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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만 (마17:1-8) / 2005. 9. 25

2010.04.30 15:24

이상봉 조회 수:3531

주님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16:27,28) 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는 6일 후 세 제자들을 데리고 한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변형된 모습 곧 영광스런 모습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

주님이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의 왕다운 권위와 풍모를 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깊이 존경하던 모세와 엘리야도 보았으므로 그는 그 광경에서 깊은 인상과 감동을 받았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대표적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이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거의 반사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을 했다.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하사이다 하니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막9:6)

베드로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리고 왜 하나의 초막이 아닌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을까? 그것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 세 사람이 다 좋았기 때문이다. 주님도 좋았지만 모세와 엘리야도 좋았던 것이다. 주님과 함께 산에 등장한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그들이 상징하고 있는 것들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서 더욱 의미있는 존재들이었다. 즉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였다. 그리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말세에 다시 한 번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참 신앙의 길로 이끌 것이라고 믿어져 오던 인물이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바로 이 두 사람의 새로운 활약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졌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율법)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고 따라서 강력하고 권세 있는 하나님의 사람(선지자)들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메시야)이신 예수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자 주님이 과거에 이스라엘을 떠받들고 있던 이 두 사람의 구관(舊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 가시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베드로는 주님의 처소와 함께 모세와 엘리야의 처소도 함께 지음으로써 그 산에서의 영광스런 체험을 오래 간직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와서 베드로의 말을 막았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17:5-8)

이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야 너는 아직 말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오직 네가 들을 때니라" 하는 것이다. 천국(하나님의 나라)에서 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분은 단 한 분 주 예수님뿐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천국에서는 오직 하나님만 말씀하실 뿐 사람은 자기 생각을 말해서는 안된다. 천국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곳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음성을 들으면 된다. 천국에는 참모가 필요 없으며 아버지도 지도자도 선생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오직 아버지와 그의 영원하신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을 따르는 많은 아들들이 있을 따름이다. 천국에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게 순종하는 어린 양들이 있을 따름인 것이다.  

천국에서는 베드로가 말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도 말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분명히 평범한 일개 죄인들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위해 친히 세우신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그들은 힘을 잃고 만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그리스도가 몰고 오신 참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하나님이 친히 그의 자녀들과 생명으로 교통하시며 그들 가운데서 그들을 친히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중간 매개체가 필요 없다. 구약에서는 율법이 하나님과 그 백성 간의 매개체였고 선지자가 또한 그러한 매개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다르다. 아들이 하나님을 이 땅에 친히 몰고 왔으며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곳에는 성전도 없고 예배(제사)도 없고 그 어떤 율법(외부적 규례)과 선지자도 필요 없다.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돌로 지은 성전은 허물어져야만 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선지자는 세례 요한을 마지막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만일 아직까지 우리에게 율법이 있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서지 못한 것이며 아직도 선지자가 있다면 우리에게 천국은 없는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이 친히 사람 가운데서 말씀하시며 다스리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나라에서 계속 자리를 차지할 수 없고 자기 자리를 주님께 내어주어야 한다. 어느 위대한 사람, 어느 위대한 사상과 전통과 제도도 하나님의 나라에서까지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1:27-31)

베드로의 말이 하나님의 간섭으로 갑자기 끊어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베드로의 그럴듯한 제안이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제재를 받은 것은 그것이 기독교의 근본에 관계된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상황은 어떤가? 거기에는 그리스도도 있지만 율법과 선지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고 성령의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친히 그 자녀들 안에서 말씀하시고 일하실 수 있게 된 현재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사탄의 시험에 빠져 실패한 것을 나타낸다. 오늘날 교회에 무슨 율법과 선지자가 있는가? 바로 성경과 예배, 교회의 규례들과 전통 관습들 그리고 목사와 성직자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들고 있는 이 성경은 전혀 율법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깥의 규례'가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신실한 형제들의 간증이며 생명의 전달 통로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전하며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에게 전하는 도구이지 우리에게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지 말라고 규정하는 율법책이 아닌 것이다. 물론 성경을 율법처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성경도 율법책이 된다. 그러나 본래 성경은 그런 목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예배는 무엇인가? 이것은 이름만 바꾼 구약 제사이다. 신약 시대에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길은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면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생명 안에서만 예배를 받으신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아들만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고 그 생명으로 살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그것이 없고 그 생명으로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전혀 예배하지(섬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는 무엇인가? 그리고 교회 형제들은 무엇인가? 오늘날 그들이 교회 안에서 선지자와 제사장 노릇을 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라' 하면서 이것 저것을 가르치는 선지자들로 세움 받은 사람들인가? 물론 형제들이 서로 가르치며 돌보는 것은 정상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중보자는 아니며 하나님의 뜻을 특별히 대리하는 사신도 아니다. 신약 시대에 그 택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분은 '바깥에 있는 그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이시다. 오직 성령님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며 또한 아들과 함께하는 자리로 인도한다. 소위 목사나 교회의 이런 저런 봉사하는 형제들은 그런 성령님을 대신하는 자가 아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사자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모든 이전 제도들을 자기 안으로 흡수하심으로써 다 폐하셨고 그리고 지금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그 일을 담당하신다. 목사나 교사나 형제들은 단지 성령의 도구들일 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먼저 체험하고 생명을 먼저 누리는 사람일 뿐이고 또한 각기 받은 은혜를 따라 뒤에 오는 약한 사람들을 돕는 형제일 뿐이다. 그들은 참으로 다만 형제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전혀 아니다. 교회 안에는 특별히 돕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 있지 않으며 오직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서로 서로 섬기며 돕는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던 것처럼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쓰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여전히 애쓰고 있다. 아들의 생명(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지지도 않고 그 생명으로 살지도 않으면서 구약의 성전 제사처럼 소위 예배라는 것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간단하게 섬기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단지 외형적이고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므로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으며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목사라는 종교 전문가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간접적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오늘날 신자들이 목사나 곁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다만 형제로 생각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들과 교제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하게 나누기를 원하고 있는 것인가?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않으며 사람들은 목사나 앞에 있는 어떤 신실한 형제들을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중보자로 생각하고 그들이 자기의 모든 것을 도와줄 것으로 기대하며 그들에게 가서 모든 것을 묻고 가르침 받으며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다. 이것은 영락없는 모세와 선지자의 재판(再版)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만일 오늘날 교회가 그 무지함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든지 아니면 힘들여 헌신하지 않고  손쉽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든지 계속하여 율법과 선지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추구한다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견고히 서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나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한다면 율법과 선지자는 취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성령님을 의지하여 친히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답답하고 번거롭고 모호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반드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해야 한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자연히 하나님을 알게 되며 그 뜻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진실로 그의 뜻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쁜 마음으로 그의 뜻을 알려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그것이 힘들고 귀찮아서 바깥에 문자로 쓰인 책(율법)을 들여보거나 목사에게 물어보고 가르침 받으려 해서는 안된다.

그런 것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한 중심 수단이나 유일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 상식이나 자기의 이성적 판단만을 의지하고 무엇이든지 자기 생각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성경도 보고 환경의 진행도 살피며 형제들의 의견도 묻되 그 모든 것을 성령의 인도를 받는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과정이야 어떠하든지 범사에 성령의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며 어디로 인도하시는지를 깨달음으로써 하나님의 인도와 다스리심을 받는 친 백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책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목사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아는 상태에 머물러서는 신약 신자라 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님으로 인하여 언제나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신약(새 언약)을 통해 신약 시대의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히8:11)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명 안에서 개인적으로 먼저 알고 그 후에 형제나 이웃이나 책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말을 듣는 것이다. 기독교는 어떤 바깥 소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 안에 있는 계시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몇 주 동안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는 오직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 위에 건축된다. "바요나 시몬이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계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속에서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신약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듣는 것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못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율법이나 율법적 기능을 하는 도구들 곧 모세에 의해 기록된 구약 성경이나 사도들에 의해 기록된 신약 성경을 우리 가운데 남겨주셨고 또한 여러 신실한 형제들을 교회 가운데 세우심으로써 엘리야와 같은 '사람 사자(使者)'들을 남겨주신 것으로 인해 감사를 드린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께 믿는 자들에게 주신 귀한 은혜의 수단들이며 선물이다. 우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함께 기록된 진리의 말씀들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우리 삶에 필요한지 다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돕고 격려하며 일깨우는 우리 형제들의 도움도 귀하기 그지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성경도 필요하고 선지자도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미 배운 것처럼 변화산 사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사실은 이것들 중 아무 것도 우리 마음 속에 울려오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음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성경이나 경건한 신앙 서적 또는 목사나 교사와 같은 형제들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살아계신 그리스도 자신보다 더 귀히 여기고 의지하는 잘못된 신앙 태도이다. 성경이 우리 삶에 필수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 인도자요 권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능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보다는 말씀의 글자만 쳐다보고 있는 위험에 빠져 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주되심까지 도전할 정도로 성경을 귀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그 분과는 만나지 못한 채 생명은 없고 의문 율법만 붙들고 있던 유대인들처럼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 이상의 것이다.  

그리고 사역자들의 봉사도 귀하고 형제들도 귀하지만 그들이 성령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들만 바라보며 그들만 의지하다가는 영원히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체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제사장에게 양이나 갖다 바치며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었던 구약 백성들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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