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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탔던 나귀는 베다니 근처 마을의 주민의 것이었다. 주님은 그 나귀를 쓰시기 위해 제자들을 보내 그것을 달라고 요청하셨고 그 사람은 거기에 응함으로써 그것이 주님의 목적에 쓰이게 된 것이다.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눅19:29-36)

나귀 뿐 아니라 유월절 저녁 식사 자리도 이러한 방법으로 준비되었다.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른지라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여짜오되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하신대 저희가 나가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눅22:7-13)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많은 필요들을 이렇게 충당하셨다. 때로는 주님이나 제자들이 직접 일해서 필요를 충당하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에 사람들의 섬김과 공궤(供饋)로 필요를 충당하셨다.  

우리는 세상에서 소유에 대한 개념을 배웠기 때문에 모든 것을 소유권을 기준으로 생각하며 쓰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라고 시키실 때 즉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우리는 먼저 내게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부터 생각하게 된다. 돈이 얼마나 있으며 힘이 얼마나 있는지 후원하는 사람은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일할 때 거기에 따라야 할 필요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우시며 뒷받침하신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로부터 무엇을 억지로 뺏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택하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자발적으로 다 내놓게 만드실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0:7-15)

바울도 이러한 믿음으로 살았으며 그래서 일할 때 쓸 것에 대해 염려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그 믿음대로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채우셨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일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내적 문제와 외적 문제를 다 해결해주셨기 때문이다. 내적 문제란 믿음과 안식에 관한 것이고 외적 문제란 사람들의 공궤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을 믿고 염려하지 않았으며 감사하며 만족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충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쓸 것을 공급하며 그를 돕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4-19)

하나님의 원리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명과 은혜와 쓸 것을 주시며 사람은 그것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일하며 그때 하나님은 다시 그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공급으로 말미암아 태어났으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그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는 다 하나님의 것이다. "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5,36)
그러므로 사람은 그들의 소유와 인생과 목숨을 하나님을 위해 드려 합당하게 써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쓸 것을 풍성하게 채우사 그들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몸은 주를 위하고 주는 몸을 위하신다는 원리이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3-20)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후9:8-11)

언제나 원리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은혜를 베푸시면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위해 쓰며 그때 하나님은 그의 필요를 또 채우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잘 돌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 원활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는 인생은 어딘가에 막혀 있는 고장난 인생이다. 모든 것을 쥐고 앉아서 안 내놓는 사람 곧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옹색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중립적인 사람이 아니고 고장난 사람이다. 그것은 삶의 원리를 무시한 삶이므로 결국 사그라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공급이 없으면 계속 풍성을 누릴 수가 없음은 물론이요 현상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주님은 이런 원리를 따라 세상 만물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얼마든지 사용하셨다. 어떤 사람은 주님이 요청하기 전에 먼저 자발적으로 그에게 바쳤지만 어떤 사람은 주님의 요청을 받고 바쳤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주님께 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나 제자들이 사람들로부터 어떤 것을 얻어먹거나 그들의 것을 사용할 때 미안한 생각을 그다지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즉 주님은 그가 접촉하는 사람 곧 그에게 무언가를 대접하고 그를 위해 자기 것을 내놓는 사람을 구원하며 복 주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미안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상대방으로부터 찬송과 감사를 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는 작은 것으로 헌신한 사람을 큰 것으로 갚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거나 어려워하지 않았다.

만물은 본래 이런 목적을 위해 쓰여지도록 지음 받은 것이다. 죄 짓는 데 쓰라고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잘 살고 복된 삶을 살도록 잘 쓰라고 이것들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목적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만물을 쓸 권한이 있으며 하나님은 기꺼이 그 모든 것들을 그에게 내어주신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나귀를 바친 사람이나 유월절 식사를 제공한 사람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사람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과정이 있고 또한 벌어지는 과정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헌신할 때 의식을 잃고 무언가에 홀린 것과 같은 상태에서 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라.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주님으로부터 갑자기 무엇인가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하자. 그는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만일 그가 평소에 주님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하기를 원했거나 최소한 그것을 허용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거기에 응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는 당황하며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그것을 거절하게 될 것이다.  

구약 사무엘상 25장에 나오는 나발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요청을 거절하다가 결국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다윗을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다해 섬김으로써 큰 구원을 얻었다. 왜 나발은 다윗의 음식 요청도 거절했으며 아비가일은 몸까지 바쳐(그의 아내가 되었으므로) 그를 영접했는가?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과 시대의 흐름을 알았고 한 사람은 그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나발은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손에 뽑혀서 존귀하게 쓰이고 있는 한 사람에 대해 전혀 인식이 없었고 아비가일은 그것을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에 쓰임을 받으려면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옳지만 일반적으로 그 성령의 감동은 그때그때 어떤 일을 하도록 감동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알고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깨닫도록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아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께 쓰이거나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억지로 강탈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물은 본래 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지금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제것인 줄로 알고 안 내놓으려고 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사람들의 모든 것을 다 가져다 쓰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강탈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기쁨으로 자발적인 헌신을 하기 전에 어떤 것을 억지로 빼앗듯이 가져다 쓰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언제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일에 기쁨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일하신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에 우리 자신이 어떻게 쓰여야 할 것인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일할 때 쓸 것을 어떻게 충당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주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도 얼마든지 믿음으로 갖다 쓸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억지로 빼앗거나 강제로 요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자연스럽게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거나 빚져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위상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돈이나 무엇을 뜯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생명의 복을 주러 온 사람이며 실제로 우리를 접하는 사람은 그러한 복을 받는다. 하나님이 그런 목적을 위해 우리를 불러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당하고 권세 있게 사람들에게 가서 일해야 하며 필요가 있으면 하나님께 구해서 당당하게 써야 한다.

또한 주님의 요구에 반응하는 자로서의 우리의 위치도 분명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청지기처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쓰도록 맡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과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에 쓰이지 못한다면 우리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며 우리가 가진 것들은 썩어질 것에 허무하게 쓰이고 말 것이다. 주님이 언제 우리를 부르시며 언제 무엇을 요구하실지는 그 요구를 받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요구에 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로 십자가를 지기 전까지라도 항상 십자가를 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다음 말씀은 하나님께 소용되지 못하는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6-21)
이렇게 되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주님이 어느 날이든지 우리에게 사람을 보내서 이것이 필요하니 내놓으라고 하실 때 아비가일처럼 거기에 기쁨으로 응하여 주님의 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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