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마태복음 1:6, 삼하11장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주님의 족보에 올라 있는 몇몇 여성들 즉 다말과 라합과 룻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분명한 믿음의 사람 몇 명에 대해 공부했다. 룻과 보아스 다음에 나오는 인물 중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은 당연히 최우선 순위로 다윗이 꼽혀야 한다. 그러나 다윗을 공부하는 것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마태복음, 그 중에서도 주님의 족보를 살피는 이 시간에 그를 충분히 다루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를 공부하려면 구약 전체를 두루 돌아다니며 많은 부분들을 함께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공부는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고(사실은 이번 여름 집회 때 그에 대해 공부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오늘은 다윗 대신 그와 관련 있는 인물 우리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왜 우리아에 대해 살피는가? 그것은 성경이 솔로몬의 출생에 대해 말할 때 그가 단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않고 다윗과 우리야의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왜 밧세바가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인가? 바로 이것이 우리아를 살필 이유이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자. 왜 밧세바가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라고 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말할 때 다윗이 아니라 우리야를 말씀하시고 싶어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야(우리아)에 대해 말씀하시고 싶어하는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의 운명을 한 몸에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아는 누구인가? 삼하11장을 보면 그는 다윗 왕 때의 군인으로서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사람이었고 그것 때문에 결국은 다윗에게 죽임을 당했다.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저녁 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인이 잉태하매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하니라" (삼하11:1-5)

"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의 어떠한 것을 묻고 저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 주의 신복들로 더불어 잔지라 ....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삼하11:6-11)

"다윗이 저를 불러서 저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 때에 저가 나가서 그 주의 신복으로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하라 하였더라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의 있는 줄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삼하11:13-17)

"우리아의 처가 그 남편 우리아의 죽었음을 듣고 호곡(號哭)하니라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 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삼하11:26,27)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삼하12:7下-14)

이 기사에서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범죄하였으며 그 때문에 우리아가 어떻게 억울하게 죽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볼 수 있다. 마태복음 기자, 아니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이 아니라 실제로는 우리야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 왕국의 계속되는 왕좌 역시 다윗의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우리야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솔로몬과 다윗 왕국, 다윗의 왕국의 보좌는 다 다윗의 것이 아니라 우리야의 것이다. 적어도 반은 확실히 그렇다. 솔로몬에 대한 권리로 말할 것 같으면 밧세바는 아무 것도 아니며 또 그와 같이 다윗도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이름을 빌려주었을 뿐 실제로는 우리아에게로 돌아간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삼하12:24,25)

"다윗 왕이 명하여 가로되 밧세바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매 저가 왕의 앞으로 들어와 그 앞에 서는지라 왕이 가로되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날 그대로 행하리라"(왕상1:28-30)

솔로몬은 어떤 의미에서 범죄의 씨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다윗과 밧세바의 불법적인 결혼(간음) 안에서 나온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솔로몬은 극히 영광스러운 자가 되었다. 이것은 그가 우리아의 희생 안에서 나온 자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역사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솔로몬은 세상에서 가장 큰 평화와 영광을 누린 사람 중 하나였다. 이것은 그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가 의로 인해 죽임을 당한 우리아의 산물임과 동시에 죄 가운데서 십자가와 은혜(그리스도)의 체험을 한 다윗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솔로몬은 단지 다윗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아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부정한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었다. 솔로몬은 결국 우리아를 대표했으며 우리아는 그리스도를 대표했다.


이제 다윗과 우리아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다윗 언약 곧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약속(삼하7:4-16)에 따라 다윗은 어떤 경우에도 그의 왕위를 박탈당하지 않고 자손 대대로 이어갈 수 있었다. 이 언약 때문에 나중에 실제로 그의 자손들은 (그 대부분이 다윗처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적합한 인물들이 아니었지만) 왕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은 다윗의 육신적 혈통을 따라 난 자들이 육신적 왕가를 유지하는 일이 아니라 다윗 언약의 정신을 아는 사람들 곧 다윗의 은혜의 체험, 십자가의 체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다윗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나라를 맡아 다스리며 유지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역사는 이중(二重)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즉 눈에 보이는 표면적 왕국, 표면적 왕들과 보이지 않는 이면적 왕국과 이면적 왕들로 말이다.

지난 번에 우리는 야곱의 장자권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음을 살펴보았다. 표면적으로는 르우벤이 여전히 야곱 집의 장자였겠지만 실제로는 유다와 레위와 요셉에게로 그 권리가 돌아갔다는 사실 말이다. 이러한 일이 다윗에게서도 벌어졌다. 그런데 그 양상은 야곱의 경우와 반대이다. 야곱의 경우는 여러 아들들이 한 사람 야곱의 장자권을 나누어가져 간 것이지만 다윗의 경우는 한 아들 솔로몬이 다윗의 계통 자체를 왕창 우리아의 것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솔로몬은 한 사람이지만 두 사람을 대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다윗을 대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아를 대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다윗이 낳기는 했지만 우리아가 후사를 가지지 못한 채로 죽은 상황에서 그의 부인( 밧세바)을 통하여 낳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태어난 아들은 그 이름(소유권)이 후사를 낳지 못하고 죽은 먼저 남편(우리아)에게로 돌려진다. 결국 다윗은 자기 자식을 낳은 것이 아니라 고엘(죽은 자를 위해 대신 후사를 끼쳐주는 친족) 노릇을 하여 남의 자식을 낳아준 셈이다.

"다윗 왕이 일어서서 가로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등상을  봉안할 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 오직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군인이라 피를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대상28:2,3)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단지 전쟁에서 피를 흘렸을 뿐 아니라 살인도 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되면 사탄의 조롱거리가 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참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다는 말과 같다. 그 역할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로 돌려졌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누가 왕이며 누가 다스리는가? 언약에 충실한 사람이다. 다윗은 밧세바의 건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했고 우리아는 충실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다윗은 명분상으로만 왕이었고 실제로는 우리아가 왕이었다. 솔로몬은 바로 그 우리야의 왕 됨을 드러낸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야는 어떤 점에서 의인이었는가? 분명히 말해 둘 것은 그의 의는 단지 그의 선하고 충성된 행동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배경이 되는 그의 믿음과 희생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아의 의의 배경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그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가 죽기까지 이스라엘을 위해 싸운 충성스러운 군인이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우리아가 그렇게 충성스러운 군인이었던 것은 단지 그가 용감하거나 전쟁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세워서 열방 중에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깊이 주목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 일을 위해 보냄 받고 쓰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그는 암몬과 아람 연합군과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 열심히 싸웠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헌신이었다. 그는 전쟁에 충실하기 위해 다윗이 휴가를 보내주었을 때도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부인을 만나지도 않았고 오직 왕궁 문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전쟁터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윗과 요압에 의해 죽음의 위험이 높은 곳에 투입되었을 때 그 자리를 고수했고 결국 거기서 죽었다. 이것은 다말이나 라합이나 룻과 마찬가지로 약속을 믿고 거기에 목숨을 건 것이다.

 둘째, 우리아는 불의한 자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했다. 이것은 또한 그를 의인으로 만든 배경이다. 불의한 자에게 배척을 당함으로써 그가 의로운 자(하나님) 편에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상징적이다. 우리아는 죄인의 악에 의해 무고히 희생을 당함으로써 그 후에 있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죄인을 위해 희생을 당하신 그리스도, 죄인의 운명을 지고 하나님 앞에서 버림을 당한 그리스도를 예표했다.

이로 인해 우리아는 의인의 대표로 간주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하는 진정한 아들의 대표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그가 승리하고 그가 영광과 화평을 누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야라는 한 개인의 성패(成敗)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속한 모든 사람의 성패 문제이다.

우리아와 다윗 그리고 솔로몬의 역사는 우리에게 '힘이 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자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솔로몬의 뜻은 '평안' 또는 '화평'이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이름인 '여디디야'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이다. 솔로몬은 이처럼 그 출신 배경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다. 우리 생각에는 다윗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자기 아들의 이름을 솔로몬 즉 평강이라고 지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터무니없다. 그의 이름은 평강이나 화평이 아니라 죄와 고통이라고 지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는 죄 가운데서 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싫어한다" 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허용하심은 물론 거기에 더하여 여디디야라는 이름까지 주셨다. 이것은 그가 단지 다윗이 저지른 간음과 살인의 결과로 나온 자가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한 희생과 은혜의 결과로 나온 자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다윗의 불법적인 간음과 살인의 산물도 아니고 다윗과 밧세바의 단순한 결합의 산물도 아니다. 그는 우리아의 희생(믿음)의 산물이며 그것을 통해 택한 사람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대속적 은혜가 임한 것이 가져온 결과이다. 즉 솔로몬은 우리아의 희생과 다윗의 속죄(은혜) 체험이 낳은 산물이며, 우리아의 믿음과 다윗의 믿음이 낳은 결과이며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낳은 산물인 것이다.

우리아는 하나님이 죄인을 위해 예비하신 은혜가 무엇인지 잘 나타낸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그는 사람이 그 죄로 인해 죽어야 마땅한 자리에서 생명을 보존할 뿐 아니라 도리어 기쁨으로 잔치까지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이제 우리는 다윗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다윗은 밧세바를 정욕으로 탐함으로써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다윗의 유일한 범죄도 아니며 가장 큰 범죄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범죄가 다 큰 것이며 그보다 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다윗의 어떤 행위가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라는 사실이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 것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죄인이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타고났기 때문에 그런 죄를 저지른 것이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자신이 죄 중에서 태어났다고 고백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살리셨다. 그러나 죄는 사실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처리(사형)되어야 할 일이지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용서받고 살아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다윗이 죽인 우리아와 그 다윗의 죄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가 그의 죄를 대신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실제로 그 두 사람이 다윗의 죄를 위해 죽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죄인인 다윗을 살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세우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예표했을 따름이다.  


다윗이든 우리아든 누구든 이스라엘의 장자권을 가진 사람 곧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영원히 그의 아들이 되어서 하나님과 함께 살 복된 사람에게는 적어도 두 가지의 분명한 특징이 있다.

첫째는 지난번에 여러 번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 믿음의 내용이자 배경이 되는 한 정신 곧 '하나님의 은혜의 정신에 대한 분명한 이해(인식)와 체험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어떻게 이 복된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주님의 희생이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 세웠으며 그것을 유지시키는 확고한 담보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확고한 법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감정적이거나 즉흥적인 것이 아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반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기반을 흔드는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죽지도 않았고 왕위도 유지했고 더 나아가서 거기서 나온 아들을 후계자로 삼아 이스라엘의 최고 번영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의 변동이 가져온 일이 아니다. 그것은 법적 바탕 위에서 견고하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무슨 바탕? 그리스도의 사역의 바탕이다.

다윗은 범죄했기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그는 죽었다. 다만 자기가 죽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야와 첫 아이는 다윗 대신 죽은 것이다. 다윗도 이것을 알았다. 사실 다윗은 회개로 사죄(구원)를 받은 것도 아니다. 나단 선지자는 그가 죄를 자복하거나 회개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용서를 먼저 가져왔다.(삼하12:13) 다윗은 회개가 죄를 사유해주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가 얻은 사유(赦宥)와 구원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의 역사에 의한 복된 구원이었으며 그는 그것을 알고 노래했다.

다윗도 의인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솔로몬의 절반은 다윗의 몫이다. 그것은 그가 무슨 선하고 의로운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믿고 깊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오직 이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선포하며 기념하는 것으로만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을 알고 그 기반 위에서 일생을 살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 유대인의 왕을 이방인이 영접함 (마2:1-10) / 2003. 8. 10 이상봉 2010.04.29 4649
18 임마누엘 (마1:21-23) / 2003. 8. 3 이상봉 2010.04.29 4842
17 주님의 이름 (마1:18-25) / 2003. 7. 27 이상봉 2010.04.29 4608
16 주님이 마리아에게서 나심 (2) (마1:18-25) / 2003. 7. 20 이상봉 2010.04.29 4353
15 주님이 마리아에게서 나심 (1) (마1:16) / 2003. 7. 13 이상봉 2010.04.29 4154
14 주님의 족보 (13) - 유다 왕들- (마1:7-11) / 2003. 7. 6 이상봉 2010.04.29 6623
13 주님의 족보 (12) - 솔로몬 - (마1:6) / 2003. 6. 29 이상봉 2010.04.29 4180
» 주님의 족보 (11) - 우리아 - (마1:6, 삼하11장) / 2003. 6. 22 이상봉 2010.04.29 5277
11 주님의 족보 (10) - 룻 - (마1:5) / 2003. 6. 15 이상봉 2010.04.29 4940
10 주님의 족보 (9) - 라합 - (마1:1-17) / 2003. 6. 8 이상봉 2010.04.29 5590
9 주님의 족보 (8) - 다말 - (마1:1-17) / 2003. 6. 1 이상봉 2010.04.29 4117
8 주님의 족보 (7) - 유다 - (마1:1-17) / 2003. 5. 25 이상봉 2010.04.29 4436
7 주님의 족보 (6) - 야곱 - (마1:1-17) / 2003. 5. 18 이상봉 2010.04.29 4029
6 주님의 족보 (5) - 야곱 - (마1:1-17) / 2003. 5. 11 이상봉 2010.04.29 4375
5 주님의 족보 (4) - 이삭 - (마1:1-17) / 2003. 5. 4 이상봉 2010.04.29 4341
4 주님의 족보 (3) - 이삭 - (마1:1-17) / 2003. 4. 27 이상봉 2010.04.29 4350
3 주님의 족보 (2) - 아브라함 - (마1:1-17) / 2003. 4. 20 이상봉 2010.04.29 4216
2 주님의 족보 (1) (마1:1-17) / 2003. 4. 13 이상봉 2010.04.29 4847
1 마태복음 서론 / 2003. 4. 6 이상봉 2010.04.29 6856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