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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음

마태복음 19장의 부자 청년은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상당히 겸손하게 주님에게 영생의 길을 물었고 주님은 그러한 그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라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막10:17-21) 참으로 귀하고 사랑스럽지 않은가? 그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찾고 영생을 찾는 사람이었다. 돈과 쾌락,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많아도 영생을 추구하는 사람은 드물다. 더구나 그런 것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그것들의 맛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이 청년은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에게 겸손히 무릎 꿇고 영생의 길을 물었으니 참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기꺼이 영생의 길을 알려주신 것이다.

주님이 그에게 알려주신 영생의 길은 무엇인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길에 서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청년은 이미 그렇게 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생각과 그 사람의 생각이 다르므로 둘 사이에 조정이 필요했다. 이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는 한 가지 일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에게 있는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청년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켰다고 했지만 주님은 그가 결코 그렇지 않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그에게 있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이것이 그 청년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였다. 그가 자기의 실상을 깨닫도록 걸림돌을 던지신 이것이 가장 큰 은혜이다. 이것은 주님이 그를 '사랑하사' 베푸신 말씀인 것이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주님께 영생의 길을 묻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며 실행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했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기득권을 더 붙잡는 자들이었으므로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 청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또 이스라엘의 무지한 민중들에 대해서도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진리로 이끌려고 애썼다. 주님은 창기와 세리를 대하실 때도 한 번도 그들을 정죄하거나 책망하지 않았다. 주님은 오직 그들을 사랑하셨고 생명 주기를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이 청년에게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무거운 말씀을 던진 것은 그의 실상을 드러냄으로써 그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 같은 위선자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일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책임진 지도자들로서 이스라엘의 죄와 실패에 큰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고의적으로 훼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사람을 대하시는 원칙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죄가 많건 적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결코 무슨 책망과 정죄를 하시거나 다른 것을 요구하시는 일이 없다. 그런 자에게는 오직 생명의 말씀을 주심으로써 은혜를 베푸신다. 그리고 마음의 교만으로 인해 그 은혜를 거부하는 자에게 비로소 심판을 선포하신다.

그 부자 청년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나? 바로 재물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풀어서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살인자요 간음자요 도둑질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체질을 지닌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자신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했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자라면 즉 그가 살인하지 않는 자요 간음하지 않는 자요 도둑질하지 않는 자요 부모를 얼마든지 공경할 수 있는 자라면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그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 사람이 살인을 하는지 생각해 보라. 다시 말해서 왜 사람이 형제를 미워하고 싸우며 욕하는지 생각해 보라. (주님이 그것을 살인이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왜 사람이 도둑질을 하고 간음하는지 생각해 보라. 왜 부모를 잘 섬길 수 없는지를 생각해 보라. 다 돈을 손해보기 싫고 육체의 욕망을 꺾기가 싫고 육체의 편안함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전혀 문제가 안된다면 무엇 때문에 부모에게 효도를 못하며 무엇 때문에 도둑질을 하며 무엇 때문에 간음을 하겠는가? 우리가 돈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 돈으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우리가 육체의 욕망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더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돈을 풀어헤치라는 말을 어렵게 받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부자 청년이요 고귀한 관원이었던 이 사람은 겉으로는 살인자도 아니고 도둑도 아니고 간음자나 불효자가 아니었겠지만 그의 본성은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이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이나 불효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지라도 속에서 샘솟듯이 역사하는 육체의 정욕과 야망과 자존심을 제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는 본질적으로 살인자요 간음자요 도둑질하는 자인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의 외형이 아니라 그 속 생명이다. 곧 그의 마음과 체질과 본성이다. 그것이 사람의 바깥 행동을 결정하며 그것은 사람의 지식이나 의지를 넘어서는 것이다. 주님이 이 청년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드러난 모습이 대체로 선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그런 일을 하기가 몹시 힘든 사람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지적하고자 한 것은 그의 체질과 본성, 그의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오늘까지 오면서 정말로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과 거스려 살았기 때문이다. 죄인이 선을 행하고 육체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가 하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상 짐과 아울러 율법 짐, 하나님의 짐까지 지고 갔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주님이 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다 그의 모든 소유를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은 다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핵심 의도는 아니다. 부자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 안에는 부자가 매우 적다는 것은 사실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주님을 잘 따르는 경우가 적다는 것도 사실이다. 왜 그런가? 어떤 사람들은 부자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사람의 체질이 하나님을 섬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부자가 자기 소유를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반대로 재물을 팔아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자기가 여전히 소유하며 관리한다고 해서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사람이 돈 때문이든 다른 사유로든지 간에 사람은 체질상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후 제자들은 주님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라고 물었다. 그때 주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셨는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했다. 주님이 청년에게 하시고자 한 말씀은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주님께 나아온 부자 청년의 문제는 그가 돈이 많다는 것도 아니고 율법을 완벽하게 다 지키지 못했다는 것도 아니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에 근심했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가 어떻게 하든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타락한 아담이라는 사실이다. 죽은 자는 산 자의 길로 걸어갈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용케도 그 비슷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 뿐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으며 얼마나 많은 혼란과 고민을 했겠는가? 그런 일을 하는 사람 중에 대다수는 전혀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소수는 그럭저럭 하나님의 뜻을 대충이라도 맞추어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모양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우리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부족함 곧 여전히 한 가지 부족한 그것을 내놓으실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스스로 온전케 되기를 추구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앞에 계속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그것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부끄럽게 되고 당황스럽게 되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수치와 무능과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드러내실 때 우리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갈 것이 아니라 "주여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저는 오직 당신의 은혜를 바랍니다. 당신이 그런 나를 구원하러 왔으니 나를 위해 일해 주십시오" 하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히 이 태도를 취해야 한다. 예수를 처음 믿는 순간에만 취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동안 지속적으로 취해야 한다.



2.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음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2-26)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가 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 곧 육신의 지혜와 능력이 있는 사람,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 부족한 것이 없다고 느낄 만한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도움, 구원)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천국은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주님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하고 물었다. 그때 주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다. 중요한 사실은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복음 18장의 부자 청년은 사람의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가 하나님을 위해 돈 하나도 버릴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한 인물 즉 삭개오는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10)

주님이 삭개오를 부르셨을 때 그는 즉각 영접했고 주님에게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더러운 죄인으로 취급하는 자였다. 주님이 그 집에 들어가시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왜 저런 사람의 집에 들어가려고 할까' 하고 수군거린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 다가가서 손을 잡자 즉각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재물이 많으냐 적으냐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오직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앞에 엎드려 (자기를 내려놓고) 은혜를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가 없다. 피 같은 돈을 어떻게 아무에게나 나누어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부자 청년은 어려서부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고 삭개오는 어려서부터 남의 돈을 빼앗고 남을 등쳐먹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그 청년은 할 수 없었고 삭개오는 했다. 이것이 우리의 은혜의 세계고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할 수 없음으로 인해 절망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 우리의 사랑할 수 없음과 인내할 수 없음과 화를 참지 못함과 돈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지 못함과 온유할 수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무엇을 감사한다는 것인가? 오늘도 나의 할 수 없음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다 하실 수 있으심이 내 생활 속에서 역사하여 결국 내 안에서 승리가 나오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오게 될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며 그것을 바라보는 재미로 살 수 있다. 그리고 저녁에 하나님이 과연 그리 하신 것을 내놓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것이다. 오늘도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게 하시며 오늘도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며 떨어지지 않는 발을 움직여서 하나님이 하게 하신 말을 하고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을 했음을 내놓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다시 말하지만 승리의 첫 길은 사람의 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깨닫고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가 사람의 할 수 없음을 안다면 자신의 일로나 남의 일로나 우리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게 될 것이며 아무 할 말도 없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자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오직 자기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은혜를 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다 하실 수 있으며 다 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수고하고 애써서 무언가를 쟁취하고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떠함으로 인해서 혹은 다른 사람들의 어떠함으로 인해) 찡그리거나 절망하거나 죽는 소리를 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하실 수 있음으로 인해) 다만 감사하며 찬송하며 웃을 수 있다.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이니, 나는 잘 못하지만 그리스도야 다 잘 하시고 아무 문제가 없으니 그런 것이다.

나는 종종 형제들이 찬양하는 자리에서 마치 초상난 사람처럼 무거운 인상을 하며 굳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것은 다 결국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아니면 다른 사람이라도 어쨌든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를 볼 때나 옆에 있는 사람을 볼 때나 사람을 보면 아무 것도 되는 것도 없고 될 일도 없다. 사람을 볼 때 우리에게 감사가 나오고 희망이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 것도 안 되는 자리에서 뭔가 되는 것처럼 설치고 웃고 떠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육신의 실패와 무능을 이유로 해서 우리가 모였을 때 아무 말도 안하고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진실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를 내려놓고 근본적으로 자기를 낮춘다면 그때는 그리스도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자기와 다투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에게 그리고 인간에게 무언가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근본적으로 절망한다면 무언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다. 완전히 포기하고 빨리 확실하게 포기한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으며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우리 형제들이 자기의 되는 것도 말하지 말고 자기의 안 되는 것도 말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만 말하기를 원한다. 그가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것, 그리하여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지를 말할 수 있으면 가장 좋지만 그것이 미미하여 말할 것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영광과 그가 이루신 승리의 역사라고 반복해서 말하기 원한다. 그것을 찬송하고 흠모하고 노래하는 동안 우리가 그 세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는 이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 주님을 찬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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