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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육신적으로 아쉬운 것이 없는 사람은 영원한 세계에 관심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천국이 가난한 자의 것이 되는 이유는 사람은 꼭 가난한 자리에서만 천국의 부와 영광을 비로소 주목하게 되기 때문이다. 탕자가 돈이 있을 때는 (아버지 집을 어떻게든 떠나려고 생각하지) 아버지 집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돈이 다 떨어지고 돼지 먹이통을 서성거릴 때 비로소 아버지 집을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혹 부유한 사람이 의와 진리와 영생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나라(세계)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가 너무 커서 그것을 안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가진 것을 버리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육신의 부와 영적 부, 육신의 영광과 하늘의 영광, 이 둘이 서로 상충되지만 않으면 가진 것을 다 가지고 주님을 좇아가면 된다. 그런데 그것이 안되기 때문에 부득불 전에 가지고 있던 것들 중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안되는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는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하고 물었고 주님은 이에 대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대답하셨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사람을 건지시고자 작정하시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가 사랑하던 이전의 모든 것들을 기꺼이 버리고 더 큰 영광과 부를 좇도록 만드실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주님의 제자 베드로는 주님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다. 여러분은 이 질문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그때 할만한 합당한 질문이라고 느껴지는가 아니면 무언가 어색하고 엉뚱한 질문이라고 느껴지는가? 여러분은 이 질문에 깊이 공감하는가 아니면 왜 저런 질문을 하는가 하고 생각이 되는가? 내 안에는 이 두 마음이 다 있다. 나는 우리 안에 이 베드로의 마음이 있고 또한 주님의 대답에서 느껴지는 또 하나의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우리는 베드로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다. 베드로는 남이야 뭐라 할지 모르지만 주관적으로는 생각할 때는 그렇게 형편없고 가난한 자가 아니었다.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 볼 때는 그렇게 여겨주지 않겠지만 스스로 생각할 때는 꽤 괜찮은 사람인 것이다. 그런 그가 배와 그물과 가족을 버려 두고 주님을 좇은 것은 굉장히 어려운 선택을 한 것이며 그 들어가기 어렵다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다는) 천국 문을 통과한 것이다.

먼저 우리가 공감해야 할 부분은 베드로는 부자라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부자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주님 때문에 베드로나 우리나 가진 것들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스로를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 자기를 내려놓고 모든 일에 남의 말을 듣고 스스로 주장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엄청나게 겸손할 터인데 우리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자이다. 그런데 주님 때문에 지금 가난하게 되어 있고 가진 것이 없는 자가 되었다. 그러니 어쨌든 주님으로부터 이것을 보상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것들이 크든지 작든지 남들이 뭐라고 평가하든지 우리 자신에게는 그것이 다 소중하고 아까운 것들이다. 우리가 그것을 포기한 것은 그것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또는 더 많이 얻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 힘들게 그것들을 버리는데 성공했으니 즉 힘들게 천국으로 들어왔으니 이제 보상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베드로에게 공감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은 무엇인가? 나는 한편으로 베드로의 이 말에 심정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베드로의 이 말이 시의적절(時宜適切)하지 않는 엉뚱한 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 그런가? 바로 앞에서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베드로가 한 그런 일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천국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버렸건 그것은 베드로 자신의 마음과 의지로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인 것이다. 그러니 그 문제에 관한 한 수고 보상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받아야지 베드로가 받을 일은 아닌 것이다.

나는 복권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런 것에 단 돈 천 원도 투자하기 아까워하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런데 아내가 자꾸 사라고 강권해서 그것을 이기지 못해 만원을 주고 한 장을 샀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이 1등으로 당첨되었다. 나는 아주 어렵고 힘든 선택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천만 분의 일 확률밖에 없는 것을 만원이라는 아까운 돈을 내서 샀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볼 때는 전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며 그냥 돈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한 것이다. 어쨌든 그런 일을 했다. 그러나 누가 한 것인가? 내 가 아니고 내 아내가 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보상을 논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첫째는 내가 한 일이 아닌데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라는 식의 생색을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아내 곧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둘째는 그런 선택으로 인해 이미 복권에 당첨되었는데 즉 천국을 얻었는데 보상은 무슨 보상이냐 하는 것이다. 만원 버리고 10억을 받았다면 대가로 지불한 그 만원은 보상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천국은 새로운 삶의 장이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새로운 세계이며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삶이다. 베드로가 주님 때문에 잃은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전 세계, 이전 삶이다. 그것은 돈과 건강, 명예, 권세, 가족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에게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은 이것들이 삶의 수단이고 필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 안에서 받은 것이 무엇인가? 그는 천국 곧 새 세계, 새 삶을 받은 것이다. 거기에도 돈과 건강과 명예와 권세와 가족이 있다. 다만 더 완전한 형태로 바뀌어서 있을 따름이다. 천국은 삶 대신에 얻는 무엇이 아니며 천국은 생명 대신에 얻는 무엇이 아니며 천국은 사랑과 기쁨과 즐거움 대신 얻는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천국을 얻는다는 것은 그런 것을 더 완전하게 얻는 것이며 그런 것들을 영원하고 확실하게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오해하였다.

이러한 베드로의 질문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가복음 10:30에는 이것을 금세(今世)와 내세(來世)에서 받을 대가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今世에 있어 집과 형제와 ... 전토를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來世에 있어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세상에서 하늘의 영광을 부분적으로 맛보고 또한 그것과 함께 고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전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짓는 사람은 그 집이 완성되기까지는 이전 집보다 못한 집에서 살게 될 것이다. 조그만 셋방을 얻어서 살거나 아니면 친척집 문간방이나 비닐하우스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전혀 새 집의 영광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새 집의 꿈(설계도)를 가지고 있으며 (아파트라면) 모델 하우스를 방문하여 가끔 내가 들어갈 집의 아름다움에 대해 느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세상에서 영광과 고난을 함께 맛보는 삶을 산다는 실상이다.

그리스도인이 금세에서 (잃어버린 집과 형제 대신) 집과 형제를 받는다는 것은 대체로 교회 생활을 통한 위로와 공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집과 형제(가족)란 살 곳, 살 터전의 문제이다. 우리가 세상에 누리는 (하늘에 속한) 집은 이전의 죄악되고 이기적인 집(가족, 삶의 장)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불완전하다. 그것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못한 것은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여전히 육신(죄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벗고 새 몸을 입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현재 그것을 가지고 사니 불편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집은 곧 새 집으로 연결되는 집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이전의 헌 집이 아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새롭게 되고 영광스럽게 변화되어가는 집이요 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는 동안 받을 보상(위로와 공급)은 부분적인 것이요 전적인 것은 아니며 분명히 불완전한 것이다. 오직 주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하게 될 때 비로소 완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진행 중이며 성취와 완성의 과정 속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주님을 위해 버린 모든 것들을 세상에서 그대로(물질적, 세상적으로) 보상받을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것을 기대하면 결국 '내가 이렇게 주님을 위해 이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고 수고를 했는데 왜 내게 이것밖에 주어지지 않는가?'하는 불만이 생기게 된다.

주님의 제자들은 아마도 자신들과 다른 유대인들을 비교하면서 보상에 대해 생각을 했을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도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께 대해 자기들과 이방인들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무슨 보상을 받는가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이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던 사람들은 아마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자기들이 일찍부터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대해서든지 하나님께 대해서든지 자기가 섬긴 것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섬겼다면 바로 하나님 자신이 그들에게 보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주님을 좇는 자에게 주님 자신이 상급과 보상이 되지 못한다면 그가 세상에서 달리 받는 보상이라는 것(집과 재물과 가족과 명예 등)은 너무나 보잘것없고 허무한 것이 될 것이다. 누구든지 주님 자신을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며 그 생명을 누리는 것을 상급과 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가 반드시 억울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며 불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 자신이 바로 그의 상급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창15:1)

주님 자신이 우리의 상급이며 보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주님은 20장에서 포도원의 품꾼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를 통해 주님은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보상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완전한 보상이 되지 못함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비유에서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보상은 하루 품삯으로 준 한 데나리온이다. 그러나 그 날 일한 모든 품꾼들이 다 똑 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을 위해 각각 다른 처지에서 힘써 수고한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보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주인은 오후 5시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지불했다. 만일 주인이 먼저 온 사람들에게 순서대로 돈을 주었다면 그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이 얼마를 받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므로 불만을 가지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인은 앞의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일부러 뒤에 온 사람부터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런 것들이 참된 보상이 될 수 없으며 오직 일생을 주님을 위해 바친 사람들에게 돌아갈 참된 보상은 그들이 주님과 함께 산 삶 자체라는 사실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다. 길거리에 서서 놀고 있던 건달을 포도원의 일군으로 받아들여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 준 것이 바로 그 인생에 가장 큰 보상이 되는 것이다. 물질적, 현실적인 보상은 오직 우리로 하여금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끝까지 따르도록 위로하고 고무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주시는 것일 뿐 주님 자신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보상이다. 또 우리의 보상 중 하나는 주 안에서 형제들과 교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생명과 기쁨과 위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과 서로 사랑하며 교제할 때 얻는 생명과 기쁨과 위로는 때로 고통스럽고 수고로운 우리 삶 전부를 보상할 만큼 크고 위력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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