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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권세(활동)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추궁을 받았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 도로 한 가지 질문을 던지셨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이에 대해 유대교 지도자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바로 자기들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따로 모여서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지를 서로 의논했다. 이것은 진실하지 않은 태도이다. 이것은 그들의 인격과 삶이 진실하고 단순하지를 않고 정치적이며 교활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만일 요한의 권세(활동)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렇다고 말하면 될 것이고 요한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렇다고 대답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뭐라고 말할 것인지를 의논하고 궁리했다.

그들의 대답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먼저 우리는 이 진실이라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정치가들을 비롯한 많은 세상의 권력자들이 진정한 권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사실상 진정한 힘과 권세가 없으며 주님과 같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위력이 없다. 그것은 그들이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과 말이 다르며 또한 말과 행동이 다르다.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르며 표방하는 것과 실제 행동이 다르다.

진실은 단순하고 쉬우며 거짓은 복잡하고 힘들다. 진실하면 많은 말을 할 필요도 없고 힘들여서 말을 하거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억지로 할 필요가 없지만 진실하지 않으면 그것을 덮기 위해 많은 애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왜 진실하지 않는가? 무언가 노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 그 자리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가 키가 작은 사람이라고 할 때 내가 사람들 앞에서 키 작은 사람으로 드러나고자 한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좋은 안 좋든 키가 작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일은 간단하며 아무 문제도 없다. 그러나 내가 키가 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렇게 드러나 보이고 싶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그렇게 되려면 무언가 꾸미고 덧붙이고 애를 써야 한다. 이 어려움은 결국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실제가 무엇이든 그 이상으로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꾸미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옳지만 더 나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못날 수도 있고 부족할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다. 그럴 때 그것을 감추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고치면 된다. 사람은 모자랄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내가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이면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 진보도 있다. 그럴 때 물론 우리는 다소 부끄럽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못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람은 어차피 흙에서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아무 것도 아닌 피 덩어리, 지극히 작은 단 세포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자라서 이나마 라도 된 것이다. 그러므로 모자라고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채움 받으면 되고 잘못한 것은 용서받으면 되는 것이고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인인 줄 다 아신다. 그리고 사람들도 우리의 실상을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에게도 자신을 포장하거나 꾸밀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항상 자기를 크고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그리고 무흠하고 완전한 존재인 것처럼 포장하여 실제 이상으로 자기를 나타내려는 망상에 빠져있다. 그것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왜 요한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했는가? 그것은 요한이 그들을 책망했으며 그들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열매 없는 악한 자라는 책망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아니라고 강변했던 것이다. 이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다. 모든 백성이 다 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인정하는데 자기들만 아니라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모든 백성들이 다 바보인가? 왜 백성들은 아무 권세도 없는 사람에게 그렇게 머리를 숙이며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겠는가?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자기 사정이 급했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과감하게 요한은 선지자가 아니라 자칭 선지자라고 한 사기꾼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요한이 선지자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 백성들이 그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아래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권세자였다. 백성들 위에서 권세를 부리고 있는 지도자들이 왜 백성들을 그토록 의식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삶이 사람 위에 얹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나는 구조인 것이다. 그들의 삶의 기반은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영광을 얻고 이익을 얻었다. 백성이 그들의 삶의 터전이자 이익의 원천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서 존경과 명예와 대접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백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사람을 사기꾼을 몰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백성들의 생각을 엎을만한 용기가 없었다. 진리가 아니라면 온 세상이 다 맞다고 해도 아니라고 해도 할 것이고 진리라면 백성들이 다 틀렸다 하더라도 맞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권세이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그런 용기와 권세가 없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들리며 그럴듯하게 보이는 말들과 행동들을 하지만 그것은 다 자기 이익을 위해 꾸며진 것이요 복선을 깔고 있는 위선적인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능력이 없고 권위가 없는 것이다. 만일 오늘날 다수의 정치가들이나 성직자들에게서 그들이 가진 표면적 권세를 뺏는다면 그들에게 무엇이 남을지 의문이다. 주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에 능한 자요 큰 정치적 종교적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실제로는 백성들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마태복음 7:28,29에 보면 주님이 산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크게 놀랐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주님의 가르침이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백성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진정한 권세가 없었다는 것이다.

주님은 학문이 많은 분도 아니고 공식 권세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그 속에 생명의 권세가 있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깊이 아는 지식이 있었고 진리를 온전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에게 권세가 있은 것이다. 그의 권세는 밖에서 온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권세였다. 이 권세는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참 권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는 이런 권세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세례 요한의 권세는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의 선지자 됨은 사람의 임명이나 추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그 속에 있는 기름부음 곧 하나님이 위에서부터 부여하신 생명의 권세로 말미암은 것이다. 속에 있는 선지자의 생명이 밖으로 나타나서 선지자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권세 및 교회의 권세가 바로 이런 권세이다.

어떤 생명이냐 하는 것이 어떤 권세냐 하는 것과 어떤 지위냐 하는 것을 결정한다. 이것은 영원한 원리이다. 가장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 가장이 되며 보스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 보스가 되고 지도자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그 속에 사람들을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고 책임감이 있고 자기를 따르는 자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런 생명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지지와 추종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나 가정이나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나 어떤 일을 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생명의 권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 속에 그런 생명을 충만케 해야 한다. 이러한 생명의 권세는 근본적으로 위로부터(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은 권세의 창조자요 부여자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를 따르며 그에게서 배울 때 우리는 사람들을 능히 섬기고 이끌 수 있는 여유와 권세를 가지게 된다.

이런 권세 곧 이런 생명의 능력이 있으면 사람들은 결국 우리를 알아보고 따르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이나 주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임명장 같은 것은 없었지만 사람들을 능히 이끌 수 있는 생명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종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다. 그들 안에는 목자의 생명이 있었고 아버지의 생명이 있었고 주인의 생명이 있었다. 주님이나 세례 요한은 양들이 죽어갈 때 그들의 실수나 잘못을 나무란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 분들이다. 그래서 목자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10:11-17)

이런 권세 있는 목자를 영원히 따르기 원하며 우리 또한 이 주님 안에서 사람들을 능히 살릴 수 있는 권세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 두 아들 -

주님이 말씀하시니 두 아들 비유에서 두 아들은 다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 중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가겠다고 대답하고는 나중에 가지 않은 아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과 같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며 처음에 일하러 가지 않겠다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뉘우치고 가서 일한 아들은 세리와 창녀들과 같이 죄인들이었다가 주님을 영접한 자들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로 대표될 수 있는 첫째 아들은 큰 길거리에서 기도하며 옷에 성경구절을 적어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율법을 가르치기 좋아하며 율법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중한 것들은 전혀 지키지 못했으며 진정한 율법의 정신을 따라 행하지 않았고 작은 의를 크게 나타내며 입으로만 순종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길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방해꾼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치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던 하나님과 사람에게 혼란만 초래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멸시하던 죄인들보다 더 하나님께 실망을 안겨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혹 아주 어렵게 들어갈 수 있을 뿐이었다.

세례 요한이 와서 사역할 때 義의 道를 증거하며 유대인들을 깨우치려 했을 때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였으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지도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요한이 어떤 표면적인 권세를 가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안다 하나 하나님의 생명을 알지 못하며 그 권세를 보지 못하며 오직 표면적인 것만 볼 줄 아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에 비해 죄인들은 오직 요한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생명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죄인 됨을 보았고 그 생명의(하늘로부터 받은) 권세에 굴복하여 먼저 의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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