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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모세의 자리란 본래 유대인의 회당 안에 놓여 있던 돌 의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의 자리를 상징한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는 주님에 의해 모세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그릇 인도하는 거짓 선생들의 교만한 위치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은 것은 포로기 이후 율법을 알지 못하게 된 유대인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선조들이 율법을 가르치며 지키도록 독려한데서 생겨난 전통이다. 처음에 그들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그런 일을 시작했다. 또 처음에 그들은 남에게 율법을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도 그것을 지키며 추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정신이 퇴색되었고 주님 시대에 와서는 진리와 경건을 추구하는 선생이라는 (모세의 자리의) 실제는 없어지고 오직 선생이라는 이름만 남았으며 그것으로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서기관이란 구약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서기관이라는 말은 곧 선생(랍비)이라는 말과 일치한다. 바리새인이란 서기관과 같은 어떤 직책이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율법 준수와 유대교 옹호에 철저하고 열심 있던 유대의 한 신앙 그룹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로 바리새인 가운데서 서기관이 나왔기 때문에 이 둘은 종종 하나로 엮어서 취급된다.

주님이 지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나 직책을 비난하고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잘못된 신앙관과 신앙 행태를 비난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가식적 신앙이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거짓으로 경건한 척 하는 외식적 신앙이며, 단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의무를 부과하며 정죄하고 심판만 할 뿐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자기를 드려서 섬기려 하지 않는 태도이다.  

주님은 마태복음 11장에서 이미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부과된 율법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사실을 밝히신 바 있다. 율법이 무거운 짐이라는 것은 율법 자체의 요구가 엄중하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자의적으로 율법을 해석하여 만들어낸 각종 규범과 전통 곧 아주 사소한 것에까지 세분화 시켜놓은 여러 규칙들과 예법들이 너무나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런 억지 규정들 때문에 사람들은 율법이 사람의 마땅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지키거나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킨다는 입장이 아니라 율법의 노예가 되어 억지로 끌려 다니는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율법을 이렇게 만든 것은 그들이 율법의 근본 정신 곧 거기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자기의 생각과 주장, 전통을 크게 여기며 끝까지 고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즉 자기 의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들의 말은 행하고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어떤 행위가 문제인가? 바로 율법을 가르치기만 할 뿐 스스로 실행은 하지 않는 것이다. 외식과 거짓 경건,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교만이 바로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본래 모세의 자리는 그런 것이 아니지만 유대인들이 변질시킨 모세의 자리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묶어서 어깨에 지우는 자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자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하는 자리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여기서 무거운 짐이란 종교적 율법적 의무를 의미한다. 주님은 이런 것을 부과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그보다 좋은 것을 주러 오신 분이다. 즉 사람에게 생명과 안식과 자유를 주러 오신 분이다. 율법과 종교의 의무보다 좋은 주님 자신의 생명 곧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로 오신 분이다.

누구나 다 그럴듯한 말을 하고 그럴듯한 행동을 하지만 그것으로 그 실제가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선한 말을 하고 선한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거기서 나오는 것은 결국 자기 의요 육체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람을 살리는 영과 생명이 나왔다.  


"그 차는 경문(經文)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여기서 경문이란 경건한 유대인들이 율법서에서 취한 네 개(출13:2-10, 13:11-16, 신6:4-9, 11:13-21)의 성경 구절을 적어놓은 (양피지를 담고 있는) 상자이다. 이것은 왼팔 안쪽이나 이마에 끈으로 묶어 다녔다. 처음에 이것은 율법을 기억하고 그대로 살려는 목적으로 차고 다닌 것이지만 차츰 사람들에게 경건을 과시할 목적으로 차고 다니게 되었다. 심지어는 이것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고 부적처럼 차고 다니기도 했다.

또 여기서 말하는 옷술이란 겉옷의 네 귀퉁이에 단 술(장식)이다. 이것은 청색실로 짠 것인데 여기 청색은 하늘색이므로 하나님과 그 언약의 영원성 및 순결성을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단다는 것은 믿음이 있다는 표시를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비싼 외제차를 타거나 고급 아파트, 고급 옷을 입는 것으로 자기를 나타내고 높이지만 종교 세계에서는 이런 경건의 표시들을 착용함으로써 자기를 나타내며 높이는 것이다.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이렇게 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을 나타낸다. 사람이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칭찬과 섬김을 받고 싶어하는 것 자체는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 않는 가운데서 억지로 그것을 취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자연스럽게 영광을 취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게 영광이 있고 그래서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고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영광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데 억지로 영광을 취하려 한다는 것은 현재 내게 영광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사람들이 나를 영광스럽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정상적이라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본래의 영광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억지로 영광을 취하려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영광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영광은 항상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영광스럽다고 하는 것은 내 안에 이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선생으로 인도자로 여김을 받으며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인사와 문안을 받는다면 그는 왜 그렇게 대접을 받겠는가? 그 사람 안에 진리가 있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칠 것이 있고 또한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접을 받고 인사를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안에 영광의 실제가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내가 영광스러운 사람이면 나는 저절로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진리가 있고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만한 좋은 것이 내 안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히 인사를 받고 자연히 소중하게 여김 받을 것인데 왜 억지로 그것을 얻으려 하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만일 내가 키가 큰 사람이면 다른 사람을 내 밑으로 숙이거나 엎드리게 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큰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내가 크다는 말을 억지로 들으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다른 사람으로부터 항상 당신은 큽니다 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크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크지 않기 때문에 크다는 말을 억지로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본질적으로 크고 존귀한 존재이다. 이 생명에 충실하기만 하다면 누구든지 실제로 영광스러울 것이며 서로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여기며 대접할 것이다. 억지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럽기 때문에 자연히 영광스럽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하늘의 영광과 권세로 이미 높은 자이면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지 않아도 높으며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도 높으며 나를 낮추어사람들의 종이 되어도 높은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므로 누구하고 다투거나 경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억지로 취할 일도 아니고 애쓸 일도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높은 사람은 절대 억지로 자기를 높일 필요가 없다. 반대로 그 생명이 본질적으로 영광스러운 생명이 아니라면 억지로 높여도 높아지지 않는다.

내가 돈이 많아서 정말로 부자이면 사람들이 나를 부자라고 불러주고 부자로 여겨주기를 바랄 필요가 없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 얼굴에 기름이 흘러서 나는 부자다 라는 글자가 새겨지는데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아달라고 애를 쓰겠는가? 영적 부, 영적 권세도 그와 같다. 그러므로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선생이라고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 못하며 하늘의 부와 여유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주님이 사람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이 마치 외식하는 선생들의 말(가르침)은 받아들이고 행위만 거절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아예 그런 사람들의 말도 듣지 말고 그들을 따르지 말라고 명하신 것이다. 그들이 비록 율법을 가르친다고 하나 그 가르침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들 곧 그 인격과 마음이 잘못된 사람들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가르침) 자체도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은 율법의 근본 정신에서 벗어난 것이 많고, 본질적인 것보다는 헛되고 지엽적인 것들을 다루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의 가르침을 누룩이라고 표현하시며 경계하셨다.(마16:5-12, 눅12:1) 누룩이란 퍼지기 쉬운 것이며 그것을 접하는 많은 사람들을 변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과 상종하며 그들의 말을 듣다가는 그들과 같은 외식적인 자리에 빠지기 십상이다.  

오늘날 외식하는 종교인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때로 (진리에 합당한 경우에) 그들의 말은 들을 수 있지만 그들의 생명 없음과 외식으로 인해 그들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실제가 없으면서 이론만 말하는 자들의 가르침은 다 죽은 것이요 생명의 손상을 가져오는 해로운 것이다.  

신약시대의 특징은 생명과 인격과 말과 삶이 다 하나라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그에게 또한 하나님 아들의 거룩한 인격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그에게 거룩한 인격이 있으면 그의 말이 진실하고 거룩하기 마련이다. 또 인격이 바르고 말이 진실하면 그의 삶 곧 행위도 바르고 진실하기 마련이다. 구약에는 참 하나님의 선지자 뿐 아니라 인격이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거짓 선지자도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있었다. 곧 모세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 발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있었고 심지어 당나귀도 그것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은 다르다. 말과 사람(인격)은 같으며, 거짓된 자에게서 참된 것이 나오지 않고 외식하는 자에게서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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