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시험(질문)을 받으신 주님은 그 시험을 물리치신 후 그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셨다. 이 주님의 질문 역시 그들을 시험한 것이다. 흔히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던진 이 질문을 '질문 중의 질문'이라고 일컫는다.

주님이 물으신 것은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주님이 이것을 유대인들에게 물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드러내시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는 누구의 자손인가? 다윗의 자손인가? 아니면 다윗의 자손의 모양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인가? 형식적으로 보면 분명히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자손 요셉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구약)이 그것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씨로 세상에 오신다고 예언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러한 성경의 진술을 따라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만일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어찌하여 다윗이 그의 글에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일컬었느냐고 반문하셨다. 주님은 다윗이 쓴 성경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다윗의 머리요 주(主)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시110:1)

여기서 '내 주'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다윗은 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 곧 자기의 후손으로 장차 세상에 나타날 사람을 가리켜 주(主)라고 했는가? 그것은 그 오실 자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계시 가운데서 본 것은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을 구원하고 다스리게 하기 위해 세상에 왕으로 보내신다는 것이다. 그 오실 왕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름으로 오지만 그것은 다윗의 혈통적 자손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윗의 위(位) 곧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의 지위를 가지고 오는 분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가 다윗의 이름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지금 다윗이 오실 궁극적인 하나님의 아들, 왕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빌려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일뿐 아니라 다윗의 주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시고 그와 함께 살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때 오신 모습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그 백성, 그 택하신 자의 형상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곧 하나님이 그의 아들로 삼고 그의 집으로 삼고 그의 나라로 삼을 자의 표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름으로 즉 다윗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은 그가 다윗을 대표되는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가 되기 위해 그들과 형제의 모양으로 또는 한 혈통으로 자신을 표현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머리와 주가 된다는 것은 육신적 세계 안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영적 세계 안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적 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는 같은 생명은 결국 다 하나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세계 안에서 권세라는 것 즉 크다 작다 하는 것 또는 머리다 몸이다 위다 아래다 하는 것은 오직 그 생명의 분량을 따라 정해진다. 그러나 크게 보면 다 하나다. 본질적으로 생명이 같으면 크고 작음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누가 머리며 누가 꼬리냐 하는 것, 누가 조상이고 누가 자손이냐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다 하나이기 때문이다. 크다 작다 아버지다 아들이다 남자다 여자다 하는 것은 단지 편의상 그렇게 정한 것이고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만물의 질서 안에 있는 것이므로 무시되어서는 안되지만 그것이 생명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고전11:3-12)

여기서 바울은 네 종류의 생명에 대해 말했다. 하나님, 그리스도, 남자, 여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 넷은 유별(有別)하며 차서(次序)가 있다. 그러나 이 네 생명은 다 하나이며 한 생명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 넷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한 생명이다.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왔고 그리스도에게서 남자가 나왔고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다. 그러므로 이 넷은 본질적으로는 하나이며 다만 순서에 있어서 생명의 분량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넷은 실질적으로는 전혀 넷이 아니고 오직 하나이다. 이 시각으로 보면 누가 더 크고 누가 더 작은가 하는 것도 의미가 없고 누가 조상이고 누가 자손이냐 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 그것보다 더 큰 사실은 이 모두가 하나라는 것이다.

밀은 작년에 재배하여 수확한 것을 종자로 하여 금년에 모종을 만들고 새로운 밀을 만든다. 그러므로 작년 밀과 올해 밀 사이에는 부모 자식 관계가 있다. 올해 것이 작년 것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둘 사이에서 차이를 느끼는 사람은 없다. 그 둘은 실제로 다른 것이지만 섞어놓으면 구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따로 놔두어도 그것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본질적으로 하나인 것은 이렇게 실제로 하나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다윗,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그리스도, 하나님과 그 백성 이 둘 사이에는 실질적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백성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시며 그리스도가 그 택하신 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것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히2:11,12)
하나님은 분명히 아버지고 그리스도는 아들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천하 만물을 다 주셨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

꼭 그와 같이 주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하는 일을 할 뿐 아니라 이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12)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 또한 그의 모든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그를 따르는(믿는) 사람들에게 다 주셨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람 안에서 말할 때 남자가 크고 여자가 작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똑 같다. 남자가 어떤 면에서 여자보다 크고 머리의 위치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면에서 볼 때 남자보다 여자가 더 아름답고 더 소중하며 존귀하게 여김을 받도록 지음 받은 것도 사실이다. 결국 하나님이 둘 다 존귀하게 지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크다 누가 더 영광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그들에게 이런 사실을 보는 눈 곧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세계의 특징을 인식하는 눈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형식적이고 표면적이고 육적으로밖에 사물을 보지 못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니 그리스도는 다윗보다 작다고 생각하거나 모세가 그리스도보다 먼저 있었으니 그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형식적인 생각이다. 이보다 더 한 것은 주님이 보잘것없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청년이라는 이유로 인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다 육적인 생각들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는 자요 그것을 다스리는 왕의 예표로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실제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조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표상이요 (그를 믿고 소망하는) 신자였다.


그리스도가 누구냐는 이 질문을 통해 주님은 영적 눈은 어두우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던 무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책망을 하셨다. "너희 조상 다윗은 그리스도인 나를 주라고 부르며 멀리서 대망했는데 너희는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너희를 구원하러 온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렇게 무시하고 배척하느냐? 이러고서도 너희들이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느냐?"

우리는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형제를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이 우리 앞에 한 사람을 세우시고 "이 사람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빛이 있어서 그를 내 밑에 있는 자 내 위에 있는 자라고 말하거나 무엇 무엇을 잘못한 자,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가 내 형제이며 한 운명이고 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79 달란트 비유 (1) (마25:14-30) / 2006. 9. 17 이상봉 2010.04.30 3875
178 주님을 기다리는 자의 자세 (마24:40-25:13) / 2006. 9. 10 이상봉 2010.04.30 3977
177 깨어 주님을 맞이함 (마24:32-51) / 2006. 9. 3 이상봉 2010.04.30 4839
176 마지막 때를 대비함 (3) (마24:23-51) / 2006. 8. 27 이상봉 2010.04.30 3522
175 마지막 때를 대비함 (2) (마24:15-28) / 2006. 8. 20 이상봉 2010.04.30 4803
174 마지막 때를 대비함 (1) (마24:15-28) / 2006. 8. 13 이상봉 2010.04.30 3714
173 마지막 날에 대한 경고 (마24:3-14) / 2006. 8. 6 이상봉 2010.04.30 5143
172 자기 백성을 끝까지 챙기신 하나님 (마23:37-24:2) / 2006. 7. 30 이상봉 2010.04.30 3689
171 예루살렘의 멸망 (23:37-24:2) / 2006. 7. 23 이상봉 2010.04.30 3499
170 외식하는 자들을 향한 책망 (2) (마23:13-36) / 2006. 7. 16 이상봉 2010.04.30 3612
169 외식하는 자들을 향한 책망 (1) (마23:13-36) / 2006. 7. 9 이상봉 2010.04.30 5553
168 외식과 생명 (2) (마23:13-28) / 2006. 7. 2 이상봉 2010.04.30 3552
167 외식과 생명 (1) (마23:13-28) / 2006. 6. 25 이상봉 2010.04.30 4569
166 형제의 자리 (마23:1-12) / 2006. 6.18 이상봉 2010.04.30 3686
165 모세의 자리 그리스도의 자리 (마23:1-7) / 2006. 6. 11 이상봉 2010.04.30 3762
»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마22:41-46) / 2006. 6. 4 이상봉 2010.04.30 4543
163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 (마22:34-40) / 2006. 5. 28 이상봉 2010.04.30 3575
162 하나님을 사랑함 (마22:34-40) / 2006. 5. 21 이상봉 2010.04.30 3682
161 가장 큰 계명 (마22:34-40) / 2006. 5. 14 이상봉 2010.04.30 4613
160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앎 (마22:23-33) / 2006. 5. 7 이상봉 2010.04.30 4032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