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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주님은 자기가 세상을 위해 보내진 그리스도(구원자)라는 사실을 알았으며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위해 봉사할 것인가를 알았다. 그것은 사람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직무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수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관심사는 자기를 나타내며 그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거나 높임을 받는 것에 있지 않았고 오직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위한 희생(화목) 제물로 드리는 데 있었다. 자신이 이스라엘 민중들에게 대대적으로 그리스도로 알려지는 것은 도리어 이러한 주님의 사역에 오해와 방해만 가져올 것이었으므로 주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로서 머지않아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는 가르치셨다.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의 십자가행을 강하게 만류하였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의 행동은 매우 신속하고 강력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절대 십자가를 지고 죽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의 마음은 무엇이었는가? 주님이 꼭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 정황으로 볼 때 유대교 지도자들이 주님을 싫어하고 제거하려는 의도를 가졌으므로) 그런 위협과 위험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꼭 그들의 의도대로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피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꼭 그런 방식으로 그리스도(구원자)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이 꼭 목숨을 버리는 것뿐인가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베드로는 주님이 십자가를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주님은 할 수 없이 잡히고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택한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4-18)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요18:4-6)

이 말씀과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은 억지로 잡히고 억지로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필요에 따라 즉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를 스스로 원수들에게 내어주셨다. 물론 주님 역시 고난을 받고 싶거나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방법으로 일하기를 원했다. 그는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오래 기도하며 씨름하였다. 꼭 십자가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땀이 피가 되도록 아버지와 씨름하였다.(마26:37-39, 요12:24-28) 그러나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는 가운데서 마음이 확정되었을 때 주님은 주저 없이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베드로는 오해하였고 주님을 잘못 위하였다.

바울은 가이사랴 형제들이 자기가 앞으로 받게 될 고난으로 인해 슬퍼하며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만류할 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

형제들이 바울을 만류한 것은 그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위험하다고 짐작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의 예언으로 인해 위험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21:10-13)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었으니 하나님이 소아시아와 헬라 지역뿐 아니라 예루살렘과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도록 뜻을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23:11)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2-24)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21:10-14)
형제들은 바울을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우리가 사람을 위할 때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 가장 기본적인 경륜(계획), 하나님의 근본적인 약속, 하나님의 나라와 의, 바로 이런 것들이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최우선적으로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형제가 살고 모두가 다 사는 길이다.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행을 만류한 까닭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베드로는 왜 주님을 만류했는가?

그것이 반사적으로 이루어졌든 깊이 생각한 후에 이루어졌든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행을 만류한 것은 베드로 자신이 그것(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 행을 만류한 것은 크게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그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무지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과 마음과 뜻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처음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다윗 그리고 더 거슬러가서 아담 때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 언약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위해 희생 제물로 드려져서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된 것은 그것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언약 위에 바탕을 둔 제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사는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삶의 중심에 있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제사(제물)를 요구하셨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의(義)였다. 의는 무엇인가? 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사람은 죄인이므로 이러한 사람의 형편과 관련하여 말할 때 우리는 의를 다음과 같이 소극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즉 의는 불의한 죄인을 사형에 처하는 것이다. 죄인을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에 따라 죄인은 죽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며 제사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드려진 것이다.

제사의 핵심은 제물이다. 무흠한 양이나 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은 무죄한 분이요 사람의 대표이신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써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친다는 사람의 활동과 수고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드려지는 희생 제물의 죽음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사람(죄인)들의 목숨(피)인 것이다. 죄를 대속하기 위해 바쳐진 무고한 양과 소의 희생(죽음, 십자가)이 없다면 제사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천 년 이상 제사를 드려왔지만 오직 그것이 자기들의 의와 공로와 자랑이 되었을 뿐 그것이 자기의 죄인 됨과 희망 없음과 마땅히 죽어야 함과 실제로 그렇게 죽었음을 나타내는 것인 줄 몰랐다. 이것이 바로 문제이다. 이것이 베드로와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 이유이다.

왜 이스라엘은 그렇게 오랫동안 이러한 하나님의 (제사) 요구에 응했으면서도 한 번도 자기의 죽음(자기 부인)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그들은 왜 수없이 많은 제물들을 희생시켰으면서도 한 번도 자기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오늘날 천주교에서는 미사를 드리고 개신교에서는 예배를 드리지만 이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바탕 위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미사란 말 자체가 희생 제사를 의미한다. 그런데 왜 그것을 밤낮 반복하면서도 자기의 죄와 죽어야 함과 죽었음에 대해 생각하지 못할까? 이것은 영원한 숙제이다. 하나님의 언약(약속)은 구약에서 할례로 표시되었고 신약에서는 세례와 성찬으로 표시되고 있다. 이 모든 형식들은 다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 내가 의롭고 이대로 살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고 물에 장사지냈어야 하겠는가?

주님의 십자가(희생 죽음)가 없다면 제사는 아무 의미도 없으며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모든 행동들은 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언약)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오직 육신적 구원만 생각했다. 육신의 폐기가 아니라 육신을 살찌우고 만족케 하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십자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으므로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알아듣지 못했고 그것을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마26:1-15)

주님이 유월절이 지나면 원수들에게 잡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합당하게 반응한 사람은 한 가난한 여인뿐이었다. 그는 주님이 죽는다는 말을 듣고 그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귀한 향유를 가져와 주님의 몸에 부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주님의 장사를 예비했다. 그녀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이제 끝이 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세계 안에 있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든 큰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이든 그들의 마음 안에는 자기 계획과 뜻이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행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것은 주님의 죽음이 곧 자신의 죽음과 연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님이 죽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 의지하여 살던 그들의 삶도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베드로는 자기 삶을 생각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만류한 것이다.

결국은 그것이다. 살고자 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었던 것은 살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살려고 하면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한다. 살고자 하면 죽지만 영생을 얻기 위해 죽고자 하면 산다는 것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4,25)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려는 분이 아니라 살리려는 분이다. 살리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고 그를 화목 제물로 바쳐서 희생시킨 것이다. 우리를 죽이지 않고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옛 사람)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2-39)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의 약속을 알고 그의 마음과 뜻을 안다면 우리는 죽고 사는 문제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된다.

주님의 죽으심이 자신의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베드로의 생각은 옳았다. 그렇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도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로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두려워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매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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