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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족보 (9)  - 라합 -

 마태복음 1:5, 여호수아 2장, 6장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라합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여리고) 정복을 할 당시 여리고에 살고 있던 기생이었는데 자기 집에 들어 온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 주고 그들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여리고 멸망의 날에 구원(생명)을 얻은 사람이다.

성경에서 그녀와 관련된 기록은 여호수아 2장과 6장에 자세히 나와 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上天下地)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수2:1-6,8-14)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男女 老幼)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내라 하매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수6:20-25)

히브리서는 11장은 믿음의 선조들에 대해 열거하면서 라합에 대해서도 말했는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고 하고 있다.(히11:31)

지난 주에 상고한 다말은 시아버지와 부정한 관계를 가져서 아들을 얻고자 한 사람이었는데 여기 라합은 기생이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생(zanah)은 술 파는 사람이 아니라 창녀 또는 간음하는 여자를 가리킨다. 이스라엘 정탐꾼이 그녀의 집에 들어간 것은 그곳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집이 아니라면 이방인이 어떻게 적국(敵國)의 가정에 함부로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누군지 묻지 않고 왜 왔는지 묻지 않는 곳 그곳이 바로 윤락가이고 라합의 집이었다. 참으로 라합의 집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집'이었고 라합이란 사람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서글프고 참담한 상황인가! 라합은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는 성경에 그녀가 나오기 때문에 그것도 주님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이 올라 있기 때문에 별 다른 거부감이나 이질감 없이 그 이름을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구원 받기 전의 라합을 만난다면 매우 난처해 할 것이다.  

라합에게는 두 가지 불리한 점이 있었다. 하나는 그녀가 창녀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여리고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여리고는 가나안의 도시로서 그 성이 이중으로 되어 있어서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는 견고한 도성(都城)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리고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거부하고 저항을 했고 결국 하나님에 의해 영원한 멸망과 저주를 받았다. "여호수아가 그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수6:26) 다른 성을 무너뜨린 후에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리고는 하나님의 나라가 서는 것을 반대하고 저항하는 세상 나라의 상징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영원히 재건되지 못하도록 저주를 받은 것이다.

라합은 바로 이 여리고의 성벽 위에 집이 있는 여리고 백성이었다. 여리고의 기생, 이것은 그 삶과 운명이 다 같이 저주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이름이다. 이러한 라합이 어떻게 성경에 믿음의 인물로 등장하며 주님의 족보에 올라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그녀가 행한 오직 한 가지 일 곧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한 것 때문이다. 자기 집에 들어온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성벽 너머로 넘겨주어 무사히 돌아가게 함으로써 심판주(審判主)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내었기 때문에 그녀가 우리의 조상, 우리의 형제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구원이 사람의 행위(공로)와 자격과 조건에 있다면 다말과 라합은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들을 추구했다는 한 가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했다는 그 한 가지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영광스러운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사람의 어떠함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달려 있기 때문에 다말과 라합은 그들이 지닌 모든 악 조건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일 곧 하나님을 붙잡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었다.

라합이 자기 집에 들어온 정탐꾼을 숨겨준 것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었다. 그것은 큰 모험이고 선택이었다. 어느 쪽에 붙어야 생명(구원)을 얻을 것인가를 놓고 선택을 한 결과 하나님을 택한 것이다. 자기 나라와 민족 그리고 자기 민족의 신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 백성을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하나님 쪽을 택한 것이다.  

라합이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잡기로 결정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上天下地)에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이 가진 것은 오직 소문과 풍문으로 들려진 하나님에 대한 소식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8-13)

많은 것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복음(살길)을 귀담아 듣고 그것을 붙잡으면 된다. 복음은 생명의 길이다. 그리스도는 교양이나 취미로 믿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생명의 길로 붙잡는 것이다. 진실로 생명을(살기를) 갈망하는 자는 많거나 적거나 생명의 길이 있으면 놓쳐서는 안된다.

라합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빼지 않는 주제가 신자의 거짓말 문제이다. 선의의 거짓말은 해도 되느냐 어떠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내는 결론은 대개 비록 성경에 나오는 라합의 경우가 있을지라도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라합은 원론적으로 볼 때 잘못했다는 것이다. 할 수만 있으면 거짓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것이 얼마나 생명과 거리가 먼 죽은 이론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물론 라합이 정탐꾼을 거짓말로 숨겨주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보호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에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려 있는 자리에서 그런 것을 생각할 여지가 어디 있는가? 생명의 급박성, 중요성에 대해 인식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이론을 늘어놓는 것이다. 거짓말이냐 참말이냐 왕이나 동족에 대한 충성이냐 불충성이냐 하는 것은 생명보다 덜 급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있어서 최고 선이며 최우선 고려 사항이다. 생명보다 더한 것은 없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최고 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전쟁 때 총알이 날아오는데 군인이 위장복을 입고 자기 있는 곳을 숨기는 것이 죄니까 솔직하게 자기 있는 곳을 드러내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적이 지금 나를 죽이려고 하는 최고의 악을 행하는데 최고의 선이 무엇이겠는가? 그 공격을 물리치고 살아남는 것이다.

라합의 교훈은 생명이 최고이므로 무엇보다 생명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라합은 결국 자기 집에 들어온 그 정탐꾼 중의 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살몬과 결혼해서 보아스를 낳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집에 그가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라합의 교훈 또 하나는 우는 아이 젖 준다는 원칙이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침노한다(biazo)는 것은 억지로 빼앗는다, 강제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15:1,2)

주님에 의해 구원받은 십자가의 한편 강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많은 선한 일을 한 후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주님을 인정(영접)함으로써 구원을 받았다. 그 강도나 라합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은 죄인들을 영접하기 위해 기꺼이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신다는 것과 천국은 그리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에 의해 기꺼이 침입을 당하도록 문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
아무도 이 구원에 다른 제한을 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아무도 이 영접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외에 사람에게 다른 선과 가능성과 소망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불가능과 어두움은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새 피조물이다. 그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이며 아들의 무궁한 생명으로 제한 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라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선택하게 된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진실로 '가난한 자'였기 때문이다. 가난한데 보통 가난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가난한 것이 바로 그녀로 하여금 지금 가진 것, 세상 것을 포기하고 다가오는 세계를 선택하게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천국은 가난한 자 곧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가난함 곧 세상에서 버림 받은 그녀의 자리 - 창녀됨 - 는 저주가 아니라 복이 되었다. 그래서 마태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복'이 있다고 한 것이다. 천국에는 훌륭한 사람은 없고 모두 복 있는 사람으로 가득할 것이다.


다말이나 라합은 그들의 선택의 결과로 영생을 얻었다. 그들은 단지 한 순간의 열정과 집착으로 한 순간의 이득을 얻은 것이 아니다. 순간의 멸망과 수치를 면한 것도 아니며 순간의 구원과 생명을 얻은 것도 아니다. 그들이 얻은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나라였다.
그들이 한 것은 다만 하나님(하나님의 약속)을 믿거나 하나님의 백성을 영접(선택)한 것뿐인데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었던 것이다. 다말은 단지 시아버지로부터 아들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조상 또는 그리스도의 후사가 된 영광스러운 아들을 얻었다. 그리고 라합은 단지 정탐꾼을 숨겨주고 멸망의 순간에 생명을 보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정탐꾼(?)과 결혼해서 다윗과 그리스도의 조상 보아스를 낳았다. 라합의 아들 보아스는 매우 권위 있고 영광스러운 사람으로써 이스라엘 모든 여성들이 그 그늘 아래 있기를 원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어느 모로 보아도 창녀가 낳을만한 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이것은 라합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영접한 이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 중의 하나이다. 그녀가 한 일은 다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정탐꾼을 숨겨준 것이었지만 그녀가 잡은 것은 하나님을 잡은 것이며 영생을 잡은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씨를 잡은 것이다. 믿음의 선택, 그리스도를 잡는 이 선택은 순간의 선택이지만 모든 문제를 결국 다 해결한다. 그것은 이 잡은 것이 비록 작은 것이지만 영원한 생명의 씨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사람의 세포 하나만 있으면 사람 전체를 복제할 수 있다는 시대이다. 작은 세포에 새겨진 작은 유전자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 종이 한 장에 기록된 설계도가 큰 집을 만들어내듯이 그리스도의 생명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흠없고 거룩하며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든다.

다말이냐 라합이냐 요조숙녀냐 창녀냐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되지 않으며 인생의 궁극적 성공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능과 무능, 유식과 무식, 강인함과 연약함은 다 정도의 차이지 하나님 앞에서 그 자체가 사람의 인생을 온전케 만들고 못 만드는 결정적 요인은 되지 못한다. 모든 소망, 모든 가능성은 오직 위로부터 온 생명, 새 생명, 아들의 생명, 그리스도의 생명, 이 한 가지에 있다. 그리스도를 잡는 사람이 최후에 가장 빠르고 확실한 인생의 성공자로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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