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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화}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진정한 정신과 핵심은 버리고 지엽적이고 부수적인 것만 붙들며 그것을 율법의 전부인 것처럼 가르친 데서 오는 것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하나님의 핵심적 요구인 의와 인과 신은 버리고 하찮은 헌신으로 그것을 때우는 이러한 일이야말로 죽은 일이며 외식의 대표라 할 것이다.

내용 없는 형식은 곧 죽은 형식이 되고 만다. 십일조를 내는 일은 義와 仁과 信을 붙드는데서 나오는 하나의 실천적 산물이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는 것보다 더 큰 것이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요구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것(信)과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형제(이웃)를 사랑하는 것(仁)과 하나님의 거룩과 신실함을 나타내는 일(義)이었다. 그 바탕 위에서 모든 일을 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박하와 향과 채소의 십일조만 낼 뿐 아니라 전체 소득의 온전한 십일조를 내기 원하셨고 또 십일조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돈 아니 그들의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치기를 원하셨다. 문제는 십일조라는 외형이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루살이(대수롭지 않은 형식적 헌신)는 걸러내고 약대(본질적이고 실제적인 헌신)는 삼키는 외식을 행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헌신과 수고와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도 있기 마련이고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게 되어 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도 그렇다. 애정이란 보물과 상호 작용을 한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고 좋아하면 그에게 마음만 아니라 몸과 재산과 시간도 바치게 된다. 반대로 우리가 어떤 이유로 인해 어떤 사람이나 일에 모든 것을 바쳤다면 처음에는 우리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았다 할지라도 결국은 마음도 거기에 가 있게 된다. 즉 그 사람이나 일을 사랑하게 되며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서 낳은 것이 아니고 낳아서 기르다 보니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기 때문에 자기 인생이 거기에 걸려 있고 따라서 마음도 거기에 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상호 작용으로 인해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게 된다.

사람이 그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몸과 시간과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쓰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식으로든 표현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연히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무엇이며 저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이고 저것은 십일조로 대표된 물질적 실천적 헌신이다.

우리는 먼저 의와 인과 신을 행해야 한다. 이 의와 인과 신이란 결국 주님의 이름 안에 있는 즉 주님의 인격 안에 있는 하늘의 생명의 특징이며 내용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그 이름 안에 있는 이러한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 안에 있는 이 의와 인과 신을 실행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러한 그의 마음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의 뜻과 길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의 인격은 사랑의 인격이며 의롭고 진실한 인격이며 아버지(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격이다. 땅에 계실 때 주님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아들의 위치에 계셨다. 그리고 항상 사람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겼다. 물론 죄와 불의를 거절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사셨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 의와 사랑과 믿음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그 생명을 받지 않은 것이다. 아들의 생명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아들의 믿음과 행위가 있게 되어 있다. 파탄되고 분열된 인격이 아니라면 사람은 한 가지 인격적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정상이다. 아들의 인격 곧 하나님의 사람이 소유한 생명에는 현저한 특징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의와 인과 신이다. 여기서 어느 하나라도 문제가 있으면 그것은 정상이 아니다. 의롭기는 한데 사랑이 없다든지 사랑은 많은데 불의하다든지 의롭기는 한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든지 반대로 항상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매정하고 불의하다든지 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의와 불의가 양립할 수 없듯이 사랑과 불의도 양립할 수 없고 의와 매정함도 양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이러한 인격적 불일치가 보인다면 그는 가짜인 것이다.
또한 의와 인과 신은 있는데 십일조 즉 실천적 헌신은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가짜이다. 이러한 불일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이를 뜨겁게 사랑하는데 밥은 안 준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용과 형식은 언제나 같이 간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주님의 책망과 심판을 받은 것은 단지 그들의 어떤 행동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그런 (무자비하고 불의하고 돈을 사랑하고 주님을 대적하는) 행동 안에서 그들의 마음과 인격, 믿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돈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왜 돈 이야기를 자꾸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실제로는 속으로 더 돈을 사랑하고 돈에 더 인색한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정말 돈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돈을 후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돈이 별 것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러니 돈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 자신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같은 아주 하찮은 것의 십일조만 규칙적으로 바칠 뿐 그보다 큰 것은 실행하지 않았다. 하루살이는 걸러내지만 낙타는 삼켰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진정한 헌신을 하지 않았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특히 강조하며 붙잡는 것은 거의 십일조와 주일 성수, 성전(집회소) 건축 같은 것이다. 이것은 사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처럼 초보적이고 말단지엽적인 헌신이다. 이런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헌신이 아니라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헌신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본래 대수롭지 않은 것이며 그 자체로서는 큰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이런 것은 교회가 주님을 추구하고 그의 생명을 받아서 거룩한 몸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소들을 신자와 교회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와 목표인 것처럼 강조하고 붙잡는 것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헛된 일을 하는 것이다.

신자 개인이나 교회가 추구해야 할 보다 본질적이고 중요한 요소는 생명의 말씀을 누리는 것이며 그것을 사람들에게 증거하여 사람을 살리며 온전케 하는 일이며 각 지체들이 서로 섬기고 사랑하여 함께 몸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며 하나됨을 유지하는 일이며 또 그로 인해 주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게 일이다. 이런 일을 제쳐놓고 십일조나 주일 성수나 사람만 모으는 식의 전도, 교회 건물을 짓는 일 등만 강조하는 것은 이들이 신령한 일을 통해 육적이고 세상적인 영광(이익)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성도들이 실제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누리고 또 전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몸 된 교회로 건축되어져 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헌금과 각종 사업과 기타 형식적 요소들이 추구되고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 화}와 {일곱 번째 화}는 내면의 깨끗함과 거룩을 추구하지는 않고 외적인 경건과 예의만 추구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주님은 그들은 가리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 겉은 깨끗하나 속은 죽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들의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나 겉은 그것을 감추기 위한 좋은 말과 예의로 꾸미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율법의 더 중한 것은 소홀히 하고 덜 중한 것들은 중히 여긴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겉이 깨끗하다고 하나 그들의 겉(그들 신앙의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측면)도 결코 완전하지 못했다. 그들의 가르침이나 행위는 허점 투성이었으며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책잡힐 수 있는 것이었다. 외형적 깨끗함을 추구하는 그들이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들의 속이 깨끗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먼저 안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겉도 (완전히) 깨끗해지지 못한다.


{여덟 번째 화}는 선지자들을 죽이고도 그들이 죽은 후에는 그들을 추억하며 애도하는 외식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기 영광과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싫어하며 될 수 있는 한 멀리하려고 했으며 또 그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온 모든 선지자들을 거절하며 죽인 자들의 후손이었다. 지금 그들은 조상 적에 있던 그 죽은 선지자들에게 애도와 경의를 표하지만 현재 참 선지자요 완전한 선지자인 예수님을 거절하고 죽임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패역한 그 조상들의 후손임을 입증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죄는 하나님보다 자기들의 敎派로 사람들을 인도한 교파주의(宗派주의), 자신들의 육적 이익을 추구하다 더 중요한 신앙의 요소들을 간과한 形式주의, 스스로 거룩하다 하나 그들의 내부는 온갖 탐욕으로 가득찬 위선적 삶, 그래서 결국 참 선지자를 죽였던 그들 조상들의 후손으로서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죽이는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종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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