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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크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전통적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유대인들은 율법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므로 철저하게 다 지켜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종교적 부담이다. 이것은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식이 있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부담이다. 이러한 부담을 가지는 것 자체는 옳은 것이다.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들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육신적인 사람이 율법의 규정들을 빠짐없이 지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유대인들도 그랬다. 그래서 그들은 부득이 율법을 크고 중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우선 순위를 정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613(십계명의 글자 수)개의 계명으로 구분하고 그 중 248개는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할 계명으로, 나머지 365개는 소극적인 금지 계명 곧 하지 말아야 할 계명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중요하여 우선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될 계명을 따로 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에는 자의적이고 합당치 않은 것이 많았다. 그들은 어떤 것을 크고 중한 것으로 판단했을까? 대체로 종교적인 성격을 띤 계명들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와 의식에 대한 계명들과 경건과 성결에 대한 계명들을 중시했다. 주님은 그들의 이러한 판단 곧 유대교 지도자들이 전통적으로 정한 율법의 우선 순위가 합당치 않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신 적이 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15:4-6)

그들은 부모 공경(사랑)보다 제사를 우선적인 자리에 두었다. 유대인들은 생명적인 데다 중점을 두지 않고 종교적인 데다 중점을 두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그것이 겉으로 볼 때 더 그럴듯하며 보기 좋았기 때문이며 그것이 더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즉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였다.  

여기서 율법주의가 나왔다. 율법주의란 법의 정신과 목적보다는 법의 형식과 문자에 더 매이는 것이며 법을 지킴으로써 이루게 될 궁극적인 목적의 달성보다는 법을 지킨다는 사실 자체에 더 의미를 두는 태도를 말한다. 이것은 잘못된 행태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며 그 마음을 따라서 사람을 살리고 섬기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짐으로 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님 당시 유대사회는 이러한 율법주의로 인해 비지성적(맹목적)이며 기계적이고 자기본위적이고 위선적이기까지 한 거짓된 율법 준수를 강요받았다.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율법주의에 매여 수고스럽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는 사람들이 법의 문구에 매이지 않고 법의 정신에 매이기를 원했다. 마태복음 7:1에서 주님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이 말씀은 율법이 말하는 바는 우리 생명 안에 다 있다는 말씀이나 마찬가지이다. 율법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며 사람 속에 있다는 말씀이다.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가? 사람 안에는 생명의 필요가 있다. 배고플 때 밥을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고 잘못했을 때 용서 받았으면 하는 것이 있고 길을 잃었을 때는 누가 찾아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면 그것이 바로 율법인 것이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마음은 이런 마음이다.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그대로 남을 대하는 마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러니 특별할 것도 없고 어려울 것도 없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인지한 사람들은 있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 율법 해석서인 탈무드에 보면 아키바라는 랍비가 "한쪽 다리로 서 있을 동안에 율법 전체를 설명하라는 이방인의 도전에 부정적 황금률 곧 '너에게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것이 율법의 전체이며 그 나머지는 주석에 불과하다고 답하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과 같은 말이다.

주님은 율법이 무엇보다도 율법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또한 그가 사랑하는 자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그는 사람들이 이러한 율법의 최고 목적, 중심 정신에 헌신하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취하고 있던 율법주의는 위장적인 율법 사랑이며 하나님에 대한 위장적인 섬김에 불과하다고 책망하셨다.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유대인들의 미움을 샀으며 율법을 경시하며 신성을 모독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바울도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로부터 동일한 비난과 반대를 받았다. 바울은 율법보다는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인도에만 관심을 가졌으므로 외형적으로 보면 확실히 율법을 경시한다는 비난을 들을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율법보다 더한 하나님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법(갈6:2) 또는 성령의 법(롬8:2)이라고 말한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이었다.  이 생명이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며 하나님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다.

주님과 바울이 배격한 율법주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감스럽게도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도 나타났다. 복음은 새로운 율법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이전까지 율법주의는 교회에서 통용되는 전통과 규례의 영역에서만 영향을 미쳤지만 이제는 교리(진리)의 영역에서도 우세하게 되었다.

율법주의가 끼친 중요한 영향 중 하나는 필수적 도덕과 선택적 도덕의 구별이다. 사람이 해야 할 일 중 어떤 일은 중요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져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간주되고 어떤 일은 사소한 것으로 또는 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어서 지키지 않아도 크게 탓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이러한 구별이 자의적이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섬기는) 것은 형식적인 논리로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섬기는) 것보다 덜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 안에서 보면 그 둘은 하나이며 오히려 전자가 후자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만 실제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정신으로 삶으로써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 까닭에) 사랑하는 것이다. 이외에 달리 하나님을 위할 방법이 없으며 이외에 달리 하나님을 섬길 방법이 없다. 하나님은 오직 그 지으신 사람과 세상 만물 안에서 자기를 나타내시며 거기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서 섬김과 공경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지 못하시며 사람이 서로 미워하면 하나님은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섬김을 받을 길이 없다.

이런 원리에 의하면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약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직접적인 섬김이며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참으로 섬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십계명을 보면 사람이 행해야 할 여러 가지 내용들이 나오지만 그 내용들은 사실상 단 두 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다. 거기서 사람이 해야 할 두 가지 일 중 하나는 선언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일이고 또 하나는 실행적인 일들이다. 선언적이고 상징적인 일은 1, 2, 3, 4계명이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만 섬기고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않는 것과 하나님을 입으로나 행동으로나 인정하고 찬송하는 것이다. 안식일에 대해 말한 4계명은 결국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산다는 신앙고백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역시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선언적인 일을 명한 것이다.

그 뒤에 나오는 모든 계명들은 다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라는 말씀들이다. 안식일에 쉬라는 것도 절반은 이러한 사실을 명한 것이다.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 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5:14,15)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러한 안식을 명한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가정에 있는 약자들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안식케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레위기 19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거룩이 무엇인지를 우리로 알게 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헛것을 위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열납되도록 드리고 ...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責善)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18)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거룩과 경건, 섬김이란 사랑과 의 곧 사람을 사랑하며 공평하게 대하며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형식으로 말하면 성령의 법 또는 생명의 법이고 내용으로 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성령 또는 아들(하나님)의 생명이다. 이것은 우리 밖에 있는 법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법이다. 우리가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리고 사람의 사상이나 마귀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성령님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안에서 느낌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 또한 주님의 말씀과 삶 그리고 신실한 형제들의 가르침과 삶을 봄으로써도 알 수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며 심지어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행동의 대 원칙으로서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사셨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전혀 모호하지 않다. 그리고 복잡하거나 어려운 일도 아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이 우리 안에서 가르치시며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며 나의 생명을 상대방에게 주어서 살리는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 주님 자신이 그렇게 하셨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계신다. 이것을 순종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기쁨과 안식, 평강이 있게 될 것이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고 할 때 우리 안에는 저항에 있게 된다. 거기에는 (몸의) 수고와 희생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고 항상 자신에게 주지시켜야 할 사실은 우리 몸은 이제 우리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 접수되어 그의 필요를 따라 쓰여야 하며 그의 생명 공급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우리를 사신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은 단지 법적 소유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가능성 즉 능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면 우리는 그의 목적대로 쓰인다. 우리 몸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싫어할 뿐 아니라 두려워한다. 안 된다고 스스로 주저앉는다. 그러나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저항의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마귀가 우리를 속이는 것이며 우리를 위협하며 겁주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우리의 가장 큰 계명은 우리 속에서 말씀하시며 역사하시는 이를 따라 가는 것이다. 즉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생명의 인도를 따라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것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나의 감정이나 생각, 기호, 사상이나 철학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행하며 순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즉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얼마나 쉽고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합당하고 즐거운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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