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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세 (마16:15-19) / 2005. 9. 11

2010.04.30 15:22

이상봉 조회 수:3780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주님은 자기를 알아보는 한 사람(베드로)에게 '네가 교회의 기초가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기초가 된다는 말은 교회의 시작이 된다는 말이니 결국 (베드로가) 교회가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누가 교회가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누가 교회가 될 수 있는가? 오직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자이다. 교회는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는(아는)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을 아는 것이 어떻게 사람으로 교회가 되게 하는가? 그것은,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 때 (그 안에서 같은 생명을 받은) 우리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며, 그렇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또한 자신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몸-나라-으로) 드리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란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위해 불러내신 자들이다. 부르심의 수준과 내용은 어느 정도인가? 그것은 가장 높은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부르심 받은 단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곧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아들들의 집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가 종이나 일군의 집단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천사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죽을 운명을 지닌 죄인들의 집단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사람)는 물론 소위 '벗을 몸', '죽을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생명에게 삼킨 바 되었으며 단지 일시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교회는 이미 영생에 속한 자들이며 하나님과 함께 살며 먹고 마시며 호흡하는 권속(가족)이요 하나님과 같은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무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컫는 것이다.

교회(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이름이나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이름은 우리의 영원한 이름은 아니다. 이것은 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동안 가지고 있는 이름에 불과하다. 이 이름들은 세상에서 지금 우리의 위치(지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불러낸 자'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것은 그때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이라는 거대한 세상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부르심 받은 이스라엘의 위치를 나타내는 이름이었다. 지금 교회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온 세상은 세상 임금(마귀)의 지배 아래 있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고 따로 나와서 있기 때문에 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아, 구원자)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구별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예수나 혹은 어떤 사람이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구별되고 드려지지 않았는데 유독 그 사람만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구별되어 드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어떤 직분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사람들(그리스도) 중에서 최고의 직분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직분을 맡아 봉사했다. 그러나 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도 또한 각기 맡은 직분을 맡아 그리스도로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교회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비해 영원하다. 이것도 어떤 면에서 보면 상대적인 이름이기는 하다. 지금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지 않는 자들도 많은데 우리만 하나님의 아들로 사니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가 사라지고 세상의 모든 거역하는 자들이 다 사라진 후에도 우리(사람)에게는 이 이름이 남을 것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사람의 영원한 이름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하나님을 위할 자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자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즉 사람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와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신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이나 사람이 하나님과 동등하냐 다르냐 하는 식의 질문은 근본에서 빗나간 잘못된 질문이 될 것이다. 사람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이 둘은 같지 않다. 그러나 이런 사실과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간에는 아무 상관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오직 사람이 하나님과 한(같은) 생명을 가졌고 그를 위할 자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말이지 다른 말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높일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을 신이라 하든 단지 흙(육체)이라고 하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 즉 하나님의 영(말씀)이 들어 있으므로 사람을 신이라고 해도 옳다. 그리고 사람을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육체)이요 죄인이라고 해도 옳다. 그것도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10:35-38)

주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자기를 높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를 낮춘 것이다.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자기가 오직 하나님의 일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과 자기 일이라는 것이 따로 있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일밖에 없는 자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합당한가! 그러므로 주님은 '나'(예수)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지 실제로는 (자기 인생은 없고) 완전히 하나님(아버지)의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이 얼마나 명쾌한 말인가? 이보다 더 분명하게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가'를 설명한 말이 있을 수 없다. 교회는 이런 사람으로 구성되며 이런 사람 위에 건축된다. 베드로냐 누구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누구라도 이런 생명, 이런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교회이다. 만일 로마 교황이라는 어떤 자가 자기를 교회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말하려면 주님 안에 있는 이러한 실제가 있어야 한다. 그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전혀 아버지와 같지 않은 자가 어떻게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주님 자신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때 '너는 교회가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베드로가 주님에 대해 말했을 때 주님은 교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왜 주님은 자기를 말하는 자리에서 교회를 또 말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머리와 몸의 관계처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완전하게 하나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말할 수 없고 하나를 말하면 반드시 다른 하나를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훗날 베드로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하나이며 함께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잘 말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4-8)

그리스도는 집 머리와 모퉁이 돌이고 우리는 그 위에서 함께 집을 건축하는 작은 돌들이라는 말이다. 한 가난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을 세상은 쓸모 없다고 내버렸지만 하나님은 그를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았다. 이것은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의 차이를 나타내는 영원한 기준이 될 것이다. 하나님(아버지) 외에 아무 것도 없는 한 가난한 사람을 주와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있는 자는 복이 있다. 그 계시 안에서 자신도 그러한 길에 서게 되며 그 길을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시를 가진 자가 바로 교회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다.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신 다음 주님은 그 교회의 권세가 어떠한가에 대해 말씀하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은 교회의 권세가 세상 어떤 권세로도 건드릴 수 없는 가장 강한 권세라는 말씀이다. 교회의 권세는 음부의 권세(지옥 권세, 사망 권세, 마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마귀의 권세의 핵심은 사망 권세이다. 사망 권세란 사람을 사망(목숨)으로 위협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귀가 쓸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이다. 마귀의 일은 사람을 속이며 고통과 핍박으로 내몰며 최종적으로 목숨을 빼앗고 영혼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권세는 이런 사망 권세로 흔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권세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견고한가? 이 말은 교회가 무언데 그렇게 세냐는 말과 같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 땅에 발을 드리운 하나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곧 하나님이고 교회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권세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귀의 권세와 정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생명의 능력'이다. 교회는 이 생명의 권세를 가졌다. 즉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부활 생명)을 가졌다는 말이다. 밀을 땅에 묻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크게 키워진다. 그것은 그 속에 부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땅에 들어가도 밀알 자체가 그대로 보존된다는 것은 아니다. 일단 그것은 썩고 분해되고 변화된다. 그러나 그 죽음과 망함이 도리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더 큰 생명을 만들어내 버리기 때문에 안 죽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교회는 이러한 영생을 가졌으므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중요하다. 이것이 주님의 일생을 통해서 계시된 가장 중요한 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살 수 있다. 가장 작고 초라한 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우주를 다스리도록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는 사람만이 (자신의 육신적 한계를 넘어서) 세상을 이기며 다스리며 건지는 그리스도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세상의 눈에 띄지도 않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한 작은 사람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쓸모 없다고 버림받은 한 보잘것없는 돌이 집의 머릿돌과 모퉁이 돌이 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다시는 사람을 육체 안에서 판단하지 않기로 작정하였고 자신에게도 그것을 적용하기로 결심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나 남을 볼 때 '크냐 작으냐' '화려하냐 초라하냐' 하는 것을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아느냐' '하나님의 심령을 가졌느냐' '그 속에 하나님이 얼마나 충만하냐' 하는 것만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권세와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큰 권세를 위임하셨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대리자(그리스도)의 권세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5,16)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주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다 이루리라'는 말씀을 주셨다. 누구도 이 말에 조건이나 제한을 달아서는 안된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권세이다. 교회의 권세와 능력은 곧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그대로이다. 중요한 것은 오직 교회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주파수를 제대로 맞추느냐 하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무슨 힘으로 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알아서 하실 문제이고 우리는 오직 그의 뜻을 알고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그의 말씀 안에 있을 때 즉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행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권세의 내용에 대해서는 일일이 다 말할 수 없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다. 다만 한 가지 결정적인 것을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죄를 사해주는 권세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2,23)

대단하지 않은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해지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권세가 아니다. 우리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권세는 너무도 엄청난 것이어서 유대인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주님이 온갖 표적을 행하고 온갖 권세 있는 일들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런 주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시는 것을 보고 어떻게 감히 저런 일을 할 수 있는가 하고 말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신성모독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얼마나 큰 권세인가! 그런데 주님은 이런 권세가 당신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어떤 사람은 이런 권세가 베드로에게 즉 사도들과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권세이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18장에서 주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8-20)

여기서 말하는 두 세 사람은 두 세 명의 베드로나 사도가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두 세 명의 보통 사람일뿐이다. 단지 두 세 명의 신자가 모인 곳에서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왜 두 세 사람인가? 왜 한 명이 아니며 수 천 명이 아니고 두 세 사람인가? 이것은 교회를 일컫기 위한 표현이다. 두 세 명은 개인이 아니라 단체로 모인 최소한의 숫자이다. 즉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개인 자격이 아니라 그리스도(그리스도의 몸)의 자격으로 행할 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자격으로 행하려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이 함께 모여서 몸을 이루어야만 하니까 두 명이든 세 명이든지 필요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세는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리며 구원하며 심판하는 권세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의 지위가 무엇이며 직업이 무엇인가에 상관없이 주님의 권세로 세상을 다스리며 구원하며 일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신적 욕망과 관련하여서는 아무 힘도 권세도 없는 자들이다. 돈과 명예, 재물과 권력, 그 어떤 것도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늘리지 못한다. 아무 사람도 마음대로 괴롭히거나 지배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런 권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런 권세가 없는 것은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디 모든 형제들이 이 계시를 가지기 바라며 믿음 안에서 이 권세를 구사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기 바란다. 세상의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세상을 다스리며 건질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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