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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 아브라함과 다윗과 마리아의 자손 예수 -

아브라함과 다윗과 마리아, 이 세 이름은 하나님 앞에서 의미 깊은 이름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생명을 대표하고 다윗은 십자가에 의해 처리된 생명을 대표하며 마리아는 주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생명을 대표한다.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이 세 종류의 생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들은 주님의 인격의 특성을 이루고 있다. 주님은 이 생명으로 마귀를 이기셨다. 이것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셨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를 이 생명 안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생명에 대해 깊이 알아야 한다.


- 마리아의 순종 -

마리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은 순종의 생명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순종'은 아들의 생명이 지닌 매우 큰 특징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고, 다윗도 하나님이 그에게 지워주신 굴레 아래서 곧 하나님의 손 아래서 순종했다.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 중 순종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사무엘 시대의 이스라엘 왕 사울과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왕 아하스 같은 자들만 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이나 제안을 거절하고 자기 생각과 고집대로 행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생각을 접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순종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있어서 직접적인 수단과 과정이다. 뜻을 세우시고 추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그것을 직접 실행(수행)할 자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뜻을 이룰 '사람'을 찾으신다.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리고 부름 받은 사람이 즉각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또 지연된다. 물론 하나님은 인내의 선수이시고 어떻게 해서든지 기어이 그의 뜻을 이루어내시기 때문에 사람이 불순종한다고 해서 그의 뜻이 꺾여지거나 조급한 나머지 일을 대충 해버리시는 일도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배제하고 스스로 일을 하시는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은 목적이 땅에서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종은 사람의 본연의 직무이고 또한 사람의 영광이다. 모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마음이 열려 있는 겸손한 사람들의 순종과 헌신을 통해 이루어져왔다. 불순종하는 자, 하나님의 뜻을 향해 마음이 열려 있지 않고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는 교만하고 완고한 자들 안에서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다.  

마리아도 하나님의 뜻을 이룬 중요한 순종의 사람 중 하나이다. 마리아의 순종은 역사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종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한 여자의 순종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세상에 오셨다. 누가복음 1장에 그 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리아는 요셉과 동침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천사가 마리아에게 미리 고지한 일이었다.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1:26-38)

천사의 말은 마리아가 남편과 관계없이 혼자 잉태하여 아기를 낳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처녀 혼자 잉태한 것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결코 합리화될 수 없는 부도덕한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천사가 그녀에게 제안한 일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누가복음의 기록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마리아의 고민은 '혼자 잉태함으로써 부도덕한 사람처럼 비치게 된 그녀의 처지를 남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브리엘의 설명도 그녀의 친척이자 세례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능력이면 된다'는 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늙어서 잉태할 수 없는 할머니 엘리사벳도 잉태했으니 너도 문제없다는 식인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마리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뜻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거부감이나 의문도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일하신다면 거기에 순종하여 나를 드린다는 것은 나의 의무고 영광이지 싫다 좋다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리아의 순종은 하나님의 사람, 아니 사람으로 지음 받은 자라면 누구나 당연히 가져야 할 한 덕목을 보여주었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 덕목은 하나님을 그 안에 담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본받아 지어졌다는 말로만 이해한다. 창세기 1장의 기록이 그런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에게는 사람과 같은 형상이나 모양이 없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1:15)
이 말은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 즉 형상이 없는 분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하나님을 형상화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을 받아 지어졌다는 말이지 그 형상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베껴서 지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자로, 그리고 하나님을 담는 그릇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자로 지음 받았다는 뜻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요 지음 받은 본래 자리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드려지지 않는다면 그 인생은 가치 없는 인생이요 소용없는 인생이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만 이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렇게 말해야 한다.


- 순종과 믿음 -

주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때로 우리 자신의 계획이나 체면이나 품위 유지를 포기해야 함을 의미한다. 마리아가 홀로 잉태했을 때 적어도 그녀의 남편에게 있어서 그녀는 매우 곤란한 관계에 놓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오해의 문제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결혼 파탄으로 이어질 문제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남편에게 구구히 변명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며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아의 잉태와 그것을 요셉이 발견한 것은 적어도 수태고지가 있고 난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요셉이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고 그녀와의 관계를 끊고자 했다는 것은 그동안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기 안에서 어떤 일을 벌어졌는지를 자기 입으로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요셉은 경건한 사람이어서 만일 마리아가 천사를 통해서 전달된 하나님의 뜻을 그에게 설명했다면 오해 없이 일을 순순히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그가 마리아와의 관계를 조용히 끊고자 했다는 것은 마리아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왜 마리아는 자기 안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자기 입으로 요셉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역사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자기에게 벌어진 일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일이라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천사를 보내어 일의 전모에 대해 설명하신 것처럼 요셉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혹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쨌든 하나님이 알아서 일을 처리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인간적인 해결책을 유보하고 조용히 하나님의 일을 기다렸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운다. 믿음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단지 어떤 일이 어찌 어찌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시며 모든 일을 그 지혜와 능력으로 온전히 이루실 것을 믿는 것이다. 과정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끝(결과)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과정은 참아낼 수 있다. 그 과정을 다 알지(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또 그 오해가 일시적인 경우도 있지만 오래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일일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주님이 마리아에게 처녀 잉태를 명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이해될 수 없는 어떤 일을 명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저항하고 거부하며 변명하고 호소할 것인가 아니면 순순히 받아들이고 수치와 오해를 참을 것인가? 믿음이란 지금 잠시 받는 수치와 오해보다 장차 받을 영원한 영광이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4,25)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7,18)

이와 같이 진정한 순종은 믿음과 (그 믿음에 근거한) 소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믿음만이 사람을 순종케 하며 오래 참을 수 있게 만든다. 인간적 결심과 의지(意志)가 우리로 순종케 하고 인내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신 바 (하늘에 속한 참 것들에 대한) 명확한 계시가 우리로 순종케 하며 인내케 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도 마리아의 순종과 믿음에 대해 말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눅1:41-45)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생에 대해 말한 것은 오직 그녀의 순종과 믿음이었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의미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구원)을 붙잡고 소망하며 그것을 위해 인생이 드려지는 것이 진실하고 복된 인생이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눅1:46-55)

이 찬송에서 드러나는 바는 마리아가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언약)에 매우 정통했으며 그것을 깊이 소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성령이 충만하다고 해서 알지도 못하는 헛소리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입으로 나오고 소망하던 것이 밖으로 표현되는 법이다. 마리아가 성령이 충만하여 찬송한 내용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정확하고 핵심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이 역사만이 죄와 고통과 비천함과 저주에 내던져진 이스라엘 백성들과 온 인류에게 유일한 소망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이 크고 영원하신 목적이 비천한 자기 인생을 통해 성취케 됨을 너무도 큰 영광과 축복으로 여겼다. 실제로 그러했다. 그러므로 거기에 무슨 고민이나 갈등이 자리잡을 여지는 없었다. 인간적 생각으로 본다면 남자와 관계도 가지지 않은 여성이, 그것도 정혼하여 남편이 있는 여성이 남편과 상관없는 아이를 잉태했는데 어찌 고민이나 갈등이 없겠는가? 그러나 마리아의 눈에는 그가 직면한 그런 인간적, 육신적 문제보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계시 안에서 보게 된 영광과 기쁨이 더 컸고, 그가 간직하고 있던 육신적 소망(보통 생활, 정상적인 결혼 생활의 유지)보다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소망하는 열망이 더 컸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큰 역사를 이루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즉각 기쁨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마리아와 같이 준비된 마음 곧 믿음과 소망을 가진 자를 통해서만 성취된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이룬 주체(성령님)는 분명히 아니다. 모든 일은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가 시작하시고 추진하시고 끝맺으신다. 마리아는 단지 성령님의 작은 종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에는 이러한 종들의 헌신과 봉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헌신과 봉사의 기초는 약속을 믿는 믿음과 그것의 성취를 간절한 소망하는 소망이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5-9)

심는 자와 물 주는 자는 일의 주체가 아니며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 일의 주체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 없이 일하시지 않는다. 누구도 도구 없이 일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에 도구로 쓰이는 자를 일컬어 바울은 하나님의 동역자, 사역자(일꾼, 시행자)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사역, 동역에는 요셉도 한 몫 했다. 만일 요셉이 꿈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마리아를 끝내 거절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기는 해도 주님의 탄생은 순조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아내에게서 부정한 일이 벌어졌음을 보고도 그것을 떠벌리지 않고 조용히 그와의 관계를 끊으려 했고 성령의 계시가 있자 즉시 그것을 수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젊은 청년들이었다. 아마도 20대였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나이가 젊어서 아직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은가? 세월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지금 순종할 수 없다면 나중에도 할 수 없다. 젊은이는 언제나 자기 뜻대로, 야망대로 살 수 있고 모든 소망이 끊어진 늙은이만이 조용히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우리가 너무 급하고 우리 자신의 계획과 야망, 생각에 깊이 사로잡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계획을 말씀하시고 그것을 실현을 위해 우리 삶을 요구할 때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위치에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에 쓰이지 못하는 인생은 젊은 인생이나 늙은 인생이나 다 죽은 인생이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 안에서 큰 일을 시작하셨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우주가 우리 안에서 새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 일을 작게 여기지 말기 바란다. 조용히 주님의 일하심에 자기를 드려서 하나님의 목적에 기여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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