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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5-21 말씀은 일차적으로 주후 70년 발생한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말씀은 예언의 이중적 성취 원리에 의해 장차 세상 마지막 때에 있게 될 마지막 환난의 상황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두 번째 예루살렘 멸망과 관련된 예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은 마지막 때에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며 그 후 대 환난을 만나 예루살렘은 두 번째로 함락될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주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공통 분모로 하여 가까운 장래의 일과 먼 미래의 일을 '예언적 遠近法'에 의해 동시에 투시하신 것으로 보인다. (사13:6-9, 욜1:15 등 구약에 시사된 '여호와의 날'에 관한 예언도 주님의 예언과 같이 그 내용이 매우 포괄적인데 거기에는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 마지막 대 환난과 최후 심판 등이 다 포함되어 있다.)  


1.도망하기 쉽게 준비하라 (24:15-22)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24:16)

마지막 때에 만나게 될 환난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난에 대한 경고를 받은 모든 신자들(유대인들)은 환난이 닥쳐왔을 때 혹시 그것이 나는 비켜갈지도 모른다는 식의 안일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 적극적으로 도망함으로써 그 환난을 벗어나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겁쟁이여서는 안되며 주님을 위해 위험과 고난을 감수하고 용감하게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이 미리 경고하신 위험까지 그대로 앉아서 덮어써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소돔에 대한 임박한 심판으로 인해 롯에게 천사를 보내어 미리 위험을 경고하시고 도망할 것을 지시했다.(창19:17-21) 이런 경고를 무시하고 안일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용감한 것이 아니고 어리석고 거역적인 것이다. 그런 사람은 결국 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마10:16)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를 발휘하여 때로 불필요한 위험을 피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목숨을 아끼고 보존하기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목숨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그의 목적을 위해 소중하게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24:16,17)

이 말씀은 환난의 날에 위험을 피하고 생명을 보존하려면 자기 목숨을 제외한 모든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기민하게 행동해야(도망가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불이 난 집에서 빨리 도망하지 않고 거기 있는 물건들에 미련을 가지고 그것들을 꺼내오려고 하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 19:26)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 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 17:31-33)

환난을 피하여 도망함으로써 목숨을 아끼고 보존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며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다음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4-26)

여기서 주님은 목숨을 두 개로 말하고 있다. 하나는 잃어버려도 될 목숨 또는 버려야 할 목숨이고 또 하나는 결코 잃어서는 안될 목숨 즉 반드시 보존해야 할 목숨이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이나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어버린다고 할 때의 그 목숨은 육신의 안락 또는 육신의 욕망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는 재미가 없다고 말할 때 그 재미, 살 만하다고 말할 때 그 살 만하다는 것이 바로 이 목숨(생명, 삶)이다. 그러나 주님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표현한 그 목숨은 영적 생명(아들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이처럼 두 개의 생명, 두 개의 목숨, 두 개의 삶이 있다. 바로 영의 생명과 육신의 생명, 영적 삶과 육적 삶이다. 그러나 사실 육신의 생명은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몸, 사망의 몸, 죽을 몸(롬8:11)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보존할 생명은 오직 영적 생명, 아들의 생명 하나밖에 없다. 주님의 말씀은 말세의 어려운 상황에서 이 생명을 보존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육신의 생명을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롯의 아내에게 있어서 소돔에서의 생활은 곧 그의 생명과도 같았다. 거기에 있는 물건들과 일들과 사람들은 다 그의 몸의 일 부분과 같았고 그의 삶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일 순간에 다 사라진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으며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본 것이다. 사실은 그 사람 자신이 그 소돔의 일부였으므로 소돔과 분리되어 별도로 생존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과 하나인 사람은 세상과 운명을 같이하게 될 것이다.

롯을 하나님이 건지신 것은 아브라함의 소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롯의 생명이 소돔과 일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증거에 의하면 롯은 온전치는 않지만 그 생명이 소돔 사람들의 생명과는 맞지 않았던 사람이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벧후 2:4-10)

베드로가 롯을 의인으로 표현한 것은 그의 생명이 소돔 사람들의 생명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로운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롯은 소돔 안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그 자신의 생각과 마음이 어떠하든 그의 생명이 소돔을 용납할 수 없는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거기서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롯을 마지막 순간에 강제로 이끌어내실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롯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취하신 조치이기도 하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며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어디서 살며 어떤 모양으로 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된 생명 곧 영생에 대한 인식을 가지며 그것을 사모하며 추구하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생명(삶)을 열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영생을 얻었으면서도 실제로는 영생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 곧 그 생명은 하늘에 속한 생명인데 실제 삶은 몸과 마음을 다 같이 세상에 두고 있는 사람은 불행하다. 이런 사람은 외식하기 쉬우며 결과적으로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꾹 참고 안 그런 척 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실제로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려면 세상의 본질을 알아야 하고 더 좋은 세계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과 분리되고 구별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본질을 알므로 거기에 탐닉하지 않고 목숨(육신의 생명, 일상 생활, 일, 직업...)을 부지하지만 결코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목숨, 더 소중한 생명(삶)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추구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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