2010.04.29 4341
4 주님의 족보 (3) - 이삭 - (마1:1-17) / 2003. 4. 27 이상봉 2010.04.29 4350
3 주님의 족보 (2) - 아브라함 - (마1:1-17) / 2003. 4. 20 이상봉 2010.04.29 4216
2 주님의 족보 (1) (마1:1-17) / 2003. 4. 13 이상봉 2010.04.29 4847
1 마태복음 서론 / 2003. 4. 6 이상봉 2010.04.29 6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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