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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박과 자유 (마19:9-12) / 2005. 12. 18

2010.04.30 15:35

이상봉 조회 수:39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주님은 상대방의 부정(간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가정이 깨어져 버린 상태가 아니면 남편이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부정(不淨)은 왜 이혼 사유가 되는가? 그 까닭은 지난 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정(그릇된 연합)이 이전의 (연합) 관계를 깨버리기 때문이다. 간음은 새로운 연합을 형성하며 기존의 연합을 파괴한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6:16-18) 어떤 사람이 내 몸에 붙어 있던 지체를 떼어가서 자기 몸에다 수술하여 붙여버렸다면 그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 된 것이다. 따라서 부정으로 인해 이혼하게 되는 것은 새로 이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혼된 것을 그렇다고 확인(선언)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만일 부정을 한 배우자가 회개하고 돌아와서 같이 살자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말할 것 없이 받아주어야 한다. 열 번을 나갔다 들어온다 해도 그렇게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선악을 따라 행하는 자라면 이것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뢰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결혼 생활을 지속하기가 실질적으로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육으로 사는 자가 아니며 선악을 따라 행동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따라 행동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 고약한 신부(이스라엘 백성)를 돈 주고 사와서 다시 데리고 사는 일에 이골이 나신 분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면 사실상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한 번 결혼을 하면 배우자가 아무리 문제가 많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한 번 결혼을 한 이상 무조건 평생 데리고 살아야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그럴 것 같으면 아예 결혼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 라고 말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결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결혼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이며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인가? 결혼은 사람을 엄격하게 속박하는 제한인가? 결혼은 사람을 섬기며 봉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결혼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자녀들을 낳음으로써 생명을 이어가고 번식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창조의 법칙 안에 있는 것이다. 둘째, 연합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더 풍성히 누리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하나로 짓지 않고 둘이 연합해서 함께 있도록 지으셨다. 그 까닭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연합의 세계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셋째, 서로 돕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넷째, 이것은 타락 후의 상황과 관련된 것이지만, 결혼은 음행(성적 범죄)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결혼이 인간의 육적 욕망과 개인적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필요와 목적을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결혼은 사람으로 번식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결혼은 하나의 우주 질서이며 그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 속에 결혼하고자 하는 욕망을 심어놓은 것이고 또한 그 본성적 욕망 때문에 사람이 결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에게 결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세포에다 심어놓지 않았다면 아무도 결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육체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섬김과 수고와 희생의 삶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끌리고 여자가 남자에게 끌리는 것은 육체의 본성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위해 사람에게 심어놓은 성질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동물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신적(神的)이고 우주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은 다 결혼을 하라는 말인가? 다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고 살라는 이야기인가?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그보다 더 높은 자리에 와 있기 때문이다. 결혼의 목적은 이제까지 말한 바와 같이 생명의 산출과 유지, 확대, 충만에 있다. 결혼은 그것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보다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을 유지하고 고양(高揚)시키고 확대하고 충만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결혼이라는 외형(형식)보다 우선이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은 후 '결혼을 하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라고 말한 것은 결혼이 육신의 욕망을 제한하고 속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결혼이 육신을 피곤케 하고 구속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좇아가는데 그것이 장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과 목적과 목표는 결혼보다 더 큰 연합, 더 큰 행복의 세계에 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7장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결혼에 대해 매우 신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볼 수 있는데 바울이 바로 그 사람이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紛擾)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전7:20-40)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지금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 결혼을 하라는 것인가? 하지 말라는 것인가? 둘 다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결혼을 하든지 안하든지 (결혼보다 높고 결혼보다 영원한) 그리스도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그는 더 나은 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결혼보다 더한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추구하며 그것을 누리라는 것이다. 결혼은 이미 지나간 세계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첫 창조의 세계의 질서일 뿐이다. 첫 창조 안에서 결혼보다 더한 생명의 길은 없었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생명의 산출(생산)도 없고 생명의 기쁨과 연합의 기쁨도 못 누리는 것이다. 가정이 아니면 내 것 네 것을 가리지 않고 유무상통하는 세계를 맛볼 수 없고 서로 몸 아끼지 않고 섬기는 세계,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는 세계를 맛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제 더 나은 세계, 더 나은 길이 열렸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직접 만나고 직접 사귀고 직접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혼자서도 하나님의 세계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함께 성령을 받은 사람이면) 그 누구와도 결혼 이상의 연합과 생명 누림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주님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는가? 그는 모든 면에서 우리의 모범이고 표준이신 분이다. 결혼이 하나님을 누리고 천국을 누림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라면 주님은 결혼을 했을 것이며 그 안에서 승리의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주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일찍 죽을 운명인데 어떻게 결혼을 하겠는가 하고 말한다. 주님은 그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고 감당해야 할 사역이 있기 때문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그 주님과 다른 운명이며 다른 삶을 살 사람들인가? 사람들은 우리와 주님이 다르며 우리와 바울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은사는 다르고 사역의 외형은 다를 수 있지만 본질은 같다. 우리도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며 우리의 몸과 마음은 그것을 위해 바쳐져야 한다. 결혼은 그보다 밑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을 했느냐 안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새로운 세계를 누리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앞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사람이 일단 결혼을 하면 상대가 간음을 행하거나 죽지 않는 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결혼을 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자 주님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결혼이 좋으냐 안 좋으냐 또는 필요하냐 필요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하고 결혼을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상 별개의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안하는 것은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안하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은사(恩賜)의 문제이다. 타락한 인류는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결혼을 안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안할 수도 없다. 간음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결혼도 육신의 형편상 마음대로 하고 안하고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육신의 속박이 싫어서 그렇든지 아니면 세상 삶에 매이지 않고 주님을 온전히 섬기고 싶어 그렇든지 결혼을 안하려면 반드시 특별한 은혜와 은사가 필요하다.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것은 쉽고 어렵고를 떠나 잘못이다. 하나님이 독신의 은사라는 것을 주실 리도 만무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결혼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혼자 살면서 그리스도와의 더 깊은 연합을 추구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더 깊이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고 그것이 최고의 목표이기 때문에 결혼도 좋고 독신도 좋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독신으로 사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까닭에 결혼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면 그리고 그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그는 결혼한 사람이 누리는 기쁨을 누리지는 못할지라도 결혼한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큰 기쁨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 결혼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그리고 남편이나 아내가 마음에 들어도 좋고 안 들어도 상관없다. 우리 삶이 거기에 있지 않고 우리의 기쁨과 안식의 근원이 거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과 이혼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거기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육체적 환경이 이렇게 조성되든 저렇게 조성되든 그것으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결혼을 하면 하는 대로 문제가 있고 안하면 안하는 대로 문제가 있고 이혼을 하면 이혼을 하는 대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없는 것이며 그래서 사람 자신이 잘못된 것이지 환경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안식이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살 수 있다.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기쁨과 만족이 있는 사람은 이런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저런 환경에서도 감사하게 된다. 덮어놓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환경에서는 이런 이유로 감사하고 저런 환경에서는 저런 이유로 감사하는 식으로 감사가 실제적이다. 왜 그런고 하니 모든 환경에는 다 각기 장점이 있고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다윗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큰 유익을 얻었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67,71)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 환경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그 모든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항상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환경을 그 자녀에게 항상 복되고 유리하게 조성해 나가시는 분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가장 좋은 환경(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가지고 있으니 나머지 환경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이다.

이 최상의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외적 환경이 아무리 개선되고 바뀐다 하더라도 여전히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문제가 사람 안에 있다면 결혼을 한다고 상황이 더 나아질 것도 없고 이혼을 한다고 상황이 더 나아질 것도 없다.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혼자 있을 때 있던 문제가 결혼함으로써 없어지거나 함께 살 때 있던 문제가 이혼한다고 없어지는 것은 극히 적다. 인생의 근본 문제는 내적(영적인) 환경의 문제이지 외적 환경 문제가 아님을 기억하기 바란다.  


만일 어떤 사람이 결혼을 엄격한 구속으로 느낀다면 그것은 그가 그만큼 타인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도록 심령이 병들고 왜곡되어 있다는 증거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옆에 어떤 사람이 같이 있기만 해도 불편한 사람도 있다. 그것은 상대의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이다. 그것은 그만큼 내가 여유가 없고 생명이 결핍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만큼 섬길 마음이 없고 하나님의 손에 다루심을 받을 마음이 없다는 증거다. 그것은 그만큼 내가 육적이고 편한 것만 하고 싶은 자이고 마음대로 살고 싶은 자라는 증거다.

편한 대로 살고 싶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 할 때 무엇이 편한 삶이며 무엇이 내 뜻인가? 많은 사람의 경험에 의하면 결혼은 결코 편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면에서 수고스럽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결혼이 자기를 혼자 있을 때보다 더 편하고 더 자유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이와 같이 결혼이 사람을 속박하고 힘들게 만드는 줄 알면서도 결혼을 안한 사람들은 왜 편한 독신 상태를 왜 버리고 결혼을 하려고 안달을 하는가? 결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 불편함을 사랑하고 원해서 결혼을 하려는 것이다. 즉 혼자서 외롭게 편한 것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몸이 수고스럽게 되고 싶어서 결혼을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을 한 후에는 상대방을 섬김으로 인해 몸이 바쁘고 피곤하게 되는 것을 감수해야 하지 않는가? 감수할 뿐 아니라 그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생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바로 내 안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백보를 양보해서 편한 생활과 자유로운 삶을 여전히 원하지만 결혼 생활의 다른 유익 때문에 (결혼의 불편을 알면서도) 결혼을 했다고 하자. 그는 결혼으로 인한 불편함과 즐거움을 저울질하다가 후자가 더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편한 것은 괴롭지만 결혼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은 있으니 그것으로 기뻐하며 감사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혼한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문제가 아닌가? 대부분의 부부들은 행복과 감사보다 불평과 원망의 말을 많이 한다. 그것이 심해지면 좋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고 오직 불편함만 온 몸과 마음을 지배하게 되어 결혼 생활이 하나의 속박으로 느껴지고 탈출 기회만 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환경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외부적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 곧 생명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 안에 하나님이 없고 진리와 생명이 없으면 군중 속에 앉아 있어도 외로움을 느낄 것이며 물 속에서도 갈증을 느낄 것이다. 인간의 모든 정욕과 탐욕은 근본적으로 배고픔(갈증)에 기인한다. 괜히 그런 것이 발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배고프고 안식과 만족이 없기 때문에 작동하는 것이다. 사탄은 배고픈 사람들을 속여서 마치 결혼(연인)이나 이혼, 돈이나 쾌락에 답이 있는 것처럼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사람 속에 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말씀대로 천국을 위해서 스스로 고자가 되기도 한다. 즉 그리스도를 위해서 결혼을 포기하고 독신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 그렇게 하니까 앞으로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 속에 놀라운 은혜와 은사가 이미 있어서 복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동행하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결혼이 더 재미있고 더 큰 기쁨을 준다면 왜 결혼을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고 시시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바로 복을 많이 받은 마음이다.  

결혼이 엄격한 속박으로 느껴지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실제로 결혼은 속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속박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런 속박이 행복한 속박이고 내가 묶이고 싶은 속박이고 또한 영원히 묶여 있고 싶은 속박으로 느낄 수 있다. 주님과 함께 하는 환경은 다 유익하고 스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그것이 불행하고 무의미한 속박으로, 탈출하고 싶은 속박으로 느껴질 때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런 마음은 복되지 못하며 가난하고 고장난 상태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심어 놓으신 본성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살고 싶어해야 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해야 한다. 그런 마음이 없고 결혼 속에서 불편과 고통만 느낀다면 그는 고장난 것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니 괴롭지 않느냐고 항변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누가 불편하게 생각하겠으며 누가 이혼을 하려고 하겠는가?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육의 문제이지 영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영은 환경을 넘어서 안식할 수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이기는 생명은 좋은 사람이든 안 좋은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섬길 수 있으며 능히 그를 제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혼이냐 이혼이냐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우리 마음이 적셔지고 충만케 되기를 사모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이혼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그들이 이혼하고 싶다는 것이며 그들의 인생이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반증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혼이든 무엇이든 모든 문제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은혜를 구했어야 했다. 그들은 그들 앞에 계신 구원자에게 이혼에 대한 질문을 할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들은 만족한 자가 되어서 이혼 문제 자체가 쑥 들어가 버리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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