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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외식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이고 하나는 그것이 원하는 대로 잘 안된다는 것이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것은 영광스럽게 되고 싶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욕망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요 영광스러운 자이기 때문에 이런 욕망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타락하여 지금은 영광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잘 보이고 싶지만 잘나지 않았다고나 할까, 어쨌든 지금 사람에게는 영광이 없다는 것이다. 타락하여 하나님의 곁을 떠난 지금의 인간은 죄의 종이요 정욕의 종이요 마귀의 망상과 거짓말을 제것으로 받아들여 헛된 길에서 방황하는. 전혀 영광스럽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외식을 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 즉 영광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만일 사람이 실제로 영광스럽다면 영광스럽게 되고 싶다는 욕망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영광스러운 사람은 자연히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고 칭찬과 존경을 받으며 잘 보이게 될 것이다. 영광스러운 자를 누가 영광스럽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날마다 술 취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폭언이나 하고 추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누가 존경하고 좋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바로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왜 나를 존경하지 않느냐?' '왜 내게 인사를 하지 않느냐?' 하면서 윽박지른다면 그것이 바로 억지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주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비롯한 모든 인간의 모습이다.

물론 억지로 영광을 추구한다는 것이 문자 그대로 상대방에게 존귀와 영광을 강요한다는 뜻은 아니다. 억지로 영광을 추구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렇지 않으면서 그런 것처럼 가장하여 교묘하게 거짓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어쨌든 인생에게는 영광이 없다. 그러면서도 영광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여기서 외식의 필요가 생기고 외식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23:8-10)

아버지가 되고 싶고 선생과 지도자가 되고 싶으면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아버지와 선생과 지도자로 대접을 받고 싶다면 먼저 그렇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그렇다 하며 올라가 있는 현재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기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서 선생의 생명을 받고 아버지의 생명을 받고 지도자의 생명을 받아서 진짜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 선생 되고 아버지 되고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권세를 받아서 진짜로 선생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버지와 선생, 지도자의 권세는 아버지와 선생과 지도자의 생명(마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먼저 외형과 지위를 가지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생명과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만물의 참 아버지요 선생이요 지도자인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그의 아들이 되고 그의 학생이 되고 그의 인도를 받는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아버지와 선생과 지도자의 생명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고 거기서 아버지와 선생과 지도자의 영광과 권세가 나오게 될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말로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아버지와 선생과 주와 지도자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입으로나 생각으로는 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내 생각과 내 계획, 내기 주장과 내 의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권세에 굴복하고 있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의 권세에 굴복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낳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의 터전이고 거기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는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격려를 받기를 원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거나 호소를 하거나 붙들고 씨름을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랑하고 호소하고 씨름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존중한다면 우리는 삶 속에서 항상 실제로 그분과 함께해야 한다.

선생은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자이다. 누가 궁극적인 선생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나 자신이 내 인생의 선생과 인도자가 아니고 주님이 그러하다. 밖에 어떤 사람들이 나의 궁극적인 선생과 인도자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그러하다.

지도자나 주(主)는 나를 가르치고 인도할 뿐 아니라 나를 주장하는 자이다. 인생의 참된 지도자와 주는 그리스도이다. 그분만이 인생을 아시고 인생의 길을 아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사람을 이끌 사랑(마음)과 능력과 권세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고 노예이고 그를 따라야 할 자이다. 지도자와 따르는 자의 입장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주인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짓는 자이고 종은 다만 그것을 따르는 자이다. 종은 생각하는 자가 아니고 따르고 순종하는 자이다. 종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생각, 해야 할 판단은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가 우리에게 뭐라고 말하며 어디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 이런 사람은 처음에는 종 같지만 나중에는 다른 사람을 이끄는 권세 있는 인도자가 된다. 하나님을 알고 그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처럼 사람을 사랑하며 가르치며 인도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외식이라는 것은 알고 보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주까지는 외식이란 주로 종교인들이나 도덕 윤리를 따지는 사람들이 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오늘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외식한다고 하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 안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아는 지식이 있고 그것이 그의 양심이 되어 그를 찌르고 있다는 말이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32)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2:1-3)

바울의 이 말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두가 바울이 말하는 대로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욕망대로 하는 것을 옳다고 하며 옹호하며 육신의 욕망대로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부정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도 결국은 육신의 욕망대로 한다. 옳다고 하며 하는 사람은 그러한 행위를 서로 인정함으로써 마음 편하게 육신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고, 옳지 않다고 하면서도 육신대로 사는 사람은 외식과 위선으로 자기 행위를 덮으면서 육신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참으로 '사람이란 아무리 발버둥쳐도 하나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전자나 후자나 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말씀과 생명의 반응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런 힘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얼른 생각하면 후자(後者)만 외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자(육신의 욕망대로 사는 것이 옳다고 강변하며 서로 인정하는 사람들)도 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자기 양심이 지지하지 않는 일을 옹호하며 서로 옳다고 인정하는 일을 하는가? "그래 인간이란 어차피 동물인데 그렇게 살 수밖에 없지 뭐" 하면서 억지로 자신을 위로하고 또 그런 심정으로 타인의 잘못된(보기 싫은) 행동들을 인정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분명한 사실은 어떤 사람도 예컨대 여자를 지나치게 밝히거나 술에 찌들거나 작은 이익을 위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다투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런 것을 옳다 하며 덮어주고 인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 자기 양심의 음성을 덮고 무마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도 외식이다.

만일 사람 속에 육적인 삶이 합당하지 않으며 사형에 해당한다는 지식이 없다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육적인 행위와 죄에 대해 전혀 부담을 가지거나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원색적으로 그런 일을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죄(마귀)의 종이 되어 그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외식이 필요한 것이다.

이 외식은 강도(强度)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진리에 대한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적고 생명의 부담이 적은 사람은 자기 양심의 소리를 덮기 위해 육신의 정욕을 합리화하는 일을 하고 그 바탕 위에서 공개적으로 육신적으로 산다. 그리고 지식이 많은 사람은 외식하며 (공개적이 아니고) 비밀리에 육신적으로 산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 육신의 욕망대로 사느냐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느냐 하는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전쟁은 한편으로 얼마나 생명의 말씀으로 육신의 욕망을 무마하느냐 하는 전쟁이며 다른 한편으로 얼마나 인간의 이론과 사상으로 영의 욕망을 무마하느냐 하는 전쟁이다.

우리는 지난 주에 사람들이 외식하게 되는 과정을 살피면서 사람을 속이는 마귀의 교묘한 거짓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 중 첫 번째로 생각한 것이 사람을 육신과 영으로 분리하는 것이다. 오늘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육신에 대한 극단적이고 지나친 관념들은 마귀의 속임수에서 온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돈에 대해 생각할 때, 돈은 무조건 더럽고 불경한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므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돈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은 그것이 사람의 쾌락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과 경쟁하기 때문이다. 많은 재물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방해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유익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이다. 이 점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나 물질 그 자체는 하나님이 사람의 필요를 위해 쓰도록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 합당하게 그것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정욕주의가 우리의 길이 아닌 것처럼 금욕주의 역시 우리의 길이 아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린도후서 12:15)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누가복음 16:9)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한일서 3:17)

이 말씀들은 재물이 자기 육신의 욕망을 채울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살릴 도구,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도구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재물(물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구이다. 이것은 열심히 일해서 충당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 쓸 것을 쓰고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의 쓸 것도 채우도록 해야 한다.

옛날에는 청빈(淸貧)이라는 것이 많이 강조되었다. 그것은 사람이 깨끗하게 살면 즉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면 재물을 많이 모으기가 어렵고 가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남보다 열심히 일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남다른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재물을 모을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은사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쓸 것을 마련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부자가 되기를 힘쓰거나 그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을 비난하거나 경원시(輕遠視)해서는 안된다. 성실한 부자들조차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다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태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재물이란 단지 생활의 도구일 뿐이다. 그것은 자기를 자랑하거나 육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우리는 돈과 쾌락과 정욕에 매여 종노릇을 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가진 것으로 사람을 살리고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재물뿐 아니라 권력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권력에 대해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정치가나 어떤 큰 일을 맡은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며 작은 잘못도 확대해서 비난하고 씹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그 일들은 누군가 맡아서 해야 할 일들이며 그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권력자들에게는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궂은 일이 있다. 그것을 맡아서 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은 그가 봉사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도울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비난부터 하는 세상 사람들의 태도를 본 받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이며 통치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왕과 제사장과 선생으로 즉 사람들을 가르치고 다스리는 자로 세움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어떤 권세나 명예나 자리에 대해서 세상적인 시각을 가지고 부정하거나 비난해서는 안되며 동시에 그것들을 (그런 부정적인 말이 나오게끔) 잘못 사용해서도 안된다.

성에 대한 관념 또한 마찬가지이다. 즉 성은 더러운 것이라는 생각도 외식과 위선을 가져오는 잘못된 생각이다. 또한 오락과 취미는 다 좋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주님 외에 무슨 다른 것에서 기쁨을 추구하느냐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아무 취미나 오락도 없고 오직 기도만 하고 경건 생활에만 몰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훌륭한 생각이지만 이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마귀의 교묘한 술책에 이용당하여 더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말했다.(딤전 4:3)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사람은 결국 견딜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정욕으로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 것이다.(고전7:2,9)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화나 금욕이나 외식이 아닌 참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즉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아들(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게 되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게 된다. 이것이 외식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만물을 회복시키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것들을 다스리는 자이다. 그러므로 무엇에든지 매여서는 안된다. 무엇이든지 그릇되게 쓰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을 그것의 정상적인 용도를 알고 거기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한다.  

칼 든 강도에게 당한 사람이나 자기가 강도짓을 하다가 감옥에 가서 고생을 한 사람은 칼만 보면 겁을 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사나 요리사는 칼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칼이 그들에게 선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재물이나 권력이나 여러 가지 육신이 좋아하는 것들이 오직 부정적인 것으로만 자리잡는다면 우리는 결국 외식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삶에서 필요한 것이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활용해야 할 부분도 있는데 무조건 그런 것들을 부정적인 것으로 몰아 붙이면 사탄의 올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을 성령 안에서 보고 다룰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며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지난 주에 이미 언급한 사실이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형제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외식을 방지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판단하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실수나 허물이 없는 자처럼 행동하려는 부담을 갖게 된다. 완벽한 사람은 없고 실수와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이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종종 완벽을 요구한다. 말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태도를 통해서 그렇게 한다. 바로 판단과 정죄를 통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딤전5:22)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 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롬14:1-5)

바울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것은 형제들의 모든 행위가 다 옳고 다 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할 다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약한 형제들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고 체험도 하고 발전도 하도록 기회를 주라는 것이다. 즉 약한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라는 것이다. 내가 키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키우시는 것이다. 또 그가 스스로 크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키우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불러서 키우는데 왜 우리가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하겠는가? 우리가 불렀고 우리가 키우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나도 죄인이고 그도 죄인일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죄인을 부르신 것이요 약하고 허물 많고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 자들을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다 알고 불렀다. 그리고 조용히 일하시며 기다리신다. 그런데 왜 우리가 자꾸 사람을 조르는가?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그를 여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분위기 안에 들어가면 사람은 자연히 숨을 죽이게 되며 외식하게 된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하는 곳이다. 교회는 사람이 살도록 된 주어진 곳이다. 물론 죄인이 육신의 정욕대로 편히 살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이다. 그러나 어쨌든 교회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죄인이 들어와서 생명의 안식을 추구하고자 하는데도 그것이 안되고 숨을 쉴 수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흉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교회를 나왔다는 것은 그 흉악한 모습대로 살려고 나온 것이 아니요 그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받아야 하며 금방 좋은 모양이 안 나오더라도 그를 참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사람으로 안식과 평안의 상태에서 무언가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진리로 가르침을 받고 거룩한 세계를 누리게 되는 것은 안식의 자리에서만 가능하다. 때리고 쫓고 미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며 누리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쫓기고 정죄 당하는 가운데서 할 수 없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안식 속에서 좋은 것을 먹고 마심으로써 변한다. 좋은 것을 보고 감동을 받으며 그것을 사모하게 될 때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교회의 권능은 율법이 아니라 생명이다. 교회의 실제적인 길과 방향은 어떤 교리와 어떤 가르침을 베푸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분위기가 조성되느냐 하는 것이 결정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하며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이 교회의 길과 방향을 결정한다. 즉 형제들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력 있는 권세가 된다. 어떤 사람이 말을 거칠게 할 때 그것을 교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회 안의 전체 분위기를 거친 말을 하면 부끄럽고 어색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분위기로 만드는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다수가 세상적인 말이나 저급한 말을 하지 않고 고상하고 덕을 세우는 말만 한다면 자연히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빛을 보고 그리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지식으로 서로 가르치려고만 하고 서로 판단하고 정죄만 한다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위선자가 되고 말 것이다.

느리고 안 되는 사람은 그대로 기다리면 된다. 외식하는 것보다는 부끄러운 가운데서 스스로 자책을 받는 상태에 있는 것이 낫다. 형제들은 아무도 뭐라 하지 않지만 (아니 오히려 격려하고 사랑해주지만) 자기 속에서 스스로 부끄럽고 갈등이 생겨서 마침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일이 전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판단하는 세계 안에서는 교통도 없고 진보도 없다. 다 숨기 바쁘고 위선하기 바쁘다. 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상대의 약점을 찾고 자기를 변명하기 바쁘다. 그러나 사랑해주고 용납해주는 세계 안에는 거짓으로 자기를 꾸미거나 방어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세계 안에서는 스스로 높은 체 하거나, 잘하는 체 하거나 실수나 허물이 없는 체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높고 완벽하고 잘하는 사람이 가장 낮고 허술하고 잘못하는 사람을 위해 주고 섬기는 세계이다. 속에 하나님의 빛이 비취고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이 흘러 들어가서 역사하면 사람은 자신의 죄를 저절로 깨달으며 자신의 허물과 무능을 저절로 자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처럼 연약한 형제들을 사랑으로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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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가장 큰 계명 (마22:34-40) / 2006. 5. 14 이상봉 2010.04.30 4613
160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앎 (마22:23-33) / 2006. 5. 7 이상봉 2010.04.30 4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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