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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마21:1-11)


주님은 예루살렘 근처에 왔을 때 제자들에게 나귀를 준비해 오도록 시켰고 이에 제자들이 나귀와 새끼 한 마리를 몰고 오자 그 중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눅19:35, 요12:14) 이 무렵 유대인들은 주님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만나보고자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소문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요12:9-15)

그래서 주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고 그들은 큰 기쁨과 환호로 주님을 옹위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나사로의 이적을 비롯하여 주님이 행하신 역사를 보고서 그의 능력에 대해 확신을 했기 때문이며 그런 주님이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왕과 구원자로 등장하시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가시는 길에 자기들의 옷과 나뭇가지를 폈고 주님의 앞과 뒤에서 따르며 호산나를 외쳤다.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소서(save, we pray you) 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유대인들은 주님이 그동안의 자기들의 괴로운 생활을 끝내주시고 영광스런 세계를 열어주실 것으로 기대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로마 군대를 쫓아내거나 이스라엘의 무능한 지도자들을 축출하지도 않고 억압과 가난 속에서 허덕이는 그들을 건지기 위해 능력으로 떨쳐 일어서기는커녕 도리어 허무하게 장로들과 제사장들에게 잡히게 되자 이전의 기대와 찬송은 실망과 분노로 바뀌고 말았다. 이에 그들은 빌라도의 마지막 법정에서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왜 주님께 실망을 했는가? 그것은 그들이 주님께 잘못된 기대를 가졌으며 헛된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분명히 사람들의 기대와 같이 세상에 왕과 구원자로 오셨다. 그러나 그 왕은 세상적 왕, 정치적 왕이 아니라 진리의 왕이요 생명의 왕이다. 요한복음 18:33-38을 보면 마지막 재판정에서 빌라도가 주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주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답하셨고 이에 다시 빌라도가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주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말을 듣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왕은 왕이되 사람들의 육신적 소망을 만족시켜주거나 환경을 변화시켜서 구원하는 왕이 아니라 진리를 나타내며 생명을 주심으로써 사람들을 구원하는 왕이며 또한 주님의 이러한 역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주님이 왕이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주님에 대해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어머니를 동원하여 주님으로부터 영광의 자리를 확보하고자 했던 야고보와 요한처럼 주님이 그들에게 세상적 육신적 영광을 안겨줄 분인 것처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를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실망하게 될 것이며 빌라도 법정의 유대인들처럼 주님을 죽이라고 외치게 될지도 모른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주님은 어린 나귀를 타셨다. 어린 나귀란 사람이 탈 수 있는 동물 중 가장 약하고 작은 것이다. 주님이 걸어서 입성하지 않고 나귀라도 타신 것은 그가 세상에 왕으로 오셨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말을 탈 수도 있었지만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이 왕이 세상의 왕들처럼 권세를 부리며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 부드럽고 겸손하며 자기를 바쳐 사람들을 섬기는 생명의 왕이요 자기 백성에게 생명과 평화를 주는 왕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말은 권세와 힘을 가진 자, 싸워 이겨서 군림하는 자를 상징하지만 어린 나귀는 겸손하고 부드러운 인격의 소유자, 섬김과 희생으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것은 스가랴 9:9,10에서 예언된 바 있다. "보라 네 왕이 내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여기서 스가랴 선지자는 주님이 그렇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후 이스라엘의 성질을 변화시켜서 주님과 같은 '만국을 위한 평화의 사자'가 되게 만들 것이며 마침내 그들이 지닌 생명과 진리로 온 세계를 정복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스가랴가 말한 에브라임과 예루살렘은 온 이스라엘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로 이어지게 될 영적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세상을 위한 섬김의 왕인 우리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길과 영광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만국을 다스리는 영광스러운 왕이다. 우리는 분명히 주님의 좌편과 우편에 앉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는 이미 그러하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1:19-22)
이것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지위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주님 안에 있는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4-6) 그러므로 우리는 영광스러운 왕이며 세상을 다스리고 만민과 만국을 권세로 통치하는 자이며 장차 이것은 만물이 다 보고 알 수 있도록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과 권세는 어린 나귀를 타고 십자가로 향하는 가운데서 얻어진 영광이고 권세임을 알아야 한다. 지난 주에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 곧 생명의 세계에서는 온 힘을 다하여 아기를 섬기는 어머니처럼 살과 피를 양식으로 제공하는 자가 권세자가 됨을 잊어서는 안된다.

주님을 볼 때 우리는 거기서 마땅히 영광을 보아야 하며 그를 찬양해야 한다. 거기서 우리의 영광을 보며 우리의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 그러나 그 영광의 성질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하며 우리가 무엇을 찬양하며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가 분명해야 한다. 만일 겉으로 드러난 영광과 환호와 능력과 권세만 본다면 우리는 주님을 오해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떡을 내려오게 하고 바다를 잠잠케 하며 물 위로 걸으시며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가 천만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 중에 나타나신다 해도 그것은 다 아무 것도 아니다. 주님의 영광, 주님의 권세, 주님의 아름다움은 그의 인격에 있으며 아버지께 순종하는 그의 겸손과 진실함에 있다. 우리가 이것을 보고 아름답게 여기며 영광스럽게 여기면 합당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다른 것으로 인해 그를 영광스럽게 여긴다면 그것은 합당치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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