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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독교 교회들이 소위 성탄절이라고 해서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는 날로서 지키는 날이다. 올해는 주일과 크리스마스가 겹치는 해인데 지난 1994년 이후 처음이다. 우리가 이 모임을 시작한 것이 1995년이니까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성탄절이란 이름 자체가 말해주듯이 주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합당하며 의미 있는 일인가 있는가 하는 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상의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성탄절을 지키고 있는 것은 이것이 합당한지 어떤지를 살피고 하는 일이 아니고 오랜 전통에 따라 생각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이 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아들의 생명 안에서 판단할 때 이 일은 명백히 하나님으로부터 난 일이 아니고 사람으로부터 난 일이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나 성령의 인도나 심지어 초대교회의 습관으로부터 기인한 것도 아니다. 그 어느 것도 이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주후 4,5백년 경부터 교회가 세상 종교(태양신교)의 풍습을 받아들여서 하고 있는 일이다.

축제는 인류의 오랜 전통 문화이다. 사람은 때를 따라 일을 쉬고 즐겁게 놀기도 해야 하는 것이므로 축제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고대 유럽의 경우 그들에게 본래 있던 축제들이 기독교가 들어오고 난 후 기독교적 옷으로 갈아입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기독교나 천주교에서 지키고 있는 성탄절이나 부활절, 수난절, 감사절, 각 성자의 날 등과 같은 기독교적 절기가 된 것이다.

추석이나 설날과 같은 세상 축제와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축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기념하고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 모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탄절을 반대하고 거기 참여하지 않는 것은 이것의 기원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 이것이 실제적으로 전혀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모임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이다. 그것은 주님 자신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의 살과 피를 먹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 자신이 세우신 (주님을 기념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결국 십자가를 말한다. 십자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첫째, 주님의 십자가(구원 사역)를 생각하고 그 의미를 깨달으며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 십자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낮추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이러한 죽음을 기념하고 실천하는 방법은 매사에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께 복종하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닌가? 주님을 기념하기는 하지만 주님 자신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생일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런 기념은 세상적이며 무의미한 것이다. 주님은 태어나거나 죽는 분이 아니고 영원히 계시는 분이다. 물론 주님의 탄생이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것을 기념한다는 의미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방 종교의 풍습에 따라 이미 시작된 이 절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붙인 명분일 뿐 성탄절이 본래 그런 목적을 위해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성경의 수많은 진리 중 딱 그 한 가지(주님의 오심의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절기까지 제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세상 풍속에 불과한 이 절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다.

탄생일이나 강림일 또는 사망일(기일)을 기념하는 것은 세상 종교의 풍습이다. 심지어 그 성인이 핍박을 피해 도망간 날(이슬람교의 헤지라)을 기념하여 절기로 삼는 것도 있다. 우리가 항상 추구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를 더 깊이 누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더 깊이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복된 아들의 생명을 더 깊이 누리도록 달려가야 한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7-14)


오늘 나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의 오심의 의미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성탄절이 문제라는 것은 그것이 전체적으로 볼 때 잘못되었다는 것이지 주님의 오심의 의미를 생각하는 일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주님이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처음 들은 사람은 베들레헴 근처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0-14)
이 말을 들은 목자들은 즉시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서 아기 예수를 만났다.

주님은 왜 오셨는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이 말은 곧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죄 가운데 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그러하였다. 이것을 설명해주는 가장 확실한 상황적 증거는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아무도 그 사실에 주목하지 않았고 그를 찾지 않았다는 것이다. 목자들은 주님의 오심 소식을 듣고는 양을 버려 두고 즉각 주님을 찾아갔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찾아가서 헤롯을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메시아 탄생 소식을 전하며 그 처소를 물었을 때 그 말을 듣고 박사들과 같이 베들레헴을 방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마2:1-3) 찾아가서 경배하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소동이 난 것이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9-13)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남의 나라에 온 것도 아니고 남의 백성들을 찾아온 것도 아니다. 그는 자기 나라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것이다. 그러나 남의 백성은 주님을 영접했는데 자기 백성은 영접하지 않았다. 동방박사는 이방인이요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한 많은 사람들이 본래 약속의 백성으로 선택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 선택된 백성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나기로 선택된 백성이라는 말이지 거룩하거나 훌륭한 백성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결국 택한 백성이라는 말은 택함 받은 죄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 당시 택함 받은 그 죄인들은 자기가 죄인인 줄 몰랐고 따라서 구원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의에 도취되어 있었고 자기의 지식과 자기들이 하고 있는 많은 일들과 자기들이 이루어놓은 왕국 안에 꽁꽁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즐겼다. 그들은 누가 와서 그들을 건져주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누가 와서 자기들의 왕국을 허물까봐 전전긍긍하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시각은 다음 세례 요한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3:7-10)

이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17-21)

주님 당시나 지금이나 상황은 여전하다.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은 주님 당시 유대교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때도 약속을 붙잡고 은혜를 사모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소수 있었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다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된 세상 종교와 사람의 계명으로 대체하고 자기 의에 빠져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

이것은 세상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이름 붙여진 사람들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방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불신앙과 불순종과 죄악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이방 죄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방인들에게는 율법 지식과 자기 의를 자랑하는 것이 없었는데 비해 이스라엘에게는 그것이 가득했다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영원하신 뜻에 대한 인식(지식)이 없었는데 이스라엘에게는 그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도리어 자기 계획과 야망이 가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밀어내 버렸다는 차이가 있다.  

주님이 오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 중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금식과 기도로 그것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이 막연하게나마 메시아를 기다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들의 육신의 욕망을 만족시켜줄 전혀 다른 메시아였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영원한 계획을 성취할 구원자를 보내시겠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이룰 자를 보내신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기다리는가? 오늘 사람들은 무엇을 소망하며 기다리는가?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인가? 아니면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세계인가? 우리는 이미 주님이 오셔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시고 변화시켜 나가시는 중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가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예수께서 오심으로써 새로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스라엘의 경우는 새로 구원을 받는 것보다는 그동안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랐는지를 판단받는 시험(심판)의 의미가 컸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전에 이미 하나님에 의해 건짐을 받은(남겨진) 사람이 누구이며 그렇지 않고 버림을 받은 자들이 누구냐 하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미 구원 받은 자 곧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던 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을 실제로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주님의 오심의 중요한 의미이다. 즉 이스라엘 전체적으로 볼 때 주님이 오심은 구원보다 심판의 의미가 더 컸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현저하게 이루어졌다. 이것은 자기를 신뢰하고 자기 의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하나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오심은 교만과 불신앙과 불순종, 모든 죄악에 대한 심판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낮추고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2,23)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4-26)

이 두 말씀 중 어느 것을 듣는 입장에 있는지 살펴야 한다. 어느 말을 들어야 합당한지 판단하기 바란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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