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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막7:24-30)



주님은 가버나움을 떠나서 지중해 해변에 있는 도시국가인 두로와 시돈 땅으로 가셨다. 주님이 유대 땅인 가버나움을 떠나서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 땅으로 가신 것은 약속의 땅을 떠나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던 죄인들(사23장, 욜3:4-8)에게로 가신 것이다. 이렇게 하신 까닭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오래된 약속 곧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네 자손으로 인해 모든 나라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이스라엘만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하려 함이니라"(갈3:13,14)  

그런데 거기서 주님은 한 여자를 만났다. 그는 흉악한 귀신이 들린 딸을 둔 여자였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딸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주님께 나온 것이다. 그는 주님을 향해 "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주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주님께 그 여자를 고치든지 쫓아보내든지 보내버리라고 청하자 주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여자는 주님께 절하며 다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주님은 그 여자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자는 이 말에 실망하지 않고 도리어 그 말을 받아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비로소 주님은 그 여자에게 반색하시며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녀를 칭찬하시고 그의 청을 들어주신 후 돌려보내었다.  


우리는 주님과 이 가나안 여인의 대화에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하나님과 관계를 가져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받으심이 되는지를 배울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가나안 여인에게서 기도의 원칙과 비결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첫째 교훈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나안 여인은 처음에 주님을 부를 때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했다. 그는 아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부른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둔 호칭이지 이방인들이 그렇게 부를 수 있는 호칭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메시야는 다윗의 뿌리에서 나오게 될 것이며 다윗의 위(位)에 앉아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될 왕이라고 하셨다. 따라서 그 왕(구원자)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릴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이란 호칭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부를 수 있는 호칭인 것이다. 그들만이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일례로 마9:27의 유대 소경들이 주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불렀을 때 주님께서 즉시 돌아보셨다.

그러므로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잘못 붙든 것이다. 이방인인 그 여자가 주님의 도우심을 받고자 하는 것은 합당하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녀의 외침에 일단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나는 네가 말하는 근거 - 다윗의 자손 예수 - 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구원자일 뿐이다'라는 힌트를 주셨다. 그러자 그녀는 즉시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다시 주님을 불렀는데 이번에는 "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하지 않고 다만 "주여" 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주(主)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主)신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여전히 그 여자에게 냉정하게 대응하셨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는 말씀은 "모든 은혜는 약속된 백성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돌아갈 것이지 개 같은 이방인들과는 상관없는 것이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이러한 주님의 대응에 개의치 않고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말함으로써 계속 주님의 자비와 구원을 청했다. 그녀가 이렇게 한 것은 그녀가 이미 주님의 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에게 항복하고 구원을 청한 것은 그 동안 들린 소문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능력이 대단히 커서 자기 성을 결국 정복할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외면치 않으시고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여리고 성의 다른 거민들과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선택한 데는 이러한 두 번째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리고 성의 다른 거민들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지식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이 물 같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주님의 마음을 알아차린 여자는 주님의 냉대에 굴하지 않고 도리어 "예. 저는 개입니다. 개처럼 보잘것없는 버림받은 이방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자녀와 같이 당당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자녀에게 줄 것은 자녀에게 주시되 다만 부스러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원합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주님이 기대하던 대로 응수하였다.

이 여인은 참으로 복이 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길을 나설 때 그 길을 예비하도록 준비된 자가 틀림없다. 그녀가 한 말은 매우 지혜롭고 믿음 있는 말이며 그것은 그녀의 열린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기도가 응답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기도에 있어서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은 매우 중요하다. 말은 그의 믿음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헛되고 의미 없는 말을 되는 대로 주워담아 중언부언하는 것은 아무 효과가 없으며 하나님이 매우 싫어하신다. 이 여자는 짧은 대화 중에서라도 주님의 마음을 읽기 위해 노력했고 믿음과 인내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었다. 막7:29을 보면 주님이 여자에게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정확하고 분명한 한 마디의 말, 하나님과 생명을 향한 열린 마음은 하나님의 일이 전개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다.  
주님이 두로 시돈 지방에 오신 것은 이미 주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마음이 있어서 오신 것이다. 여자는 그것을 알았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일차적으로 약속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창12:2,3,22:18) 천하 만민에게 다 베풀어질 것이었다. 물론 그 여자는 그런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므로 만민을 다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그녀가 감히 주님께 나아왔고 또 주님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믿음의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에게로 보냄을 받으셨기 그들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셨고 그들의 영접을 기대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 과거에 요나를 보내어 니느웨 백성들을 구원코자 하신 것처럼 지금도 흑암과 죄악 가운데 앉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두로와 시돈 땅으로 가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그 땅에 갔을 때 이 가나안 여자가 나타나서 보인 믿음의 말과 행동은 바로 그런 주님의 마음을 확정하고 넓힌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사람을 사랑하시며 사람에게 과거에 베푸신 적이 없는 새로운 은혜를 무한히 베풀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람이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믿음과 순종으로 화합하여야만 한다. 입을 크게 벌리면 벌릴수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여지도 커진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을 함에 있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근본적인 계획과 노선을 벗어나서 헛되고 무의미한 쪽으로 일을 벌이며 하나님을 유도하는 것은 금물이다. 오직 주님께서 그리하신 것처럼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그 영역을 넓혀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생명 주는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유대교를 넘어섰고, 이스라엘을 넘어섰고, 인종과 귀천을 넘어섰고 모든 세상 상식과 전통을 넘어섰다. 이제 하나님의 역사에는 아무 제한도 없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직 믿음의 길을 따라서 어디로든지 달려간다.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은 오직 사람의 닫힌 마음 곧 믿음 없는 마음 뿐이다.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인내가 믿음의 핵심이다. 조금 집적거려보고는 금방 포기하고 물러서는 것은 신뢰하지 않는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길게 붙들고 신경을 쓰며 에너지를 쓸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한 두 번 기도해 보고 포기해 버리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이 못되며 그의 말씀과 약속에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1-8)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함께 나와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눅11:5-10)

이 비유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돕고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 곁에 계시지만 사람이 믿음이 없고 인내가 없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을 못 누린다는 말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며 그의 구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위의 비유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이나 친구를 귀찮게 여기는 친구보다 더 신뢰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실상이다.

기도의 요체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다면 태도에서 그것이 나타나야 한다. 믿는 자의 기도 자체는 한 마디로 인내이다. 응답이 있을 때까지 계속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이 말은 일이 해결될 때까지 계속 구하는 기도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계속 구하기(기도)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다만 약속을 받지(확신을 갖지) 못했다면 그것을 얻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약속(증거)을 받았으면 이제 기도는 그치고 감사와 찬송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기쁨과 평안과 담담함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려야 한다.

구한 후 잊어버리는 것도 믿음이 아니고 구한 후 하나님의 역사를 인내로 기다리지 않고 다른 해결 방법으로 찾아 돌아다니는 것도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어떤 형식으로든 일의 해결을 볼 때까지 계속 하나님과 승부하는(씨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신다. 우리 안에서 참된 믿음과 찬양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우리의 요구에 대한 응답을 지연시키심으로써 우리를 시험하신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위축시킬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확장하고 강화해야 한다. 가나안 여인처럼 더 적극적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믿음의 사람, 마음이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열려 있는 사람 안에서 세워지고 확장된다. 개인의 소원이 성취되고 말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사역 문제가 여기에 걸려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 약속을 향하여 마음을 넓히고 진보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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