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형제의 자리 (마23:1-12) / 2006. 6.18

2010.04.30 16:02

이상봉 조회 수:3686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우리는 지난 주에 모세의 자리와 그리스도의 자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모세의 자리가 무엇이고 그리스도의 자리가 무엇인가?

사람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그것을 행하도록 지시하는 것이 모세의 자리라면, 자신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세계를 명백히 보도록 빛을 비추는 것이 그리스도의 자리이다. 그리스도의 자리는 사람에게 덮어놓고 무엇을 하라고 하는 자리가 아니라 좋은 것을 보여줌으로써 사람이 그리로 오도록 하는 자리이다.

또한 모세의 자리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실행하는가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자리라면 그리스도의 자리는 사람에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뿐 아니라 사람으로 그것을 능히 행할 수 있도록 생명을 주는 자리이다. 왜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느냐, 왜 그렇게 사느냐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능히 섬기며 그 뜻대로 행할 수 있도록 사람을 살리며 사랑하며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자리이다.  

또한 모세의 자리가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기는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는 자리라면 그리스도의 자리는 사람들의 연약함과 죄를 자기가 대신 짊어짐으로써 사람을 안식케 하는 자리이다. 주님은 죄를 싫어하셨지만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용납하셨다. 그것은 죄인의 짊을 대신 짊어지신 것이다.
주님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이므로 창기와 세리의 더러운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는 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그들의 친구가 되셨다. 그는 간음과 부정과 더러운 이익과 기타의 죄들을 용서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없애러 오신 분이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귀의 거짓말에게 속아 죄에 빠진 자들을 하늘의 사랑과 진리와 영광으로 사로잡으며 그들 안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에게 다가가셨던 것이다. 주님은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그들의 죄짐을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죄는 가르침과 판단과 정죄를 통해서 처리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거룩한 생명의 공급을 통해서만 처리된다. 그리스도가 모세의 자리에 앉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달랐던 것은 그가 죄인을 가르치고 정죄하고 심판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그리스도의 자리보다는 모세의 자리에 앉기 쉽다. 첫째는 모세의 자리에서 행하는 것이 더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모세의 자리에서 행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남을 가르치고 선과 의와 복음 진리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마치 의인이거나 복음 진리 안에 온전히 서 있는 자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이것은 결국 남을 가르치는 형식을 통해 자기 의를 도모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자기보다 의롭고 더 진리적인 사람을 대할 때는 (그에게 배우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약점이나 허물을 잡아서 시기하고 헐뜯으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대할 때는 가르치고 판단하고 정죄함으로써 그들의 선생이 되기를 좋아한다.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행하기보다 모세의 자리에 앉기가 쉬운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더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가르치며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보다 그들의 짐을 지고 함께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런 일이 희생과 수고가 따르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유혹과 난관을 극복하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모세의 이름을 사칭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제자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의 자리에서 행해야 하며 그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면 오늘날 목사나 장로들을 비롯한 수많은 기독교의 선생들은 예수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지만 그들이 모세와 닮지 않았던 것러럼 주님의 자리에 앉은 오늘날의 많은 지도자들도 주님과 닮지 않았다. 모세의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이 아니었던 것처럼 주님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도 처음에는 분명히 주님을 사랑하거나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 그 자리에 앉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게서는 멀어지고 눈에 보이는 가르침과 일(사업)에 주의하다보니 그리스도와 그의 생명은 잃고 그 대신 교회라는 조직과 사업(일)을 얻는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바 생명의 역사에는 주의하지 않고 오직 눈에 보이는 바 사람과 일에만 주의했기 때문에 그들이 이룬 많은 일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기여하지 못하는 죽은 일들이 되고 말았다. 교회는 세워졌으나 주님의 궁극적인 목적인 그리스도의 몸, 곧 하나님의 생명을 담은 영광스러운 교회는 건축되지 못하게 되었다.

누구든지 주님의 생명의(살리는) 길로 가지 않으면 사람을 살릴 수 없다. 아무리 종교적인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더라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낮추어 친히 사람의 자리로 내려오셨다. 그는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죄인의 몸을 입으셨고 죄인의 친구가 되셨고 그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로 가셨다. 누구든지 이 자리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앉았던 모세의 자리는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의 중심에 놓인 자리였다. 그 자리는 세상 영광과 명예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런 것을 상징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모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자기를 희생하며 이스라엘을 이끌며 섬긴 사람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은 모세를 거역한 고라 일당처럼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를 스스로 높여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우리는 오늘날 이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늘날 목사나 장로나 기타의 자리들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명예직이나 권세를 부리는 자리 또는 세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그와 함께 기독교 자체도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종교 조직이 되고 기독교의 일(사업) 세상(종교 분야)에 속한 또 하나의 세상 일이 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교회가 세상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탄은 매우 집요하고 교활한 자이므로 끊임없이 교회를 속이며 올무를 놓는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처한 이런 상황을 개탄하며 주의 진리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한다. 그들은 진리를 가르치며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싸운다. 오늘날 교회는 각종 이단과 세속주의, 현대주의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으므로 그런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이런 사람들을 시험한다. 어떻게 시험하는가? 그들로 독선에 빠지게 하고 스스로를 높이도록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무지한 가운데 있는데 유독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빠져 경건치 못한 길에서 헤매고 있을 때 유독 경건한 사람이라면 주님과의 교통에 더욱 힘써야 하며 자기를 십자가 앞으로 가져가서 처리 받는 일에 더욱 힘을 써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과 생명의 교제를 온전히 가지지 못한 채로 개혁을 부르짖으며 선을 외치게 되면 그런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독선적이고 외식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실제로 많은 개혁자들과 선구자들이 그렇게 되었다. 바리새인들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생명의 법은 사람을 자연스럽게 변화시키며 주님께 복종케 만들지만 지식과 교리(율법)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보다 교만과 위선을 가져다주기가 더 쉽다. 지식은 쉽게 풍부해지지만 사람의 인격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에 미치지 못하는 (행위의) 부분을 지식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하기 쉽다. 바로 여기서 외식이 나온다. 생명 없는 지식은 교만 아니면 외식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의 자리에서 나와야 한다. 남을 가르치고 변화시키려는 것보다 먼저 자신을 가르치고 변화시키려고 해야 하며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먼저 내가 주님의 생명으로 채워지고 부요케 되기를 원해야 한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얼마 동안 다른 사람에 대한 신경을 끄고 그리고 하던 일들도 내려놓고 자신의 영혼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오류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유대교든 기독교든 다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것이지만 무언가 다른 데 홀려서 하나님(주님) 자신을 놓쳤기 때문에 처음에 잘 시작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말았다. 요한계시록 2:5에서 주님이 에베소교회를 향해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책망하셨을 때 그 '처음 사랑'이란 모든 사랑 중에 첫째 사랑 곧 주님의 일이나 가르침을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이것을 잃으면 그 자리에는 외식하는 종교인과 종교사업 밖에 남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를 구체적으로 어떤 자리로 이끄시는가? 다음 말씀이 그 답이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주님은 우리를 형제의 자리로 이끄신다. 구약 시대에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른 사람 위에 특별히 높여질 수 있는 특출한 영웅이나 위대한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중보자가 될 존재도 필요없다. 왜냐하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친히 사람 안에 들어오셔서 사람을 가르치고 이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각각 받은 은사대로 형제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면 되지 그 이상의 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교회 안에는 궁극적 의미에서 선생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다. 물론 교회 안에는 직분이 있다. 사도도 있고 선지자도 있고 목자도 있고 교사도 있다. 그러나 사도든 선지자이든 감독이든 장로든 다 한 가지씩 역할을 맡아서 주님을 섬기고 있을 따름이다. 내가 어떤 일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수종드는 것이다. 수술하는 의사 옆에는 간호사나 조수가 의사가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의사를 돕고 있을 따름이지 수술을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영화나 연극에서 각각의 배우들이 이런 저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그런 인물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작가나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 순종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우리 모두는 주님께로부터 지시 받은 어떤 일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받은 은혜와 은사를 따라 일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서 존재 자체로서 다른 사람의 아버지거나 선생이나 지도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 자신의 자격으로 다른 사람 위에 권세자로 군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인도 아래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일시적으로 부모 노릇도 하고 선생 노릇도 하고 인도자 노릇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 형제일 따름이다. 이것을 모르고 자기가 무엇이나 된 줄로 생각하여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오늘날 개신교에는 牧師가 있고 로마천주교에는 神父가 있으며 많은 기독교 단체들 안에는 leader가 있다. 이런 이름은 공교롭게도 주님께서 칭하지 말라고 경계하신 '랍비(師)', '아비(父)', '지도자' 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외식으로라도 이런 이름을 피할 법 한데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은 결코 우연히 되어진 일이 아니며 하루 아침에 되어진 일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조금씩 지속적으로 타락하여 마침내 주님의 생명에서 거의 떠나게 된 결과로 나타나게 된 현상이다. 특히 천주교는 사람으로 선생이나 아비나 중보자를 삼지 말라고 한 주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려 완전히 사람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세워놓았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한 자리에 앉아 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성령님을 몰아내고 대신 자기들이 앉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형제로 지으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관계는 기본이 형제이다. 세상에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선생과 제자의 관계, 목자(인도자)와 양(따르는 자)의 관계 등 여러 관계가 있지만 이 모든 관계의 기본은 형제 관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모든 사람의 진정한 아버지고 남편이고 선생이고 목자이기 때문이다.

형제의 기본 입장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과 긍휼히 여김과 용납이다. 형제라는 자리는 가르치고 심판하는 자리가 아니고 공감하고 공유하고 공조하며 공생하는 자리이다. 형제는 모든 면에서 수평의 관계를 가지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

바울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자리는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는 자리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한 형제로, 하나로, 한 몸으로 지으셨기(부르셨기) 때문이다. 각 사람이 자기를 낮추어 형제와 자리를 같이하고 마음을 같이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한 몸으로 엮으셨으며 엮어가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르심 받은 자리는 형제의 자리이며 이것은 하나를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하는 자리이며 항상 수평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자리이다. 누가 누구 위에 있고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섬겨서 다 하나가 되도록 하는 자리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바울은 에베소서 5장과 골로새서 3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19-21)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12-23)

여기서 우리는 특히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에 주의해야 한다. 피차 복종하는 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자녀가 부모에게 복종하고 권세 아래 있는 자가 권세자에게 복종하는 것 이상의 일이다. 일방적인 복종이 아니라 피차 즉 쌍방이 서로에게 복종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항상 머리이기만 하고 남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언제나 남에게 복종만 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머리가 되지 않을 사람도 없다. 모든 사람은 최소한 하나님 밑에 있고 최소한 만물 위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편으로는 위임 권세자로서 권세를 행사해야 할 자이며 다른 한편으로 인간 권세에 복종함으로써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배워야 할 자이다. 이것이 우리의 지위이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 복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선생 노릇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이것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의 권세는 위임 권세자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위에 누가 있는지를 보고 그 권세에 복종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각각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여러 가지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여러 가지 위치에 설 수 있다. 예컨대 자녀의 경우를 보자. 우리가 자녀라면 우리는 자녀로서 부모에게 복종한다. 이것이 자녀로서 우리의 기본 위치이다. 그러나 복종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엄마가 외롭고 답답할 때 아들이나 딸이 그와 자리를 함께 하며 대화하고 공감하고 격려하는 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복종하는 자리가 아니라 친구의 자리 또는 형제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때로는 부모가 어리석고 잘못된 말을 하거나 그런 일을 도모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와 성실함을 따라 부모를 정중하게 가르치며 선도하기도 해야 한다. 완전히 머리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으로는 순종하고 공경하지만 내용적으로 일시적으로나마 하나님을 대신하여 가르치고 인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거꾸로 부모의 입장에서 본다면 머리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순종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적 위치와는 거꾸로 된 것이지만 잘못된 자리는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그렇게 피차 섬기며 사랑하며 복종하도록 세우셨기 때문이다.

피차 복종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일방적으로 군림하거나 복종하는 것이 아니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안별로 가르치거나 복종한다는 것이다. 이 관계는 언제나 바뀔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존중히 여겨야 하며 두려워해야 하며 또한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한다.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될 것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79 달란트 비유 (1) (마25:14-30) / 2006. 9. 17 이상봉 2010.04.30 3875
178 주님을 기다리는 자의 자세 (마24:40-25:13) / 2006. 9. 10 이상봉 2010.04.30 3977
177 깨어 주님을 맞이함 (마24:32-51) / 2006. 9. 3 이상봉 2010.04.30 4839
176 마지막 때를 대비함 (3) (마24:23-51) / 2006. 8. 27 이상봉 2010.04.30 3522
175 마지막 때를 대비함 (2) (마24:15-28) / 2006. 8. 20 이상봉 2010.04.30 4803
174 마지막 때를 대비함 (1) (마24:15-28) / 2006. 8. 13 이상봉 2010.04.30 3714
173 마지막 날에 대한 경고 (마24:3-14) / 2006. 8. 6 이상봉 2010.04.30 5143
172 자기 백성을 끝까지 챙기신 하나님 (마23:37-24:2) / 2006. 7. 30 이상봉 2010.04.30 3689
171 예루살렘의 멸망 (23:37-24:2) / 2006. 7. 23 이상봉 2010.04.30 3499
170 외식하는 자들을 향한 책망 (2) (마23:13-36) / 2006. 7. 16 이상봉 2010.04.30 3612
169 외식하는 자들을 향한 책망 (1) (마23:13-36) / 2006. 7. 9 이상봉 2010.04.30 5553
168 외식과 생명 (2) (마23:13-28) / 2006. 7. 2 이상봉 2010.04.30 3552
167 외식과 생명 (1) (마23:13-28) / 2006. 6. 25 이상봉 2010.04.30 4569
» 형제의 자리 (마23:1-12) / 2006. 6.18 이상봉 2010.04.30 3686
165 모세의 자리 그리스도의 자리 (마23:1-7) / 2006. 6. 11 이상봉 2010.04.30 3762
164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마22:41-46) / 2006. 6. 4 이상봉 2010.04.30 4543
163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 (마22:34-40) / 2006. 5. 28 이상봉 2010.04.30 3575
162 하나님을 사랑함 (마22:34-40) / 2006. 5. 21 이상봉 2010.04.30 3682
161 가장 큰 계명 (마22:34-40) / 2006. 5. 14 이상봉 2010.04.30 4613
160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앎 (마22:23-33) / 2006. 5. 7 이상봉 2010.04.30 4032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