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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족보 (7) :   유다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본래 야곱의 첫째 아들은 르우벤이었다. 그런데 야곱의 장자권(長者權)은 실질적으로 유다에게로 갔다. 유다는 야곱의 장자가 아니라 르우벤, 시므온, 레위 다음에 오는 넷째 아들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야곱의 약속의 아들이 된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하다는 것은 어떻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것은 은혜로 되는 것이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도 자기의 육신적 조건이나 자격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해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서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과정이 있는 법이다. 본래 하나님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맏아들이 장자권을 가지도록 정하셨다. 그러므로 정상적이라면 르우벤이 장자권을 가지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야곱의 장자권 곧 약속의 후사(後嗣) 되는 특권이 그에게로 가지 않고 유다에게로 넘어왔는가? 그것은 르우벤이 범죄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 야곱의 부인 중 하나인 빌하와 간음을 저질렀다.

야곱이 죽기 전에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적 예언에 의하면 르우벤이 장자가 되지 못한 것이 분명히 그의 범죄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주님의 족보에 오른 다른 사람들은 전혀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아무도 선하고 의로워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 오직 은혜로 된 것이다. 그렇다면 르우벤의 범죄가 특별히 문제가 된 것은 무엇인가? 죄에는 경중(輕重)이 없다. 죄는 다 악이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범죄 특히 르우벤 대신 장자권을 차지한 유다도 비슷한 범죄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그냥 둔 채 르우벤의 죄만 문제로 삼은 것은 르우벤의 범죄 곧 간음이 가져오는 결과 곧 음행이 하나님의 나라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범죄는 사람 앞에서의 문제일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이며 동시에 사탄과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죄인을 받으실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義(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이 죄인을 받게 되면 사탄은 하나님을 불의한 분이라고 조롱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사탄을 정죄하실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나라(몸, 성전)를 건축하심에 있어서 하나의 원칙을 유지하실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순결이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 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5:1-6:19)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음행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집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그것은 음행이 곧 마귀와 몸을 섞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신적 음행뿐 아니라 영적 음행 곧 우상 숭배도 역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경계하신 것이다. 몸 밖에는 불순물이 묻어도 그런 대로 괜찮을 수 있지만 몸 안에는 결코 그런 것이 포함(용납)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생명을 잃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르신 이유는 그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성도(聖徒)와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의 전(성전)이다. 그것은 자기 몸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그 근본 생명을 위태롭게 만드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는 행위요 성전을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순결은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이처럼 생명의 문제이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5:8) 교회는 누룩 없는 순수한 떡과 흠 없는 어린양을 먹음으로 시작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의 주님의 족보에 나오는 인물들은 다 은혜로 부름 받은 약속의 후사들이며 각기 좋은 면으로든 좋지 않은 면으로든 그들의 삶(특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들이다. 야곱의 여러 아들들 중 맏아들인 르우벤이 약속의 후사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넷째인 유다가 그것을 받게 된 것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해준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제발 아무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로 들어가지 행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죄인이 들어가지 의인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지 말기를 바란다. 한편으로 그것은 맞는 말이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죽은 자리에 있을 때 곧 실패와 연약함 속에서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할 말이지 하나님 앞에서 항상 할 말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서 서면 언제나 죄인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셨다. 그런데 그 안에는 있지 않고 혼자 육신대로 살면서 나는 죄인이고 그러므로 할 수 없다는 말만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좋아하시지 않는다. 모든 내면적(은혜의) 과정들을 다 생략하고 최종 결과만 딱 놓고 말하자면, 의로우신 하나님의 나라에는 불의한 자가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만일 죄인이 하나님의 나라에 포함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 아니다.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것은 사람의 사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정이다. 하나님은 아들의 나라 곧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셔야만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아들들만 들어갈 수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그 부르신 사람들을 불에 제련해서라도 아들의 생명만 지닌 순결한 자로 만드실 수밖에 없고 우리는 우리대로 어떻게 해서든 우리 안에서 모든 음행과 혼돈을 제거하고 오직 속에 주님밖에 없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장자권 곧 구약 시대에 있어서 장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에는 다음 세 가지 권리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두 배 몫의 기업(땅)을 받는 것(신21:17)이고 둘째는 하나님을 섬길 제사장 직분을 얻는 것이고 셋째는 왕의 직분 곧 형제들을 다스리는 지도자적 위치를 얻는 것이다. 장자가 제사장의 직분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장자는 그의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르우벤의 장자권은 한 사람에게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세 사람에게로 넘어간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대상5:1,2)

먼저 그의 두 배 몫은 요셉이 가져갔다. 이것을 두고 역대상 기자는 요셉이 장자의 명분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요셉이 얻은 이 (장자의) '명분'은 유다가 얻은 (장자의) '실제' 보다 나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혹자는 요셉이 얻은 장자의 명분은 진정한 장자의 권세가 아니라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명분이라도 그것도 귀한 것이다. 그것도 은혜로 주어진 것이요 본래 요셉에게는 돌아가지 않았을 분외(分外)의 복이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그런 특권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첫째, 아마도 요셉의 순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창39:7-20) 르우벤이 장자권을 상실한 것은 그가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에 합당치 않은 행위 곧 음행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가 음행을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육신(의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것)에 더 소망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는 약속의 후사 자리를 박탈당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요셉이 대신 들어갔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요셉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주인(보디발의 부인)의 간음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보장된 미래를 상실했다. 그의 행동은 단순히 육체의 정욕을 부인한 것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기를 부인한 것이다. 그것은 곧 십자가를 진 것이다. 종이 주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셉이 청년의 정욕과 미래의 출세를 거부하고 십자가를 선택한 것은 그에게 눈에 보이는 세상, 눈에 보이는 영광과 소망말고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영광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꿈(약속)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부분적이고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약속을 기업으로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실제로 야곱의 집에서 두 몫을 받을만한 일을 했다. 그는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애굽 사람들에게 은총을 입혔을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 집에도 그와 같이 은총을 끼쳤다. 그의 형제들을 포함한 야곱의 온 집이 다 요셉으로 인해 애굽에서 새 삶의 길을 얻었고 큰 민족으로 번창케 될 수 있었다. 이것은 결국 요셉이 한 측면에서 야곱의 장자 노릇을 한 것이며 이로 인해 야곱으로부터 두 몫을 받아 마땅한 기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요셉은 그 아버지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으며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 아들이었다. 그는 야곱이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얻은 교훈의 바탕 위에서 자기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부터 (거의) 시행착오 없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거했으며 하나님께 순종했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은 외형적으로는 고난 당하는 인생이었지만 실질적으로 항상 평탄하고 형통하는 인생이었다. 그의 인생은 그리스도를 가장 가깝게 예표하는 인생이었다. 동시에 그는 장자이신 주 예수님과 함께 장자의 권리를 얻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잘 예표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요셉은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통해서 아버지로부터 두 몫의 땅을 받은 것이다.

다음으로 제사장 직분은 레위에게로 돌아갔다.(신33:8-10) 레위는 본래 살인으로 인해 그 형 시므온과 함께 저주를 받았지만 그의 자손들이 출애굽 때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표현할 사람들을 모으실 때) 하나님의 편에 서서 헌신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고 이로써 하나님을 섬길 특권(제사장 직분)을 얻었다.

레위가 얻은 장자의 권리는 하나님을 친히 섬길 수 있는 특권인데 이것은 오직 자기 일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돌아보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32:26-29)

레위(지파)가 한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 자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처단한 것이다. 이것은 곧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택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人情(肉情)을 버리고 여호와의 편에 섰다. 그러므로 그들은 르우벤의 장자권의 한 몫을 가져갔다. 그들은 비록 창49장의 저주대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별도의 기업을 얻지 못하고 형제들 가운데서 흩어져 살며 형제들을 섬기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지만 출애굽 때의 헌신으로 인해 그러한 상태가 저주가 아니라 복이 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자의 남은 또 하나의 특권인 왕의 직분은 유다에게로 갔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8-10)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5:1,2)

유다는 형제들 중에서 주권자가 되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형제들을 다스릴 수 있는 왕의 지위를 얻은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가장 좋은 것이다. 이것은 장자권 중 실권이라고 할 수 있다. 약속의 후사의 핵심적 권세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만국)를 다스리는 권세이다. 이것이 바로 왕권이다.(계2:27,12:5)

이 특권이 유다에게 돌아간 것은 어떤 다른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는 특별한 일이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장자가 될만한 어떤 합당한 조건이나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가 그것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이다. 이스라엘(야곱)의 장자권은 르우벤이 아니면 마땅히 시므온과 레위에게로 가야했다. 그런데 그들이 르우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저지름으로 인해 그것이 유다까지 가게 된 것이다. 유다가 가진 조건은 오직 그가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 즉 '4등 인생'이라는 그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를 장자가 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의 일생은 오늘 우리에게 은혜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느 자리에서 부르심을 받았는지, 우리가 왜 구원을 받았는지를 말해준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  

그러므로 유다가 받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요셉은 요셉대로 이유가 있고 레위는 레위대로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역사하여 된 것이지만) 그러나 유다는 아무 이유도 자격도 없었다. 4등은 결코 장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1등이 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4등이 장자가 되는 나라이다. 경건한 바리새인과 율법 선생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창녀와 세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 세상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자격이나 조건이 인생을 결정하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인생의 질과 내용을 결정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보다 나은 사람들도 많고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도 많고 우리 같은 사람들도 많지만 아무도 여기 오지 못하고 오직 우리만 와 있다. 여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고 어떤 까닭이 있는가? 아무 이유도 까닭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여기 있는 우리에게는 임했고 바깥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임하지 않았다는 그 한 이유뿐이다.  


유다와 레위와 요셉에게 주어진 장자권 곧 약속의 후사 자리는 그리스도와 교회로 이어졌으며 거기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바로 유다가 예표하던 그 하나님의 아들(장자)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히12:23)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베드로는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다를 포함하여 주님의 족보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다 오늘 우리의 위치, 우리의 어떠함을 말해주고 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천하를 상속받았으며(두 배의 몫을 얻음), 또한 영원히 하나님을 대표하여 아버지의 권세(왕권)를 가지고 만국(만물)을 다스리게 될 것이며(왕권을 얻음),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그를 섬길 제사장의 지위를 얻었다.  

그리고 이것은 장차 이루어질 소망이 아니라 현재 이미 실현된 것이다. 물론 장차 완전케 될 여지는 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미래적인 소망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과 승리를 통해 이미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이 권세(장자권)를 누려야 한다.

안타까운 일은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세상에서 실제로 이런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이루신 사역을 알지 못하며 그의 승리를 붙잡지 않으며 그 안에서 안식하지 않으며 성령께 복종하지 않는 이것이 많은 신자들의 삶을 가난하고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

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풍성을 누리지(나타내지) 못하고 세상을 부러워하며 사모해야 하는가? 이것은 참으로 통탄스럽고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두 배의 몫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못 받은 사람과 같다. 또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 또한 누리지 못하고 산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당연한 일이다. 알지 못하니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하나님의 모든 요구가 율법과 짐이 될 수밖에 없다. 빛이 없고 계시가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 아니 하나님 자신이 수고스럽고 무거운 짐에 불과하다. 나는 여기 있는 모든 형제들이 참으로 그리스도가 이루신 장자의 권세를 유감없이 남김없이 다 누릴 수 있기 바란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왕도 제사장도 부유한 아버지의 아들도 아닌 삶을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바란다. 나는 여기 있는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돈이 없어도 부유하고 몸이 약해도 강건하고 4등이어도 머리가 되는 삶을 알기 바라며 진실로 체험하기를 원한다. 아무도 세상의 종이나 정욕과 물질의 종이나 사람의 종이 되지 않기 바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붙어 있기만 하면 저절로 장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부를 나타내는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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