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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루살렘에서는 쉴 곳이 없음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또한 병든 자들을 고치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다. 이 모든 일을 하신 후 저녁이 되었을 때 주님은 예루살렘 성밖으로 나가서 예루살렘 근처의 작은 마을인 베다니에서 쉬셨다. 주님은 마지막 일주일 밤을 이 베다니에서 보내셨다. 아마도 주님은 (감람산 동쪽 기슭의)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와 마리아 자매의 집에 머무르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문둥이였던 시몬의 집에도 거하신 것 같다.(마26:6, 막14:3) 이들은 다 전에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주님이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시다가 저녁에는 베다니로 가셔서 쉬신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예루살렘에서는 쉴만한 거처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외식적이고 분주한 예루살렘보다는 조용한 산에서 기도하며 쉬기를 원하셨다. 예루살렘은 본래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안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안식과 거리가 먼 동네가 되고 말았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모든 도성 중에서 가장 타락하고 부패하여 이제는 껍데기만 남은 곳이 되었다. 그곳은 이제 그들이 오래 기다린 약속의 왕이 찾아왔지만 기쁨으로 맞이할 사람이 거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예루살렘은 이제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만 남았을 뿐 실제로는 죄와 교만과 죽은 형식과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교만과 자부심과 강한 종교적인 틀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발붙일 수 없도록 만들었으며 주 예수님은 그들의 틀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거부되고 제거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이없게도 하나님의 아들이 경건치 못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탄생 때에도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동방에서 점성술사들이 하늘의 별 자리에 나타난 특이한 징조를 보고 메시아의 탄생을 느꼈고 그를 만나기 위해 멀리 예루살렘까지 찾아왔지만 바로 이스라엘 곧 주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 바로 옆에 있는 예루살렘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아무도 그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박사들로부터 소식을 듣고도 그를 따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경배하러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그들은 헤롯과 짝하여 아기 예수를 죽이는 일에 동참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의 제사장 집안 출신이면서도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고 사람이 살지 않는 유대 광야로 나가서 머물며 사역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경고였다. 그들은 잎만 무성하며 열매는 없는 나무와 같았다. 요한은 그들을 향해 주인의 진노 곧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했다. 이제 하나님은 도끼를 나무 뿌리에 놓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2.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심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다음날 아침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시장을 느끼고 어디 먹을 나무 열매가 없나 하고 찾으셨다. 그때 마침 길가에 서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고는 열매를 얻을까 하여 가보았으나 거기에는 아무 열매도 없었다. 그때는 아직 본격적으로 무화과가 열릴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무는 마치 열매가 맺혀 있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그리로 가셨던 것이다. 그 나무는 사람에게 기대치를 주었지만 실제로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실상을 지닌 나무였다. 이에 주님은 그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고 저주를 내리셨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와보니 그 나무는 주님의 말씀대로 말라 죽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기사를 읽으면서 의아하게 생각한다. 버트란트 러셀이라고 하는 19세기의 영국 철학자는 이 기사를 예로 들며 주님이 억지를 잘 부리는 괴팍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비난했다. 주님은 왜 그 나무를 저주하셨는가? 그리고 그 나무는 어째서 주님의 저주대로 마르고 말았는가? 즉 하나님은 왜 주님의 요구대로 그 나무를 마르게 하셨는가?

먼저 우리는 이 일이 나무 자체를 대상을 한 일이 아니라 바로 그 나무가 상징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주님이 던진 하나의 메시지였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그 나무를 도구로 삼아 열매 없는 이스라엘(유대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아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았던 이스라엘은 잎만 무성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그리스도)는 약속대로 그들에게 왔으며 이스라엘은 이제 그 놀라운 役事를 곁에서 지켜보며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했으며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생명은 없고 껍데기만 남은 죽은 유대교와 거기에 속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책망과 저주인 것이다. 주님은 이것을 통해 곧 있게 될 이스라엘의 참담한 종말에 대해 예언을 하신 것이다.(마21:43, 24:1,2)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심고 물주고 거름 주고 김을 매었으나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열매를 내놓지 못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와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며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것을 거절했다. 선민이라고 자고(自高)하던 이 백성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무엇인가 줄 수 있을 것처럼 기대만 주었을 뿐 실제로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할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땅만 버리고 있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눅13:6-9)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3:5-10)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도 주님은 교회들 사이로 다니시면서 교회들을 손보고 계신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가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돌보심을 입고서도 잎만 무성하고는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열매가 없다면 그 교회는 주님의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교회로서의 열매가 없다는 것 즉 영적 성숙과 진보가 없다는 것이다. 외적 성장이나 봉사 활동 같은 것을 얼마나 하느냐 하는 것은 둘째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인격적 성숙이다. 단체적 인격의 성숙과 진보란 결국 교회가 사랑 안에서 얼마나 연합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교회가 육적 욕망을 따라 움직이며 그로 인해 싸움이나 하고 세상 정신을 좇아 다니는 식이 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하나의 세상 종교 집단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때 주님은 그 교회를 저주하시며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시고 말 것이다.(계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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