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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로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으니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주님은 그에게 주를 좇은 사람은 우선 영생을 얻을 것이며 또한 천국이 임할 때 천국의 영광과 권세를 얻을 것이며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위로와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주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보상을 자세히 뜯어보면 결국 다 한 가지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첫째는 영생인데 영생이란 영원한 삶을 말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복된 삶이다. 복된 삶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권세로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그를 섬기며 그를 위해 가진 것을 잃기도 하고 욕을 먹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새로운 공급을 받으며 위로를 받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삶이고 질 높은 복된 삶이다.

둘째는 천국의 영광과 권세를 얻는 것인데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날에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과 권세를 얻어 만국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첫 열매이고 이스라엘의 대표이므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린다는 약속을 얻었다. 우리도 우리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바로 영생이다. 세상이나 우리나 한 번 죽는 것은 다 똑 같지만 그 후에 심판을 받아 멸망하느냐 아니면 주님과 함께 만국을 다스리는 자가 되느냐 하는 데 가서는 차이가 있다. 영생은 영원히 망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복된 삶을 사는 것이다.

셋째는 세상에서 집이나 가족이나 땅을 보상받는다는 것 즉 세상에서도 그때 그때 필요한 하나님의 위로와 공급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국을 미리 경험하는 것이요 천국의 일부를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나무 열매가 되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천국 삶의 원리이다. 이것이 곧 천국 백성의 영광과 권세요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을 종합해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보상은 천국을 누리고 영생을 누리고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천국을 누린다는 말이나 영생을 누린다는 말은 다 하나님을 누린다는 말과 같은 말이며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이란 하나님의 세계를 말하며 영생이란 하나님의 생명 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천국, 영생 또는 하나님을 누린다는 것의 핵심 내용, 가장 중요한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만국을 다스리는 것이나 때를 따라 하나님의 위로와 공급을 체험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진리와 평강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 생명으로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형상을 본 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 되고 그의 성품과 뜻을 따라 사는 자가 된다는 이 자체가 가장 큰 복이고 보상인 것이다. 죄인이 의인이 되고 불평과 원망의 사람이 감사와 찬송의 사람이 되고 저주의 사람이 복을 누리며 복을 끼치는 사람이 되는 것 이상으로 큰 보상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를 좇는 자의 가장 큰 보상임을 모른다면 그는 결국 실망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를 좇는 일을 중간에 그만두게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누리는 삶이란 인격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그 핵심 내용으로 한다. 어떤 변화가 있는가? 항상 두려워하고 걱정하던 사람이 평안하고 안식하는 사람이 되고 항상 불평하고 불만스럽던 사람이 감사하고 만족하는 사람이 되고 항상 누군가를 원망하고 폄론하던 사람이 관용과 여유를 나타내게 되고 어디서도 사랑 받지 못하고 인정 받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항상 외롭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거함으로써 가족을 얻게 되며 세상이 두렵고 사람이 두렵고 자기가 부끄러워서 세상을 피하고 사람을 피하여 도망 다니던 사람이 세상에 당당히 나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며 자기를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보상이다. 다른 것들은 작은 것이며 이것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주님을 따르기도 힘들지만 주님을 따르다가 나중에 크게 실망할 수 있으며 큰 낭패를 당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 큰 보상을 기대하고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 일을 하는 동안 내내 나중에 받을 보상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가보니 별 다른 보상이 없는 것이다. 아니 있기는 있는데 그렇게 굉장한 것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또 자기보다 훨씬 뒤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 곧 일을 자기보다 훨씬 적게 한 사람이 보상을 받는 것을 보니 자기와 별 차이가 없더라는 것이다. 이때 그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은 실패한 것이다. 그의 실패는 주님을 따르는 동안 아무 것도 누린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최후의 보상을 받을 때까지 그는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 것이며 단지 나중에 얻을 복을 위해서 지금은 별로 복되지 않은 세월을 사는 것이다. 이처럼 억울하고 원통한 일은 없다.

주님 자신이 우리의 상급이요 보상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된다. 이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주님은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의 품꾼 비유를 들어 이 사실을 설명하셨다. 포도원을 가지고 있는 한 농부가 자기 밭에서 일할 일군을 구하기 위해 새벽 6시에 장터로 나갔다. 거기서 농부는 일거리를 찾고 있는 몇 사람을 일당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하고 포도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오전 9시에도 농부는 장터로 가서 일 없이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적당한 품삯을 주기로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보냈다. 농부는 이와 같이 12시와 3시와 심지어 일  마치기 한 시간 전에 5시에도 장터에 나가서 품꾼들을 고용하여 포도원으로 보냈다.

품꾼들은 6시가 되어 일을 마치고 주인으로부터 약속대로 일당을 받았다. 주인은 맨 나중에 온 사람(오후 5시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지불했는데 그들은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먼저 온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자기들은 최소한 한 데나리온보다는 더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도 똑 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다. 그러자 오후 3시 이전에 고용된 사람들은 다 같이 주인의 처사가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며 주인을 원망했다. 이에 주인은 그들에게 "나는 당신들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약속했다. 그러므로 잔소리하지 말고 당신들 몫이나 받아가라 내가 마음이 좋아서 내 것을 가지고 늦게 온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데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냐" 라고 하며 그들을 나무랐다. 그 말을 들은 먼저 온 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비유를 통해 주님은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보상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완전한 보상이 되지 못함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참된 보상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한 그 세월 자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물질적 보상은 왜 충분한 보상이 되지 못하는가? 그것은 일한 양은 다른데 보상이 같았기 때문이다. 포도원의 모든 품꾼들은 다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하나님을 위해 각각 다르게 봉사한 사람들이 똑 같은 보상을 받았으니 그것이 어찌 진정한 보상이 되겠는가? 주님은 비유에서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강조하셨다. 주인은 오후 5시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지불했다. 만일 주인이 먼저 온 사람들에게 순서대로 돈을 주었다면 그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이 얼마를 받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앞의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일부러 뒤에 온 사람부터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다.

일생을 주님을 위해 바친 사람들에게 돌아갈 유일한 참 보상은 그들이 주님과 함께한 세월(삶) 자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길거리에 놀고 서 있던 건달을 포도원의 일군으로 받아들여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 준 것이 바로 그 인생에게 가장 큰 상이고 보상인 것이다. 물질적 육신적 보상은 오직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도록 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주시는 것일 뿐이다. 오직 주님 자신만이 우리의 진정한 보상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과 안식, 형제들과의 사랑 안에서의 삶 이것이 천국의 내용이고 또한 미래의 천국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자의 보상이다.

천국의 보상은 차이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많은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상급에는 차등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보상에는 차이가 있는가 없는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 한 데나리온씩 받는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그 보상에는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질적인 것이 되었든 영적인 것이 되었든 보상은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아버지의 풍성을 가져다 누리는 것이다. 아버지가 한량없이 풍성한 분이고 자녀들을 똑 같이 사랑하시는데 자녀들 간에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우리는 언제나 모자라는 세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라도 더 가지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통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천국은 그런 세계가 아니다. 거기는 다 얼마든지 많이 가질 수 있고 또 많이 가지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닌 세계이다. 우리의 품삯은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대로 천국의 기쁨과 안식과 위로이다. 우리가 천국에서 형제들과 함께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릴 때 즉 거기서 기쁨과 안식을 누릴 때 어떤 차별이 있겠는가? 그리고 어떤 차별이 있어야 하겠는가? 아무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있을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사실상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일도 없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도 없다. 다 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며 다 같이 하나님의 거룩하고 복된 생명을 충만하게 누릴 따름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누림에 있어서 앞과 뒤, 높고 낮음이 어디 있겠는가? 오직 어리석은 자, 세상적인 정신을 가진 자가 천국에서도 세상에서처럼 헛된 영광을 취하기를 기대하며 남보다 높아지고 남보다 많은 것을 받으려 하다가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지 않음을 발견하고는 자기가 나중 되었다고 느낄 따름이다.  

그렇다면 차이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차이는 이 땅에서 얼마나 주님을 누렸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과거의 문제이다. 물론 미래에도 하나님이 그와 깊이 연합한 자를 그렇지 않은 자보다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방법으로) 더 만족케 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미 그가 주님과 보낸 이 땅에서의 세월이 훌륭한 보상이요 차별화 된 상이었다는 사실이다. 아침 6시부터 인생을 주님과 함께 보낸 사람은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인생을 주님과 함께 보낸 사람과 그 인생이 같을 수 없다. 후자는 인생을 거의 낭비한 것이며 기쁨과 보람이 없는 인생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아침부터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 세월이 말할 수 없이 복되고 의미 있는 세월이었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잘 기억하기 바란다. 일생을 통해 주님을 섬긴 자들이 받을 수 있는 진정한 보상은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주님과 관계를 가지고 산 삶 자체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또한 주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의 집에서 거하면서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었던 우리 인생 자체가 진정한 보상인 것이다.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상급과 보상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젠가는 실망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땅에서 주님의 보상을 그렇게만 기대하고 있는 사람은 주님을 더 이상 따르지 못하고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 우리 중의 99%는 이 비유에 나오는 오후 5시에 고용된 사람이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더라도 의미 있고 상급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있는가? 우리 인생이 써 주는 사람도 없고 보자는 사람도 없이 길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우리를 불러 자기 집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함께 살며 일하게 해주신 그 분 자신이 바로 우리의 영원하고도 완전한 보상이다. 구약 아가서는 술람미 여인이라고 하는 검고 보잘 것 없는 한 여인을 왕이 받아들여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로 삼고 깊은 관계를 가지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책이다. 거기서 술람미 여인은 왕을 위해 죽기까지 봉사하고 섬기는 삶을 살지만 다른 무엇 보상도 필요로 하지 않고 또한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왕 자신을 죽도록 원하며 그를 유일하고도 완전한 보상으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녀는 끝에 왕에게 말한다. "너는 나를 도장처럼 마음에 품고 팔에 새기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트기는 지옥처럼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재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가8:6,7)

시편 84편에서 고라 자손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직이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우리는 사실 우리의 일상 삶에서 이와 같은 실제를 항상 경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청년이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있다고 하다. 그는 여자를 위해 심지어는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항상 여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수고를 한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그러한 수고에 대해 무엇으로 보상을 받기를 원하겠는가? 그가 수고비를 요구하겠는가? 어떤 다른 댓가를 바라겠는가? 그는 다른 아무 것도 바라거나 보상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받기를 바라는 진정한 보상은 오직 그 여자 자신일 것이다. 또 부모가 자식을 키우고 수고를 함에 있어서도 부모가 자식에게서 무슨 보상과 댓가를 바라겠는가? 자녀를 키우며 즐거워하며 자녀가 잘 자라는 것 자체가 바로 보상이다.  

창세기 15:1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우리의 상급이요 보상이 되면 우리는 다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며 완전히 만족하며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완성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한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을 소망하는 소망을 가져서는 안된다거나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단지 미래적인 보상을 기대하는 소망만으로 이 땅에서 고난 중에 주님을 끝까지 기쁘게 따르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현재적인 위로와 보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재적인 보상도 우리로 하여금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끝까지 따르도록 고무하는 보상은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보상보다는 오직 주님 자신이 나의 사랑이 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적인 보상이다.

또한 주 안에서 형제들과의 교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보상이야말로 진정한 보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과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섬기며 수고할 때 얻는 기쁨과 만족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수고로운 우리 삶 전부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천국을 미리 맛보고 누릴 수 있는 사랑의 나라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교회가 마치 단지 어떤 목적을 위해(일을 하기 위해)서만 조직된 단체인 양 일하는 데만 주력할 것이 아니라 어떤 뚜렷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의 공동체로서 관계를 가지도록 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과 근본적으로 생명의 관계, 사랑하는 아버지와의 교제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못하다면 결국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일군들처럼 하나님의 집에 살면서 그의 뜻을 따라 일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현재나 미래의 마지막 날에 있게 하나님의 보상에 불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께 실망하여 일찌감치 하나님의 집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모두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함으로써 주님 자신을 통해 주님을 따르는 여러분 삶의 보상을 완전하게 받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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