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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 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주의 날은 언제인가 (24:32-36)

주님은 언제 다시 오실 것인가? 주님이 정확하게 언제 다시 오실 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예언가들이 하나님이 자기에게만 특별히 그 때를 알려주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절대로 그 날을 알려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것을 알려주시지 않는 것은 알려주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 날은 구원의 날이자 심판의 날이다. 심판의 날이란 말은 곧 시험의 날이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미리 잘 대비한 사람만 통과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미끄러지는 날이 바로 주의 날이다. 그러므로 그 때를 미리 알려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시험 치려는 학생에게 어느 문제가 시험에 나올 것인지를 미리 알려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주의 오심에 대해 미리 잘 대비한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언제 올 것인가 하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날짜는 알려주시지는 않았지만 그 날의 징조는 알려주셨으므로 그것을 잘 새기고 있는 사람은 그 날을 대비할 수 있다. 주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셨다. 여름이 언제 올 것인지는 여름이 와봐야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전의 여러 징조(환경의 변화)들을 보고 미리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화과나무의 가지와 잎의 변화를 보고 여름을 미리 느끼며 구름의 모양과 습도의 변화를 보고 비가 올 것을 미리 느낀다.

그러므로 주님의 날을 대비하지 못하여 심판을 받게 되는 사람들은 그 정확한 날짜를 몰라서 대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고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마16:1-3) 이것은 마음만 있다면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여러 징조와 표적들을 통해 얼마든지 때를 분별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주님이 마태복음 24장에서 일러주신 여러 징조들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날 일들이며 성도로 하여금 시대를 분별하고 깨어 근신하도록 하기 위해서 미리 일러두신 것들이다. 그러므로 주의 오심을 대망하는 그리스도인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일깨워야 한다.  

큰 돈을 버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길에 널린 돈을 주워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모두 돈을 벌려고 눈이 벌겋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돈이 굴러오기만 기다리는 식으로 돈을 벌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에 돈벌이가 될 일이 있는지 주의 깊게 살핀다. 살피고 또 살핀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사업을 하든지 부동산을 사든지 꼭 돈이 되는 것만 한다. 그러니 돈을 버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감각이 있다. 이재에 밝은 눈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저절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얻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자나깨나 돈 나올 구멍만 살피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감각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주님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사모해야 한다. 그의 날 즉 그의 오심을 간절히 소망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 날의 징조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대충 한 번 살피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깨어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리하여 영적 감각을 높여야 한다.

주님은 자기 신부를 만나러 오시는 것이며 신부를 취하기 위해 다시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사랑하고 그를 기다리는 자만이 그의 영접을 받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날을 대비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이 날짜의 문제나 요령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떤 교리를 믿고 어떤 지식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전적으로 관계의 문제라고 생각하신다. 구원이란 간단하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아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무슨 구원을 어떻게 얻겠는가?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 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잠1:22-26)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2:1-5, 8:17)

시대를 분별하고 미래(종말)를 대비하는 영적 감각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며 기다리며 날마다 주의 깊게 말씀을 살피며 시대의 징조를 살피며 말씀을 청종하는 가운데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 주님이 예언하신 마지막 때의 일들은 일차적으로 유대인과 관련된 것으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가 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실제로 주님과 동 세대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성취되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종말은 왔으나 세상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오심이 왜 이렇게 늦어지는가 하는 생각을 가졌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그의 편지(베드로후서 3:2-15)에서 주님이 택하신 성도들이 다 구원받도록 오래 참으시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했다. 바울 역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고 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 있는가를 잘 말해주었다. 베드로는 “주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했다.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한 것은 하나님이 시간 관념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간 문제보다 사람의 구원을 더 크게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뜨겁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한 것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하자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속히 재림하여 신부를 취하고 동시에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그 아들로 하여금 오래 참고 기다리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당신의 교회를 보다 영광스럽고 온전케 만드시려는 주님 자신의 열정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는 말씀이 주님의 재림에도 적용될 말씀인지 아니면 유대인들의 임박한 심판에만 적용될 말인지를 확실치 않지만 만일 그것이 주님의 재림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다면 그 예언의 성취는 분명히 지연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유가 있으며 또한 한없이 그의 오심이 연기될 것은 아니다. 모두가 방심하고 있는 어느 때에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2.깨어 있으라 (24:37-44)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일이나 사고 팔며 심고 집 짓는 일(눅17:28)은 언제나 있는 일상적인 일이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런 일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말세의 특징은 아니다. 그러나 말세에는 이런 일을 보통으로 하지 않고 미치도록 하며 특별나게 할 것이다. 그것이 말세의 특징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온통 먹고 마시고 무엇을 사고 쾌락을 즐기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생존 자체가 인간의 관심이 아닌 시대는 없었으나 어떤 시대는 그것이 극단적이다. 노아의 때와 소돔 고모라 때도 그랬고 주님이 다시 오실 무렵에도 그럴 것이다. 노아의 홍수 심판과 소돔 고모라의 불 심판은 말세에 있을 세상 심판의 모형이다.

오늘날이 마지막 때라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오늘날처럼 안락한 삶과 육체적 쾌락에 관심을 집중한 때가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요즘 무엇이 재미있는가? 어떤 물건을 얼마에 샀으며 어디에 얼마를 투자하여 얼마를 남겼는가? 어딜 가나 누구를 만나거나 이런 주제로 이야기한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 모든 것을 건다든지 혹은 단순히 사치와 쾌락을 위해서 아낌없이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극단적이고 맹목적인 삶의 태도가 바로 말세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신자들도 별 차이가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 경고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생존은 중요한 일이지만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 대충 하면 된다. 하나님이 살게 하시면 살고 거두시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영광스러운 교회의 조성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구원의 방주를 짓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건축을 말하는 것이다. 마귀는 이러한 일에 대해 극히 경계하며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세상에 빠지게 하려고 흔들며 시험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과 형제들을 항상 주님께 부탁해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과 함께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노아의 때에 모든 사람들이 한 길로 치달았지만 노아의 가족만은 하나님의 경고와 예언의 말씀을 붙들고 방주를 짓는 일에 몰두했다. 우리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구원의 방주(교회)를 건축하는데 온 힘을 쏟는 삶이어야 한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

다 같이 밭에서 일하고 다 같이 집에서 맷돌을 갈고 있었지만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해서 외형적으로 특별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며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상 생활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가운데서 주님께 데려감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 같이 밭에 있던 두 사람 또는 맷돌을 갈던 두 사람에게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는 자기를 위해서 일하고 또는 그 일 자체에 목적과 의미를 두고 일을 했고 하나는 주님의 뜻을 따라 일했다는 차이가 있다. 즉 생존의 수단으로서 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일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일 자체가 그 사람에게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한 가지 다른 교훈을 얻자면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 일은 하지 않고 규모 없이 말만 하는 사람으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음의 말씀들은 종말을 맞이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쳐준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엡 4:28)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살전 2:9)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 20:34,35)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살전 4:9-12)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여 함이니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살후 3:6-12)

너무 일에 빠져 일만 하는 것도 문제고 일은 안 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것도 문제다. 땀 흘려 밭을 갈고 가족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섬기는 평범한 일을 하면서도 그런 일을 통해 주님을 섬기기에 힘쓰는 것이 합당하다. 생활이나 일을 하되 그것에 빠지지 않고 영원한 삶을 위해 준비하며 깨어 있는 자는 주님께 취함을 받을 것이다.


3.충성되고 지혜로운 종 (24:45-51)

이 비유는 달란트 비유와 매우 유사하다. 성도는 주님의 집을 맡아 있는 청지기와 같다. 청지기가 주인의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며 집을 돌본다는 것은 곧 성도가 주님이 오시기까지 복음을 증거하여 사람들을 구원하며 자기의 은사를 활용하여 교회의 형제들을 섬김으로써 주님의 몸이요 집인 교회를 건축하고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집 맡은 자가 갖추어야 할 2대 요건은 충성과 지혜이다. 지혜는 사리를 올바로 판단하며 맡은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사에 좌우되지만 일 맡은 자의 마음 자세와도 관련이 있다. 충성된 자는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러므로 보다 중요한 것은 충성이다. 충성이란 주인이 보든 안보든 주인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인해 언제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충성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재림이 늦어져도, 또한 주님이 일에 대해 항상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책망(징계)하시지 않더라도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주님이 곁에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일을 하는 자이다. 반대로 주님의 재림이 늦어진다고 해서, 또는 주님이 지금 당장 곁에서 지켜보시며 감찰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맡은 일을 늘 불성실하게 적당히 처리하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外飾하는 자로 여김 받을 것이다.

어리석고 악한 종은 언제나 평소에는 실컷 놀다가 주인이 올 때쯤 미뤄 놓았던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하여 주인의 회계를 대비하려고 한다. 그러나 주인은 언제나 종이 예상치 못했던 不時에 나타나서 종과 회계할 것이다. 그러므로 설사 평소에 충성되지 못한 어떤 자가 주님의 오심을 요령껏 대비하여 외적으로 경건하고 열심 있는 신자인 것처럼 자신을 꾸민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과 인격을 살피시는 주님을 속이지는 못하며 오직 위선자로 판정을 받고 버림받게 될 것이다.      

마지막 때 참으로 복된 자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님이 언제 오셔서 보시더라도 칭찬하실 수 있도록 늘 깨어서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하는 자이다. 그런 자에게는 위기의 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상관없다. 지금 주님과 동행하며 주의 나라와 일에 동참하는 것을 영광과 복으로 알고 행하는 자만이 주님의 오심이 늦어지더라도 개의치 않고 마지막까지 자기 일을 충성되이 하다가 주님을 기쁨 중에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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