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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는 자이다. 깨어서 종말을 준비하며 환난의 때를 대비하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모든 것을 훌훌 떨어버리고 떠날 수 있는 나그네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사실 우리는 세상을 떠나갈 때 이것을 비로소 깨닫고 생각할 사람이 아니라 처음 들어올 때부터 이것을 알고 있어야 하며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처음 들어갈 때 애굽과 바벨론과 가나안에 속한 모든 영광들 곧 세상 영광들을 다 버리고 새 마음과 새 환경에서 삶을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받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께서 난공불락의 성인 여리고 성의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다 불태우도록 지시하신 데서 나타났으며 또한 여리고의 금은과 시날(바벨산) 외투를 훔친 아간을 그 가족과 함께 죽이신 것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가나안이 자랑하는 최고의 영광은 여리고 성 자체였다. 거기에는 무너지지 않는 이중의 성벽이 있었고 그 속에는 많은 재산들(가축들)과 금은 보화들과 그들이 만든 문화와 작품들과 일들이 있었고 또한 그것들을 탐닉하며 자랑하는 잘난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 성 자체와 거기에 속한 모든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불태우도록 명령하셨다. 이것은 신자의 출발점이 어디냐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취하신 조치였다. 나중에 보면 다른 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원주민들만 죽이거나 쫓아내었지 가축들이나 나무, 집과 성, 기타 물건들은 다 그대로 두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존 바탕이 될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정복지인 여리고 성의 모든 것을 멸하도록 하신 것은 그것(세상 물건과 영광)들은 단지 우리 삶의 수단일 뿐 결코 우리의 목적이나 우리가 추구해야할 참된 영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께 기반을 두고 있으며 하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공급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 그것이 알파와 오메가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아들의 생명을 받았으며 또한 그 말씀 안에서 아들의 생명을 누린다. 이것이 우리의 호흡과 활력과 기쁨의 근원이다.

지금 우리는 하늘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다. 그러므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환경은 죄인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다. 바깥에 있는 죄인들도 힘든 환경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인 곧 우리 자신이 구속되지 못한 몸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이 환경도 힘든 환경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육신의 욕망을 따라 행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환경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원하신다.

미국 사람이 한국에 와서 산다고 해서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하늘에 속한 사람은 세상에 살 동안에도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살아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있어도 가나안 사람이 아니요 하늘에 속한 사람이었고 그것은 그가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블레셋 그랄 땅으로 갔을 때도 변함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또한 그들이 거기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여리고 성을 전멸케 하고 또한 아간을 징계하셨던 것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4:19)

집 안에 있는 물건이나 겉옷은 쉽게 버려 두고 떠날 수 있다. 그러나 아이 밴 여인이나 젖먹이는 여인이 속의 아기를 떼어놓고 도망하거나 젖먹이를 버려 두고 도망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신자에게 세상에 속한 무거운 짐이 너무 많이 붙어 있거나 떼기 어려울 정도로 세상 일이 강하게 붙어 있다면 환난을 만났을 때 쉽게 그 자리(환난이 있는 세상)를 떠날 수 없으므로 환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신자는 평소에 세상 일에 너무 깊이 빠지거나 매이지 말아야 한다. 임박한 환난을 대비하여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나그네와 같은 자세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되는 대로 살라는 것은 아니며 마지막까지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살되 세상 일에 집착하지 말고 언제나 모든 것에서 쉽게 떠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할 수 있다면 구조 자체도 그렇게 짜면 더 좋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25-31에서 결혼이나 가정 생활이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일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매이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말했다. 또 재산이나 명예, 기타의 세상적 소망과 즐거움에도 매이지 말 것을 명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임박한 환난, 임박한 종말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인식을 가져야 한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1,12)

바울은 우리가 이 시기를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안다는 것인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말미암아 아는 것이다. 즉 바울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느낌으로 인해 어떤 사람들이 지금이 어느 때다 지금이 종말이다 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우리가 이 때를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앞 시대를 살아간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종말적 관념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밖에서 가르쳐주어서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생명이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바울은 적어도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날이 항상 종말이다 라는 차원에서 한 말이 아니고 종말이라는 것이 시간적으로 어느 때에 정해져 있다는 차원에서 한 말이다. 이것은 인생을 시간 세계 안에서 처음이 있고 끝이 있는 유한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종말 곧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 늦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중에는 종말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표는 사람의 시간표와 다르며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생각에 따라 계획을 세우고 작전을 짜서 이렇게 하면 되겠다 저렇게 하면 되겠다고 하고 마음대로 인생을 펼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사람들이 예측하지 못한 시간과 방법으로 갑자기 나타나시게 될 것이다.
바울뿐 아니라 야고보나 베드로나 요한이 다 종말을 기다렸으며 거기에 주의하며 살았다.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24:20)

마지막 대 환란은 워낙 크고 무서운 환난이기 때문에 사람이 아무리 잘 대비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온전히 피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잘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환난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항상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생각하여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주시고 환난의 날들을 감해주시기 때문이다.

(환난이 안식일에 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은 초대 교회 당시 많은 신자들이 여전히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처음부터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았으며 안식일 뿐 아니라 어떤 절기나 율법적 규례에도 매이지 않았다. 다만 성령의 인도하심만 좇았을 뿐이다. 그러나 일단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 신자는 환난이 안식일에 온다 할지라도 그 양심상 안식일에 도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런 연약한 성도들이 환난 날에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안식일에 환난이 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성전의 완전한 파괴는 하나님께서 구약을 완전히 폐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었으며 따라서 신자가 구약을 좇아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역사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안식을 헛되게 하는 잘못된 일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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