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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님의 권세의 출처

주님은 무슨 능력과 권세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죽게 할 수 있었는가? 주님은 무슨 능력과 권세로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과 유대 종교를 심판하실 수 있었는가? 또 주님은 무슨 권세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셨으며 무슨 권세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죄를 사하고 말씀을 가르치셨는가?

실제로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는 일을 했을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께 와서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하고 따졌다. 지난번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주님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어떤 세상적 공인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하늘로부터 온 권세 곧 생명의 능력과 권세로서 아무 제한 없이 그러한 사역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을 정리하면 주님의 사역의 근거 즉 주님의 권세와 능력의 출처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주님의 믿음이고 또 하나는 주님이 지닌 생명의 온전함이다.

첫째 근거는 믿음이다. 권세의 근거가 되는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보자.

주님은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 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1,22)라는 말씀을 통해서 당신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셨다. 주님의 믿음은 자신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온전히 드린 데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었으며 온전히 그 지식의 바탕에서 행했다. 그는 자기 뜻과 자기 감정으로 움직이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마음으로 움직였다. 그는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의도와 성령의 흐름(역사의 방향)에만 주의하셨다. 이것은 마치 가지가 나무에 딱 붙어 있는 것처럼 철저하게 자기 위치를 하나님의 아들(종)의 위치에 두신 것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능력과 권세가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명하실 때 그의 능력과 권세도 함께 위임하셨다. 이것은 주님께만 해당하는 원리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하는 원리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2,13)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사상이나 신념과는 다른 것이다. 여기의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인정하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친히 능력으로 역사하사 그것을 다 이루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를 건축함에 있어서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산이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바다에 빠지게 하실 것이다. 그때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믿음의 기도를 통해 실제로 산을 바다로 치울 수 있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을 세우기 전에 먼저 어떤 (묵은) 것들을 치우고 무너뜨려야 한다. 주님은 마태복음 21장에서 더 이상 하나님을 담을 수 없게 된 묵은 부대인 옛 이스라엘과 그들의 거짓되고 경직된 종교인 유대교를 치우며 무너뜨리는 작업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주님은 마치 옛날 출애굽 때의 여호수아가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향해 외침으로써 그 성을 무너뜨렸던 것처럼 이제 천 년 이상 묵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향해 소리침으로써 그것을 무너뜨리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자기 생명으로 새 예루살렘 곧 자기의 몸인 영광스러운 신약 교회를 세우고 계시는 것이다.  


둘째 근거는 생명의 능력이다. 주님의 경우 생명의 권세가 사역의 권세, 사역의 근거가 되었다. 주님은 권세 없이 마음대로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합당하고 정당한 권세를 가지고 일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장사꾼들을 쫓아낼 때 사람들이 그를 제재하지 못한 것이며 이스라엘 도처를 다니며 사람들을 치료하고 죄를 사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이적을 행할 때 제재하지 못한 것이다. 그에게는 사람을 치료하며 가르치며 살릴 권세가 있었다. 이것은 그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충만했다는 말과 같다. 이 생명의 권세로 인해 주님은 병자들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으며 그의 사랑을 나타냈던 것이다. 이 생명의 권세 곧 주님의 사랑과 구령의 열정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그것으로 인해 주님은 마음대로 사람을 책망하며 고치며 채우며 살릴 수 있었다.

주님이 심지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을 때도 그것이 그대로 된 것은 하나님이 그의 모든 일을 인정하셨으며 거기에 능력을 부여하셨다는 증거이다. 위로부터 온 권세가 없이는 아무나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주님의 권세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던 형식적 표면적 권세와 달리 위로부터 난 생명의 권세였다. 하나님이 세우신 예루살렘 성전이 어찌하여 그렇게 더러워졌는가? 그것은 바깥에서 누가 더럽혀서가 아니라 바로 그 성전으로 상징된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더러운 사람은 그의 사는 집도 더럽힐 수밖에 없다. 돼지우리는 새로 만들 때 아무리 깨끗하고 아름답게 단장해 놓아도 곧 더럽혀져서 돼지우리가 되고 만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담거나 나타낼 수 없는 더러운 집이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모실 자리가 없었으며 그 말씀이 거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있는 성전도 당연히 더러워진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8:37) 하나님을 담고 모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쫓고 죽이려는 자들이 어떻게 온전한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 있는 성전은 더럽혀지고 결국은 허물어져 없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주님 이후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고 이스라엘은 세상 가운데서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이전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으신 것이며 그의 거처(주소)를 옮겨 이사하신 것이다.

이미 분명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성전을 건축하며 성전을 새롭고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오직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 사람 곧 자신의 인격과 생명이 하나님을 담기에 적합한 온전한 사람이다. 자기의 육적 생명을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으로 자기를 채우고 있는 그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몇 번이고 다시 강조하거니와 자신이 거룩한 성전인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성전을 거룩하게 만들 수 없으며 성전을 새롭게 수축할 수 없다. 거룩하신 주님은 그 생명의 온전함으로 인해 성전의 더러움을 몸으로 느꼈으며 그리고 그 생명의 능력으로 성전을 청결케 하며 새롭게 건축하셨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권세이다.

권위와 권세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며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참된 권위는 하나님으로 가득 찬 삶(생명)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세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깊이 추구해야 한다. 그를 완전히 따라가야 한다. 우리의 자리가 주님과 같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아들의 자리가 되고 우리 속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거룩한 생명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면 우리는 저절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대로 무슨 일이든지 권세 있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행하는 사람은 의와 착함과 진실함이 그 속에서 나타나며 담대함과 능력과 사람을 사로잡는 권능이 그 속에서 나옴으로써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권세를 가지게 된다.



2. 대안이 없으면 일할 수 없음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망하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불리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아닌가? 개인도 저주하여 망하게 하는 일이 어려운데 하물며 누가 감히 사사로운 개인 감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저주하여 망케 할 수 있단 말인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저주했고 그 저주는 그대로 되었다. 어떤 권세인가? 주님 자신이 이스라엘보다 더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했다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저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나은 대안을 내놓는 것은 쉽지 않다. 이스라엘의 성전이 아무리 보잘것없고 거기 세워져 있는 제사장이 아무리 형편없고 그 성전 안과 밖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이 아무리 무의미하고 심지어 악한 일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밖에 없다면 함부로 그것을 치울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이 예루살렘 밖에 없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이스라엘 밖에 없다면 그것을 저주하여 제거할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완전한 성전과 완전한 제물로서 그리고 완전한 아들과 완전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졌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로서 바쳐졌다. 그러므로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을 폐하실 수 있었다. 사실 주님의 행위는 단지 옛 것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새 것을 세우는 작업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저주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교회를 개혁하거나 가정을 새롭게 하거나 그밖의 무엇을 바꾸려 할 때 우리는 먼저 분노하거나 먼저 가르치고 판단하거나 먼저 정죄하고 심판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전 것을 능가하는 새로운 대안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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