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주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기 전에 미리 제자들에게 그런 일이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 번 예고해 주셨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마17:22,23)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20:17-19)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마26:2)

또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이런 예고도 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마26:2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마26:31)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26:34)


이 말씀들을 가지고 주님이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것을 종합하면 이렇다.

첫째,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 중 한 사람의 손에 팔려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질 것이며 그들에 의해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이다.

둘째, 주님은 죽은 지 제삼 일째 되는 날에 부활하실 것이다.

셋째, 제자들은 주님이 잡히고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게 될 것이다.


주님은 왜 이런 예고를 하셨을까? 그리고 주님은 왜 안식일 전에 죽으셨을까? 그리고 주님은 죽은 지 삼일 째 되는 날 곧 안식 후 첫 날에 다시 살아나셨을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세 가지 주제이다.
 
주님이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미리 예고를 하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들로 이런 주님의 미래 즉 곧 닥쳐오게 될 주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기 위함이다. 문제는 제자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려면 이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주님만의 일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 자신의 운명이요 모든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에서 항상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마10:16,17)

주님은 공연히 죽으신 것이 아니라 세상들의 미움을 받아서 세상 손에 죽은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우리는 이 사람과 도저히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하는 판단을 내림으로써 그들 손에 죽은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세상에서 아무 분깃이 없으며 세상으로부터 결코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장로들과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은 세상의 비주류인 죄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세상의 지도자들이며 대표자들이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인간 본성이 그렇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세상으로부터 언젠가는 버림을 받고 죽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이처럼 세상에서 나그네요 거절되고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같은 생명을 가진 형제들끼리 서로 받으며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어차피 외롭고 동화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새 생명을 받은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3:8-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요15:17-21)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죽음에 대해 미리 말씀하신 것은 역설적이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다.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원리에 따르면 세상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며 따라서 세상에서 우리를 사랑할 사람은 우리 믿는 이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와 생명이 다르므로 우리를 사랑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와 길이 다르고 운명이 다르므로 우리를 받아주고 싶어도 받아줄 수 없으며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며 사랑할 수도 없다. 우리를 사랑하고 위할 자는 하늘에서는 오직 하나님이며 땅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20:20,21)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마26:33,35)

이것이 그들의 반응이다. 이 얼마나 엉뚱하고 얼마나 무지한 반응인가!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자리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가 세상에서 영원히 살 자인 것처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보존하고자 하였으며 세상 영광을 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위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서 죽어야 할 자들이며 세상에 대해서 죽어야 할 자들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서도 죽어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느 면으로 보든지 십자가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하나님께는 세상(육)에 속한 무능한 죄인이요 세상에 대해서는 미움 받는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어느 쪽으로 보든지 죽어야 할 운명인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끝내고 새롭게 하기 위해 주님이 죽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안될 이유이다.


이제 앞의 모든 사실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안식일 전에 죽으시고 제 삼일 곧 안식 후 첫 날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주님이 안식일 전에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전의 모든 것들을 끝내기 위해 오신 분이다. 안식일 전날이란 제 6일 곧 사람의 창조가 이루어진 날이다. 이것은 창조의 마지막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이 되기 바로 직전에 죽으신 것은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들 특히 모든 인생들을 끝내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곧 옛 인류의 폐기를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안식 후 첫 날 곧 모든 옛 창조의 세계가 다 끝나고 지나간 뒤에 다시 살아나셨다. 주님은 부활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시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여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은 실패의 죽음이 아니며 슬프고 저주스러운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기 위한 지극히 복되고 은혜로운 죽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고난과 희생은 우리 자신의 것이며 우리의 길과 운명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주님의 뒤를 이어 세상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바치게 하실 것이다. 그럴 때 그 고난과 죽음도 동일하게 복되고 가치 있는 고난과 죽음이 될 것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59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마22:15-22) / 2006. 4. 30 이상봉 2010.04.30 3633
158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 비유 (2) (마22:1-14) / 2006. 4. 23 이상봉 2010.04.30 3598
157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 비유 (1) (마22:1-14) / 2006. 4. 16 이상봉 2010.04.30 3524
156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 (2) (마21:33-46) / 2006. 4. 9 이상봉 2010.04.30 3574
155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 (1) (마21:33-46) / 2006. 4. 2 이상봉 2010.04.30 3569
154 주님의 권세의 근거 (마21:23-46) / 2006. 3. 26 이상봉 2010.04.30 3630
153 어떤 능력 어떤 권세인가 (마21:17-32) / 2006. 3. 19 이상봉 2010.04.30 3614
152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 (마21:17-22) / 2006. 3. 12 이상봉 2010.04.30 3620
151 성전을 정결케 하심 (마21:12,13) / 2006. 3. 5 이상봉 2010.04.30 4659
150 주님께 드려지는 인생 (마21:1-11) / 2006. 2. 26 이상봉 2010.04.30 3689
149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 (마21:1-11) / 2006. 2. 19 이상봉 2010.04.30 3996
148 소경의 복됨 (마20:29-34) / 2006. 2. 12 이상봉 2010.04.30 3539
147 자기의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함 (마20:20-28) / 2006. 2. 5 이상봉 2010.04.30 3742
» 죽고 부활할 운명 (마20:17-19) / 2006. 1. 29 이상봉 2010.04.30 3595
145 주님을 좇은 대가 (2) (마19:23-20:16) / 2005. 1. 22 이상봉 2010.04.30 3564
144 주님을 좇은 대가 (1) (마19:23-30) / 2005. 1. 15 이상봉 2010.04.30 3702
143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음 (마19:16-26) / 2006. 1. 8 이상봉 2010.04.30 3828
142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드러내심 (마19:16-22) / 2006. 1. 1 이상봉 2010.04.30 4069
141 주님의 오심의 의미 (요1:9-13) / 2005. 12. 25 이상봉 2010.04.30 3575
140 속박과 자유 (마19:9-12) / 2005. 12. 18 이상봉 2010.04.30 3937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