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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제자들에게 자신이 거기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잡혀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며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그 어머니와 함께 주님께 와서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20:20,21)

주님께 이 부탁을 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친자매로 추정되는 살로메이다.(막15:40, 마27:56) 그녀는 주님을 가까이 따르며 마지막까지 주님을 수종들던 헌신적인 여인들 중의 한 사람이다. 만일 살로메가 주님의 모친 마리아의 친자매라면 그녀는 주님의 이모이며 그 아들인 요한과 야고보는 주님의 이종 사촌이 될 것이다. 주님이 요한을 특히 사랑하신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마 그의 나이가 가장 어렸기 때문이거나 가까이서 함께 자란 친척이라는 점이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주님과 요한 또는 야고보가 개인적으로 가까웠든지 아니면 주님의 집안과 요한의 집안이 가까웠든지 간에 가까웠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주님께 와서 이런 부탁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아들들을 위해 주님께 무엇을 구했는가? 그녀는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주님이 앉으실 보좌의 좌편과 우편에 그의 아들들이 앉게 되기를 원했다. 요한과 야고보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권세 있는 지위를 얻고자 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세상 영광과 권세였다.  

이러한 소망은 오늘날에도 많은 신자들 가운데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드러나게 구하든 드러나지 않게 구하든 사람들은 항상 주님께 이것을 구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과 야고보처럼 자기를 이러저러한 영광의 자리에 앉혀달라고 구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무개 아무개를 그 자리에 앉히지 말아달라고 구하고 있다.

주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주의 나라'라는 것은 두 가지 영역을 다 포함한다. 하나는 장차 임할 영원한 천국 곧 세상 끝에 나타날 천국이고 또 하나는 지금 있는 교회 또는 세상이다.

교회를 주의 나라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세상을 어떻게 주의 나라 또는 천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세상도 하나님의 다스림과 간섭을 받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저 땅만 천국이 아니라 이 땅도 천국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으로서의 세상이란 세상 사람들이 엮어서 만들어내는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땅에서의 삶, 이 세계를 가리킨다. 이것(세상)을 굳이 천국에 포함시키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 천국을 특히 사모하고 흠모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죽은 후의 천국에서 이런 저런 영광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망하고 구하는 것은 이 땅에서 영광을 얻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든 세상이든 여기서 영광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죽은 후에 어떤 영광과 권세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동안 여기서 그들의 육신이 영광스럽고 잘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이 땅에서 그들의 육신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살핌을 받아서 영광스럽게 되고자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주의 나라에서 그것을 얻게 해 달라고 구하는가? 그냥 세상에서 영광을 얻게 해 달라고 구하지 않고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께 그냥 세상에서 영광과 권세를 누리게 해 달라고 부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세상에서 영광을 얻기를 원하지만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히 그렇게 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으니까 주의 나라에서 영광을 얻게 해 달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말은 어떻게 하든지 실제는 세상에서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나라는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이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의의 나라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활약할 수 있고 권세를 부릴 수 있는 세상이다. 즉 그들이 원하는 영광은 육신의 영광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나 교회에는 육신적인 사람이 소망할 만한 육적인 영광의 자리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가 세상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일이 사랑과 섬김의 원리로 이루어진다. 어머니가 아기를 돌보는 것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겉으로 보면 주관하고 다스리고 권세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이며 천국의 일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내가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섬으로써 영광스럽게 되는 일도 없고 내가 작고 미약해서 낮아지거나 남에게 부끄럽게 되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세상적인 영광과 권세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며 대단히 잘못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과 야고보 및 그들의 어머니에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대답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지금 주님이 누구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이 방금 자기들에게 십자가의 길에 대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길이고 영광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길, 주님의 영광은 다른 사람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여 섬기는 데 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사람들을 구원하고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만들기 위해 세상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도 주님의 제자들은 이에 대해 아무 인식도 없는 것이다. 그들은 크게 오해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속적인 영광과 권세를 얻으려고 서로 경쟁하고 다투는 가운데서는 임할 수 없으며 오직 주님과 제자들의 희생과 섬김을 통해서만 임할 수 있는 나라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 뿐 아니라 오늘날의 제자들도 하나님의 실체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세계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요한과 야고보는 분명히 주님의 제자들이며 세상이 아니라 주의 나라를 소망하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과 권세를 얻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실제로는 세상 영광과 세상 권세를 구했다. 그것은 잘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권세를 부리고 자기를 높이는 나라가 아니다. 이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행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죽고 없어진 나라이다. 사람의 거짓된 생각과 마귀에게 속아서 헛된 일을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다 없어진 나라이다. 그러므로 (요한과 야고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남보다 높아지겠다고 발버둥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나라이다.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지고 없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만일 사람이 스스로 높이며 다른 사람들을 부리는 일이 통하는 세계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세상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영광은 어떤 것인가? 목사나 장로 자리에서 신자들의 인사를 받으며 지시를 내리고 가르치며 권세를 행사하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를 그런 자리로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직분을 육신적으로 영광스러운 자리로 알고 추구한다. 목사야 젊을 때 방향부터 그쪽으로 정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몫이고 남은 것은 장로나 권사 같은 자리인데 이것은 늦게라도 얻을 수 있으니 그것을 희망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애를 많이 써서 그 자리를 얻는다. 그리고 거기서 권세를 부리며 대인(大人) 행세를 한다.

이것은 그들이 지금 서 있는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이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마20:25) 이런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곳은 간판을 하나님의 나라나 교회라고 붙이고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세상이다. 세상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 세상 사람이 있는 곳이 세상이고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이란 무엇인가? 세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 사람이지 세상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세상이요' 라고 하면 아주 싫어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교회를 보고 '당신들 교회는 사실 교회가 아니고 세상이요' 라고 하더라도 아주 싫어할 것이다. 이것은 그들 안에서 지식이 있다는 증거이다. 세상은 좋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좋다는 지식이며 세상적인 삶은 합당치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지식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자기를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을 싫어할 리가 없다. 만일 그들에게 이런 지식이 있다면 그들은 세상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좋지 않게 여긴다면 그것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세상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기를 쓰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으니 이것이 모순이다. 세상이 좋고 세상 것이 좋으면 그리고 가야 한다. 그것을 좋아하면서 왜 세상이라고 하면 싫어하는가? 그것은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세상이 옳으면 세상을 좋아해야 하고 세상으로 가야한다. 그리고 세상이 틀렸고 하나님이 옳고 그 나라가 옳다면 그것을 좋아해야 하고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주님은 자기가 어떤 분인지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주님이다. 이런 주님이 좋아서 따른다면 주님과 함께 이 길로 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길로 가야 한다.

주님은 요한과 야고보에게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주님이 마시려는 잔이 무엇인가?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 주님의 잔은 바로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주님이 마신 잔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주님은 그 쓴잔을 마신 것이다. 주님뿐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다 각기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나라에 참여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주 예수님이 가장 크시고 으뜸의 자리에 앉으신다. 주님은 만 왕의 왕이요 만인의 주가 되신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람들을 위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시며 모든 사람을 섬기셨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낮아져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섬겼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높은 분이 되신 것이다. 그는 스스로 높아진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높이셔서 높아진 것이고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높인 것이다. 가장 사랑 받는 사람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우리 곁에는 권력이 있는 사람도 많고 잘난 사람도 많고 부유한 사람도 많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도 많지만 우리가 명절이나 가장 기쁜 때에 찾는 사람은 우리를 위해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어머니나 또는 그러한 사람이다. 그들은 전혀 권세자가 아니며 높은 자리에 있지 않지만 사랑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그러한 대접을 받는 것이다.

어릴 때 아기는 엄마가 높은 줄 모른다. 엄마를 자기 종으로 안다. 시키는 대로 다 하고 하자는 대로 다 하니까 그렇게 아는 것이다. 그러다가 초등학생이 되면 엄마가 크게 보인다. 왜냐하면 엄마는 억지로 공부를 시키고 다른 하기 싫은 일도 강제로 시키기 때문에 그렇다. 말을 안 들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엄마가 돈과 모든 것을 다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는 이제 아이에게 권력이고 권세자가 되었다. 그래서 크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다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해서 스스로 돈도 벌고 자기 마음대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다시 엄마가 작게 보인다. 왜냐하면 이제 자기는 힘이 있고 엄마는 늙고 힘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제 최종적으로 자기도 나이가 들고 세상에서 누가 쳐다 봐주는 사람이 없는 때가 되면 다시 엄마가 그립고 크게 보인다. 왜 그런가? 그때는 엄마가 다시 힘이 생기고 내게 많은 것을 해 주기 때문인가?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다시 큰 자가 되는 것은 그가 내게 소중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한 번도 권력을 행사하거나 자기 자리를 낮은 데나 높은 데로 이리 저리 옮긴 적이 없다. 그런데도 권세자가 되었다가 안 되었다가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의 영광과 권세는 어디서 왔는가? 바로 자식이 그를 높이 보고 높여서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어머니가 스스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자가 어머니를 높여서 높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모든 생명의 세계에서 영광과 권세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음으로써 오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언제나 섬김에서 온다. 따라서 어머니라는 자리가 자동으로 영광과 권세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어머니라도 어머니답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서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섬기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결코 권세를 얻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도 영광이 없을 것이고 경로당에서 젊은이들이 합동으로 세배를 하고 꽃을 달아주어도 영광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은 어떤 영광을 구하고 있는가? 그들은 참으로 자기의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주님은 요한과 야고보에게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때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들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세상의 죄인들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가? 그것은 놔두고라도 자기 영혼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으며 자기 육신의 욕망이라도 꺾을 수 있는가? 어떻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이며 무엇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들은 자기를 전혀 모르고 있다. 전에 베드로가 주님께서 장로들과 제사장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며 주님의 발을 붙잡은 것처럼 지금 요한과 야고보 역시 그렇게 할 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들은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의 운명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운명을 모르니 자기들의 운명도 모르는 것이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마26:33,34)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13:33-38)

주님은 왜 제자들이 지금은 주님을 따라올 수 없다고 했는가? 주님은 왜 그들이 지금은 주님이 가시는 곳에 올 수 없으며 도리어 배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들이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떻게 할 것은 지금 어떻게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제자들은 주님의 발을 씻지 않았다. 그것은 누가 크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그들이 다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발을 먼저 씻으러 나서는 그가 가장 작은 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먼저 나서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나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며 서로 섬기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야 내 제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3-17)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3-35)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자가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겠으며 주님을 사랑할 수 없는 자가 어떻게 자기 목숨을 버리고 주님을 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자기 생각이고 희망이고 망상일 따름이다. 제자들은 서로 경쟁하여 누가 크고 누가 높은가를 다투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 어떻게 주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그것이 죽는 자리든 영광의 자리든 지금은 그들로서는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그들은 지금은 가지 못하더라도 결국 주님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주님은 결국 그들이 그렇게 될 것을 아셨다.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요13:36하)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눅22:31-34) 이 주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결국 주님을 따르게 될 것이다. 그는 약함과 배신과 실패의 자리에서 돌이키게 될 것이며 주님이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신 것처럼 베드로 역시 형제들을 굳게 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언젠가는 주님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들의 길과 운명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들은 아직 성령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지 않으며 자기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육신대로 행하고 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4-28)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24-30)

누구든지 주님의 나라에서 크게 되고 으뜸이 되기를 원한다면 역설적으로 가장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 그는 반드시 주님과 같이 자기를 드려 종처럼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세상에서는 힘과 권세를 가진 자가 큰 자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자 곧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겨서 소중히 여김을 받는 그가 큰 자이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 곧 생명 안에서 소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 그의 섬김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그가 없으면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이다. 지식이나 돈이나 권력으로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려 하는 사람은 천국에서 아무 분깃이 없으며 아무 영광이 없을 것이다.

교회는 통치자들과 영웅들과 귄세자들을 두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곳이다. 교회에는 아무 권세자도 영웅도 없다. 교회에는 계급적으로 지배하며 다스리는 자가 없다. 오직 섬기는 자가 있을 뿐이다. 물론 교회에도 사람들을 가르치며 다스리는 사역은 있으며 그러한 직분도 있다. 그러나 교회의 다스림은 사람의 임의대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복종하여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것뿐이다. 교회의 다스림은 섬김의 한 종류이며 그것도 언제나 다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기도 하고 다스림을 받기도 한다. 필요에 따라서 서로 섬기며 피차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사람은 다 형제의 입장에 있는 것이며 그 자리에서 사랑과 봉사로 행하며 각각의 은사를 따라 서로 섬겨야 하지 결코 다른 사람들 위에서 이름을 날리거나 군림할 수 없다.

교회는 세상을 포함할 수 없지만 실제로는 주님이 예견하신 대로 세상이 들어왔다. 그리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여러 종류의 계급이 생겼는데 천주교와 같은 곳에는 교황과 주교, 신부와 같은 권세자 계급이 있고 개신교에도 목사나 장로처럼 실제적으로 성도들 위에서 군림하는 계급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감독이나 장로, 목사, 교사는 다 영적 은사를 말한 것이지 계급이나 제도적 직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런 직분이 은사와 무관하게 제도적으로 임명되고 선출되어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하여 가장 육적인 목사가 가장 영적인 목수를 가르치고 지배할 수 있으며 가장 세상적인 성직자가 가장 경건한 평신도를 가르치고 다스리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와 요한처럼 교회에서 자기의 개인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장로나 집사나 기타의 직분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붙은 참 교회로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또는 세상에서 썩어질 영광과 권세를 추구하는 모든 헛된 일들을 버리고 오직 머리이신 주님께 복종하며 각기 받은 은사대로 서로 섬김으로써 위로부터 오는 기쁨과 영광과 권세를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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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성전을 정결케 하심 (마21:12,13) / 2006. 3. 5 이상봉 2010.04.30 4659
150 주님께 드려지는 인생 (마21:1-11) / 2006. 2. 26 이상봉 2010.04.30 3689
149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 (마21:1-11) / 2006. 2. 19 이상봉 2010.04.30 3996
148 소경의 복됨 (마20:29-34) / 2006. 2. 12 이상봉 2010.04.30 3539
» 자기의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함 (마20:20-28) / 2006. 2. 5 이상봉 2010.04.30 3742
146 죽고 부활할 운명 (마20:17-19) / 2006. 1. 29 이상봉 2010.04.30 3595
145 주님을 좇은 대가 (2) (마19:23-20:16) / 2005. 1. 22 이상봉 2010.04.30 3564
144 주님을 좇은 대가 (1) (마19:23-30) / 2005. 1. 15 이상봉 2010.04.30 3702
143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음 (마19:16-26) / 2006. 1. 8 이상봉 2010.04.30 3828
142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드러내심 (마19:16-22) / 2006. 1. 1 이상봉 2010.04.30 4069
141 주님의 오심의 의미 (요1:9-13) / 2005. 12. 25 이상봉 2010.04.30 3575
140 속박과 자유 (마19:9-12) / 2005. 12. 18 이상봉 2010.04.30 3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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