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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족보 (8)  - 유다와 다말 -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아브라함의 장자권 곧 약속의 후사가 되는 특권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 중 둘째인 이삭이 가져갔고, 이삭의 장자권은 그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 중에서 둘째인 야곱이 가져갔다. 그리고 야곱의 장자권은 그의 열 두 아들 중 세 아들이 각기 한 부분씩 나누어 가져갔다.

야곱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은 장자의 명분(재산권)을 물려받아서 형제들의 두 배 몫의 기업(땅)을 가져갔고, 셋째 아들 레위는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권리를 가져갔다. 그리고 넷째 아들 유다는 장자의 통치권 곧 형제들 중에서 머리가 되어 온 이스라엘 집을 다스리게 되는 권리를 가져갔다.  

아브라함의 선택 그리고 이삭부터 유다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장자가 아닌 사람들이 장자권을 가져갔다는 사실은 모두 구원이 무엇으로 말미암으며 어디로 말미암는 것인지를 말해준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인간적 조건과 자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 은혜로 들어온 것이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해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다 우리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아마도 유다는 이러한 은혜의 구원에 대해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요셉이나 레위와 같이 장자권을 얻기에 합당해 보이는 어떤 특별한 자격이나 행위도 없었다. 그는 오직 은혜로 장자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므로 그가 받은 것은 참으로 바울의 말처럼 '삯'이 아니라 '복'이었다.(롬4:3-8)


그런데 일단 구원(선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런 구원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나타나게 되기 마련이다. 구원은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한 말을 빌자면) 하나님이 그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다의 장자권은 그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났으며 어떻게 실현되었는가?

야곱은 죽기 전에 유다에 대해 이렇게 예언(축복)했다.
"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8-10)
이것은 과연 그대로 실현되었는가? 그렇다. 이것은 적어도 두 방면에서 분명하게 실현되었는데, 첫째는 인구 면에서였고 둘째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차지하는 지위 면에서였다.

출애굽 직후에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유다 지파의 군사 수는 74,600명으로서 베냐민, 므낫세 지파의 2배 이상이었고 타 지파보다도 적어도 만 명 이상 많았다. 또 유다 지파는 광야 생활시 군사 수 서열 4,5위였던 스불론, 잇사갈 지파와 함께 성막 앞에 진주하였다가 진행시에는 선두에 섰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왕들이 유다 지파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유다는 형제들의 찬송이 되었고 모든 형제들을 다스리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가 천년 이상 지속되는 동안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열 한 지파는 이리 저리 흩어지거나 흡수되어서 그 정체성을 상실해 버리고 오직 유다 지파만 뚜렷하게 남아서 이스라엘의 명맥을 유지했다는 사실도 유다의 머리 된 지위를 보여준다. 이로써 '이스라엘 = 유다, 이스라엘 백성 = 유대인' 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유다는 참으로 형제들 중에서 머리가 되고 창대하게 되었다. 이로써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택하신 역사)는 분명하게 실현되고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지금 유다가 야곱의 장자권을 얻었다는 증거가 무엇이며 결과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것은 유다가 '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창대하게 되고 머리가 되었다는 것이 그가 약속의 후사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증거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증거가 있어야 하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약속에 대한 믿음과 기대이다. '약속의 후사'에게서 드러나야 하는 가장 큰 특징은 마땅히 '약속에 대한 관심'이다. 이것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크다는 것, 창대하다는 것, 머리가 되는 것은 약속의 내용이나 실제가 아니라 단지 그 외적 표현일 뿐이다.

유다가 이스라엘(야곱)의 실질적 장자라는 증거, 이스라엘의 장자로서 유다의 진정한 가치는 그가 부도덕까지 감수하고 집요하게 약속의 후사를 추구한 그의 며느리 다말을 옳다고 인정한 데서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다말이라는 한 여인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유다가 약속의 후사로서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의 며느리 다말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말은 자기 시아버지와 관계를 가짐으로써 베레스와 세라 라는 쌍둥이를 낳은 독특한 이력을 지닌 여인이다. 그는 본래 유다의 아들 엘의 부인이었는데 자기 남편 엘이 아이를 낳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어 버림으로써 자녀를 가지지 못하게 되자 관례를 따라 미혼인 그녀의 시동생들과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자 했는데 이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그 시아버지 유다를 기만하여 불법적인 관계를 가졌다. 이로써 그녀는 아들이라 해야할지 손자라 해야할지 모를 이상한 자녀들을 낳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부도덕하고 해괴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일을 소개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이 일을 행한 유다와 다말을 주님의 족보에 올려놓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낳은 (부정한 자식) 베레스가 당당히 약속의 후사(장자)가 되어 다윗과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말의 행위가 음행과 부도덕 이상의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말이 그 시아버지를 기만하여 그와 부정한 관계를 가진 것은 아들을 얻기 위한 열망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가 아들을 그토록 집요하게 추구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아들을 추구한 것과 같으며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아들(노아)을 추구한 이유와 같으며 아브라함이 아들(이삭)을 추구한 이유와 같다. 즉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약속의 구원을 사모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백성의 공통적인 특징은 한 '계시'(이상)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계시는 곧 약속이다. 여자의 후손이 죽을 운명의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모든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는 이상이요 소망인 것이다.  

다말은 자기에게 아무 세상적 영광이나 소망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남편도 죽고 재산도 없고 친정도 별 볼일 없는 처지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더욱 야곱의 집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다.

출애굽 할 무렵 애굽의 히브리 산파들은 왕의 지엄한 명령을 어기고 히브리인 남자 아기들을 살렸다. 그것은 그들이 왕보다, 애굽에서의 편안한 생활보다 더욱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고 소망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의(義)다. 다말에게는 다른 아무 것도 없었을지라도 바로 이 믿음과 이 의가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고 또 유다가 보기에도 좋았다.

유다는 다말처럼 다른 모든 면에서 못났고 보잘것없는 자였을지라도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 즉 약속을 믿고 소망하는 자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분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유다가 이스라엘의 장자라는 증거로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크고 창대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증거는 유다가 다말을 그녀의 부정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인정하여 "네가 나보다 옳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장자권을 잃은 르우벤의 망령된 행실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자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장자권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계하신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5-17)
쏟은 물을 다시 담기 어렵듯이 생명의 세계 안에서도 한번 잃어버린 것은 되찾기 어렵다. 그래서 지혜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진리는 사고서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잠23:23) 사울이 하나님의 신뢰를 잃고 이스라엘의 참된 왕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것은 단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두 번 거듭 불순종한 다음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다시 그것을 회복하지 못했다.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진리를 판다는 것은 에서나 르우벤처럼 망령된 행실로 장자권을 잃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는 한 번 얻으면 그것을 다시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옳은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말은 의미 있는 말이기도 하고 무의미한 말이기도 하다. 언제 옳은 말, 의미 있는 말이 되는가? 세상 끝 날에 가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택하신 사람들이 누구인지 드러나게 될 때 이 말은 옳은 말, 의미 있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주님을 따라가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 말은 반(半)만 맞는 말이다. 이 말이 우리로 주님의 택하심과 부르심 그리고 온전케 하시는 역사를 확신케 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면 이것은 의미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마귀가 믿는 자를 넘어뜨리기 위해 온갖 시험과 훼방을 하고 있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우리가 육신의 정욕과 감정이 이끄는 대로 안이한 태도로 살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틀린 말이며 무의미한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도 가까이 있고 마귀의 시험도 가까이 있다. 그러므로 영생도 가까이 있고 망령된 삶도 가까이 있는 것이다. 어느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어느 쪽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든지 장자가 되는 것이 하늘 끝에까지 가서 따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거하면 누구든지 장자(하나님의 약속의 후사)가 된다. 그리고 누구든지 장자의 권리를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말기 바란다. 이러한 방심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아직 우리 안에서는 아무 것도 확정된 것이 없다. 물론 우리의 승리의 기반은 확고하다. 그것은 주님이 이미 우리를 대표하여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으셨고 또한 마귀와 싸워 이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붙어 있으면 우리는 틀림없이 승리한다. 주 안에 붙어 있는데도 장자권을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주님께 견고히 붙어 있는 일' 자체가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싸움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얻은 구원을 잃지 않도록 깨어서 (진리로 무장하고) 마귀와 싸우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지금은 깨어 있어야 할 때이지 편히 안식할 때가 아니다. 안식은 오직 진리로 무장하여 마귀의 모든 시험을 물리치고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붙어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값없이(은혜로) 장자의 명분을 얻는 것도 가능한 일이고 값싸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리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거저 굴러 들어온 복을 손에 넣은 후 다시는 팔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진리를 사고서 팔지 않는 자가 되는 것이다.

다말은 오직 약속의 아들을 추구했다. 그의 소망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녀의 다른 삶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녀가 도덕적인 사람이었는지 성실한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유다에게 행한 일을 볼 때 그녀가 그다지 요조숙녀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그 어느 누구라도 그리스도를 붙잡는데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설 수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어떤 사람이 도덕 선생이나 청렴한 관리처럼 도덕적이거나 창녀나 부정한 관리처럼 부도덕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오늘 현재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의가 필요할 것이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의는 오직 아들(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때 당당하게 서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들 안에 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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