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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이 혼인 잔치를 베푸심

왕이 그의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신랑으로 주심으로써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다른 분이 아니고 신랑이다. 이 신랑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장 친근하고 가장 좋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고 충성과 봉사의 대상이고 본 받을 분이며 인도자이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우리가 그를 신랑으로 취하여 그와 함께 있으며 그를 먹고 마시며 그의 사랑을 받으며 그와 더불어 즐기는 시간을 가지는 다음 이야기이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 뒤에 있는 것이며 그것의 결과이지 그보다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이 행하신 첫 표적을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여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라고 소개한다. 주님의 많은 사역과 이적이 있었지만 그가 유독 주님의 혼인 잔치 참석과 거기서 행하신 일을 언급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본질이 신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 ...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28-30)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소개한 세례 요한의 말이다. 나중에 요한이 옥에 갇히고 난 후 그의 제자들이 주님께 와서 이렇게 물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때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마9:14,15)

신약시대는 금식하며 기다리는 시대가 아니라 그것을 끝내고 하늘의 풍성으로 잔치하는 시대이다. 지금은 하나님이 하늘의 모든 풍성한 것들로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부르는 시대이다. 이 시대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1,2)

우리는 주님의 비유에서 먼저 이러한 오늘 이 시대의 특징과 축복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 시대는 사람이 없는 힘으로 힘들여서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의 아들 안에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그것을 누리도록 하신 것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앞에 먼저 부르심을 받았던 자들이 그 복을 거절하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이 복을 얻은 자들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거드름을 피우거나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분에 넘치는 복을 얻은 자로서 우리는 이 기회와 이 자리를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살려나가야 한다. 거드름을 피운다는 것은 마치 자기가 당연히 이런 자리에 있어야 할 자인 것처럼 행세하며 왕의 잔치를 거절한 앞의 유대인들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는 것은 값없이 이것을 얻었으니 마치 이것이 가치 없는 것인 양 소홀히 여기며 뒤로 제쳐놓는 것이다. 이 은혜는 값싼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뒤로 제쳐놓으면 우리의 길은 고생과 수고와 낭패가 기다리고 있는 멸망의 길이 될 것이다. 은혜는 은혜로 받아야 한다.

예수를 억지로 믿어주는 것처럼 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엄마가 밥을 먹으라고 하도 종용을 하니까 마치 못 먹을 것을 억지로 먹어주는 것처럼 행동하는 아이와 같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생명의 선물이다. 이것을 마치 율법이나 의무처럼 생각하며 소홀히 여기고 될 수 있는 한 멀리 제쳐놓으려고 하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



2. 예복을 입은 자만 참석할 수 있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잔치는 싸구려 잔치가 아니다. 아무나 불려왔다고 해서 아무나 와도 되는 자리가 아니며 값없이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가치 없는 싸구려 자리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왕자의 혼인 잔치이며 왕의 잔치 자리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올 수 없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자리이다. 그러므로 불려온 사람은 이 일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해야 하며 이 자리에 합당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잔치에 합당하게 대응하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복을 입는 것이다. 예복 즉 옷을 입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생명과 인격을 우리의 것으로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3:27)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9-14)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16:15)
이러한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의 결과는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계19:6-9)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3:12)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이 말씀들은 성도가 입을 마땅한 옷이란 성도의 의롭고 거룩한 행실 곧 진실한 삶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편 45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러한 인격에 대해 잘 묘사한다.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와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  수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시45:1-14)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의 생명으로 사는 나라이다. 아들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은 곧 성령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로 살아야 하는 자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것이 길이고 예법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나아오는 자들 중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길과 방법으로 나아오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물리치신다.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나아온다는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고 자기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자기의 거룩과 의와 능력과 구원으로 삼지 않고 자기의 의와 자기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들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에 참여하며 천국을 건설하는 일을 하고자 하는 자는 많다. 그러나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행하지 않고 그리스도로 살지 않고 오직 자기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 그 동기는 무엇인가?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 자기 영광 추구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베드로전서 4:10,11에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라는 예복을 입지 않고 하나님의 잔치 자리로 나아오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천국에서 내어쫓기고 말 것이다.

천국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나라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그리스도에게 적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게서는 죄인의 냄새가 나서는 안 된다. 주님은 마태복음 5:20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나 부름을 받는다고 해서 아무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면 길거리에서 되는 대로 불려온 죄인들이 어떻게 먼저 청함을 받았던 의로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보다 더 의로울 수가 있는가?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그리스도의 義로 옷 입을 때만 가능하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예복인 그리스도를 입을 때 우리는 우리의 육적 연약함과 허물과 냄새를 가릴 수 있다. 그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무궁한 생명의 능력(히7:16)이 되어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힘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義를 입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좋게 단장한다 하더라도 천국에 적합치 않은 더럽고 추한 인간적 냄새를 낼 수밖에 없다. 육적 자아대로 행하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도 결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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