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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계명 (마22:34-40) / 2006. 5. 14

2010.04.30 15:56

이상봉 조회 수:4613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4-40)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막12:28-34)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주님께 와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시험을 한 후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와서 주님을 시험했다. 이 시험들에 대해서 주님은 지혜롭고도 권위 있는 답변을 내놓으심으로써 질문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셨다.

주님이 그를 시험하려는 자들에게 그렇게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지혜와 권세는 진리(사실) 자체이다. 마귀의  지혜와 권세는 그의 교묘한 거짓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것뿐이다. 그러나 거짓은 잠시 사람들을 속이고 위력을 발휘하는 것 같지만 영구히 그럴 수는 없다. 모든 거짓은 진리 앞에서 결국 맥을 못추고 무너지게 되어 있다. 진리는 모든 거짓과 궤계를 무너뜨리고 이긴다.

죽은 자의 부활은 옛날부터 내려오던 민간 신앙도 아니고 인간의 염원에 의해 거짓으로 만들어진 교리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길을 정하신 하나님으로 나온 것이다. 생명의 주 하나님이 사람의 부활을 정해놓으셨기 때문에 부활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사실이며 진리이다.

부활 후의 세계는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이다. 그것이 어떤 세계일지는 오늘 이 자리에 사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으나 전혀 다른 질서와 다른 형태의 삶이 전개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러 남자와 결혼했다가 죽은 자의 아내가 부활 후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하는 사두개인들의 궤변은 진리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주님이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는 소식을 바리새인들이 들었을 때 그들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다시 모였다. 그들은 주님이 이미 쳐놓은 그들의 올무에 걸리지 않자 한 율법사(서기관)를 보내어 다른 방법으로 주님을 시험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바리새인이요 율법사인 한 사람이 세 번째로 주님을 시험하러 갔다. 그는 율법 선생이므로 주님께 율법에 대해 물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능통하다고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성경 지식으로 시험해 보기를 원했다. 요즘 같으면 신학적으로 또는 교리적으로 주님을 시험하여 책잡으려 한 것이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큰가 하는 이 문제는 그때만 문제가 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이다. 여러분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가? 다시 말해서 성경의 여러 말씀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크고 중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어떤 말씀이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는가? 다 나름대로 대답을 할 수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대답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더욱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답을 내놓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로 여겨질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 모든 율법 곧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다 크고 귀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하나라도 시시하게 생각하거나 소홀히 여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크고 존귀한 분이므로 그의 말씀은 다 크고 중하다. 인생은 작고 시시하기 때문에 거기서 나온 말은 시시하고 무가치한 것이 많다. 그러나 크고 존귀하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다 소중하며 크다.
이런 차원에서 주님이 율법 중 어떤 것을 지적하여 '이것이 가장 크고 중한 계명이다' 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떤 사람들은 '왜 그것만 크냐? 하나님의 말씀은 다 중요하지 않느냐?'고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런 이유로 주님이 '율법 중 어떤 것이 특히 크고 중하다고 말할 수 없다' 라고 하신다면 사람들은 주님이 율법에 통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또 주님이 어느 계명이 율법 중에서 특히 크고 중하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럴 때 주님이 이유를 대면 주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그 이유가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주님을 책잡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렇게 해도 걸리고 저렇게 해도 걸리게 될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주님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과 상관없이 율법 중 경중을 가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깊이 알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그의 뜻을 온전히 통찰하지 못한다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裁斷)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 안에는 분명히 크고 중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율법 안에는 율법의 근본 정신과 직접 관련된 내용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율법의 근본 정신을 담고 있는 계명이 그렇지 않은 계명에 비해 크고 중한 것이다. 이런 원리에 따라 주님은 율법 가운데서 특히 어떤 계명을 지적하여 다른 계명들보다 크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주님은 시험하는 자들을 또 이기셨다. 주님은 결코 그를 시험하는 자들의 올무에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시험에서 기이한 일은 (마가복음 12장을 보면) 주님을 시험하러 온 자 곧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고 질문을 한 그 율법사가 주님의 대답을 듣고서는 깊은 감동을 받아서 주님의 말씀을 인정하며 칭송하였다는 사실이다.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주님은 거짓된 무리들의 시험에 걸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압도적이고 권세 있는 답변을 통해 시험하는 자의 입을 막고 그 마음을 사로잡았다. 주님의 대답을 들은 율법사가 주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했을 때 주님은 그를 보고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주님을 시험한 그 율법사는 나중에 주님을 영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라면 최소한 주님께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주님을 대적하는 전체 바리새인(율법사, 서기관)들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겠지만.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해 보자. 율법사가 말한 율법이란 일반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뜻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성경에 '明文(儀文,letter)으로 나와 있는 율법' 곧 모세 오경에 나오는 명시적인 율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켜야 할 계명과 명령으로서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 율법 중에서 두 구절을 뽑아서 다음과 같이 율법의 핵심을 정리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이 말씀은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을 인용한 것이다. 주님은 이 두 말씀을 연결하여 전체 율법의 정신과 내용을 분명하고 간단하게 설명하셨다. 이것은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밝히신 것이다.

주님이 그렇게 대답하셨으니 정답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누구라도 마음을 열고 단순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실제로 성경이 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율법사가 어째서 그것이 가장 큰 계명이냐고 주님께 반박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양심과 지성이 이미 주님의 대답이 옳다는 것을 그 속에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요 모든 율법 가운데 흐르고 있는 중심 정신이다. 이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다. 그래서 주님을 시험하러 온 서기관도 여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나는 주님이 이렇게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했다. 사실을 아는 지식, 곧 하나님이 내신 길을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 큰 능력이다. 거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주님이 율법의 핵심을 이렇게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결은 주님 안에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밖에 있는 율법을 공부하고 익힌 것이 아니라 율법 자체가 그 생명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 생명 안에 하나님의 말씀(율법)이 충만하고 하나님의 정신이 충만했기 때문에 율법이 무엇인지를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이 모든 율법을 빠짐없이 다 공부하고 다 암기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랬든지 그렇지 않았든지 중요한 것은 주님이 하나님의 마음과 생명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핵심적인 요구 또한 꿰뚫을 수 있었던 것이다.



- 큰 계명과 작은 계명 -

앞에서 우리는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다 소중하고 다 크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는 분명히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라는 점을 생각했다. 우리는 복음서의 내용들을 통해서 주님이 율법의 경중을 가렸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23:23,24)

이것은 율법에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도 있고 더 중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9)

이것은 율법에는 작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다 가치가 있고 중요하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율법 중에서 크고 중한 것이 이것이다 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는가?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은 율법의 경중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절대적인 기준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기준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모든 율법은 근본적으로 다 크고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은 아무 문제가 없다. 주님은 단지 우선 순위를 말씀하신 것이다.

율법 안에는 본질적이고 율법의 본 내용을 이루는 핵심적인 계명이 있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비본질적이고 형식적인 계명도 있다. 전자가 원리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실행적인 것이다. 그리고 원리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영구하며 실행적인 것은 임시적이다. 여기서 경중이 가려지는 것이다.  

율법 안에는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섞여 있고 내용적인 것과 형식적인 것이 섞여 있다. 어떤 율법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담은 본질(내용)적인 것이므로 여러 말씀 가운데서 반복되고 강조되었다. 그러나 어떤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율법들은 원리적인 계명들을 예표하거나 보조하기 위한 부수적인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의미가 퇴색되거나 사라질 수도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계명보다 우위에 설 수는 없다.

하나님의 계명(말씀) 중에서 본질적이고 영구한 성격을 지닌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인격, 하나님의 생명과 영원한 계획(뜻)을 표현한 것들이다. 이런 계명들은 영원한 것이며 다 크고 소중하다. 이런 계명들 간에는 본질적인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런 계명들 안에 크고 작은 것이 없는 까닭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한 것이며 하나님 자신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있어서 생명이다. 그러므로 계명 문제는 본질적으로 생명 문제이다. 인간의 생명은 여러 가지 지체들과 기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어느 것이 크며 소중한가? 다 크고 다 소중하다. 왜냐하면 그 중 어느 하나라도 탈이 나면 생명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기계도 마찬가지이다. 자동차는 보통 2만 내지 3만 가지의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하나만 탈이 나도 자동차는 굴러가지 않으며 어떤 것은 치명적이다. 컴퓨터 본체 같은 하드웨어나 윈도우즈 같은 소프트웨어도 많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어느 하나만 탈이 나도 작동이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계명이 크냐 하는 문제가 어려운 것이다. 생명을 이루는 구성 요소는 다 크고 소중하다. 그런 점에서 주님께서 계명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거나 작게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기관이라면 무엇이라도 다 크고 소중하다.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면 치명적이다.

주님이 크다고 말씀하신 계명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계명과 함께 성경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는 핵심적인 계명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에 포함될 수 있으므로 결국 이 두 가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전부요 핵심이다.

이것을 주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했다. 의(義)와 인(仁)은 사람에 대한 사랑 특히 약자에 대한 사랑을 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신(信)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이 같은 의와 인과 신을 실행하는 것은 십일조나 기도나 금식 같은 형식적인 계명을 실행하는 것에 비해 훨씬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율법에 있어서 본질적이며 내용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信)이 있다면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은 쉬운 일일 것이다. 우리에게 사람을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는 인자한 마음(仁)이 있다면 이웃을 위해 봉사하거나 구제하는 일은 쉬운 일일 것이다. 우리에게 의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선악을 분별하여 옳은 것을 취하고 그른 것을 버리는 일이나 경건의 모양을 내는 일은 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헌금이나 봉사나 기타의 활동보다 의와 인과 신을 실행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 말은 십일조가 아무 것도 아니라거나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의와 인과 신이 그런 것보다 더 중하며 우선이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율법 가운데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두 계명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계명들이기 때문이다.
 


- 유일한 계명인 사랑의 생명 -

알고 보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여러 가지 많은 계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사실 단 하나의 계명을 주셨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생명으로 행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정신으로 행하게 되며 그것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하나님의 생명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다. 사랑은 그러한 하나님이 나타나신 결과요 증거일 뿐 아니라 그러한 하나님을 나타내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이요 수단이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 안에서만 증거되고 표현된다.

그러므로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은 결국 하나님의 생명을 말한 것이다. 주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주님은 제자들이 (주님이 떠나신 후에도) 앞으로 계속 주님 안에 있게 된다면 즉 주님을 사랑하며 그 생명으로 행하게 된다면 그들이 반드시 서로 사랑하는 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그리고 그런 사람 즉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주님을 사랑하는 자 곧 주님을 믿고 그 (생명) 안에서 행하는 자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이 말을 뒤집으면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그의 계명을 지킬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는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곧 사랑이요 그리스도의 생명이 곧 사랑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나의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0,12)

주님이 지킨 하나님의 계명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생명 안에 거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 행하는 그 한 가지를 지켰는데 그것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한 계명이란 곧 하나님의 생명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 곧 하나님의 생명으로 행하는 자는 반드시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 계명을 지키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사람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라는 말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의 생명 안에 거하라는 말인 것이다.

이에 대해 요한은 이렇게 설명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2:7-11)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나의 계명이라는 것은 결국 주님의 생명을 말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요한은 이 계명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 즉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미워하는) 사람은 그리스도(하나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 곧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큰 계명이요 사실상 유일한 계명이다.

주님의 생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생명이다. 어떻게 어디까지 사랑하라는 것이냐 하는 문제의 답도 바로 이 사실 안에 있다. 주님은 하나님을 그리고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어디까지 사랑하셨는가? 그는 아버지께 얼마나 순종하며 어디까지 순종하셨는가? 그는 죽기까지 사랑하셨으며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는 원수도 사랑하셨으며 그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하셨다. 주님은 어리석고 무지한 제자들을 죽는 순간까지 사랑하셨다.
반면에 주님은 죄인들이 그 마음을 높이고 강퍅케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마귀의 도구가 되어 행할 때는 사정없이 물리쳤다. 그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마귀로 보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며 자기를 낮추는 자는 결코 정죄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셨다. 오직 스스로 부유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자들에 대해서만 책망하고 대적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원칙이 있는 사랑이요 일관성이 있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그런 생명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생명대로 행하면 된다. 그리고 오직 이 생명으로만 행해야 한다. 다른 것은 주의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생명 곧 이 아들의 생명이 우리에게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생명 곧 아들의 생명을 하나의 계명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옛 계명이면서 동시에 새 계명이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구약 때부터) 있어온 것이므로 옛 계명이지만 새 언약을 따라서 오신 아들(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낸 것이므로 새 계명이다. 형식으로 말하면 계명이고 내용으로 말하면 아들의 생명 또는 성령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궁극적인 약속(은혜)이 바로 이 생명이다. 우리는 항상 이 생명 안에 거해야 하며 이 생명으로 행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가진 가장 크고 중한 계명이며 사실상 유일한 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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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하나님을 사랑함 (마22:34-40) / 2006. 5. 21 이상봉 2010.04.30 3682
» 가장 큰 계명 (마22:34-40) / 2006. 5. 14 이상봉 2010.04.30 4613
160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앎 (마22:23-33) / 2006. 5. 7 이상봉 2010.04.30 4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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