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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참으로 직선적이고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변화산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금 받는 사람들과 만났을 때 여실히 드러났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성전세를 거두러 다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님은 성전세를 안 내느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주님께 묻지도 않고 자기 생각을 바로 이야기해 버렸다. "내신다." 베드로의 생각에 '성전세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다 내는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선생님이 왜 그것을 안 내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대답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집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그 문제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도 전에 주님이 먼저 말씀을 하셨다. 마태는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은 베드로가 먼저 입을 열어 "주여 세금 받는 사람이 와서 성전세를 내라고 합니다. 내야 되겠는데요"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주님이 그의 말을 막으신 것이다.

주님은 왜 그 상황에 개입하셔서 베드로의 말을 막으신 것일까? 두 말할 것도 없이 베드로의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세(稅)를 낼 의무가 있었는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전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따라서 성전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고대에 있어서 왕과 왕자는 세금을 안내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가 자기 것이기 때문이다. 전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기도 했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기도 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시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은 그가 그런 날과 장소를 정하신 분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참으로 그는 모든 율법의 제정자시요 성전의 주인이시다. 심지어 하나님의 참 아들도 아닌 다윗조차 성전에 바쳐진 떡을 먹고 거기 안치된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가기도 했는데 하물며 참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야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주님도 세금을 내신다고 말한 것은 잘못이었다. 베드로의 성급한 대답은 문제를 만들고 말았다. 베드로의 말이 문제가 된 것은 안내도 될 돈을 내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신분과 권세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세금을 안 내려고 하시지는 않았다. 주님은 베드로가 낸다고 성급히 말해 놓은 그 돈을 순순히 지불하셨다. 대신 주님은 당신이 왜 그 돈을 지불하시는지를 베드로에게 설명하셨다. 그리고 한 표적을 일으키사 자기와 베드로의 세금을 함께 지불하셨다. "그러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기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마17:26,27)

주님은 왜 세금을 내셨는가? 그것은 주님이 세금을 안낼 경우 세금 받는 자들이 '소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가 성전세도 안 내나?' 하고 오해하여 실족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주님은 법적 도덕적 의무로 따질 것 같으면 세금을 안 내어도 되었다. 안 내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금을 주님이 받아야 마땅했다. 주님이 성전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수제자 베드로조차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마치 주님이 세금을 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마당에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깨닫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배려하사 돈을 내신 것이다. 그가 성전의 주인이면서도 성전세를 낸 것은 오직 사람들로 생명 이외의 것들로는 결코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 일뿐 아니라 주님이 세상에서 하신 모든 일들은 알고 보면 다 사람들의 생명을 위하며 그들에게 값없이 은혜를 베풀기 위해 한 일들이다. 주님이 종의 형체를 입고(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나 수치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도덕적 법적 의무가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나타내기 위해 자발적으로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사람들을 대하시는 하나의 원리를 볼 수 있다. 이 원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접촉할 때 적용할 수 있는 원리이다. 이런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바로 주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이 태도대로 해야 한다. 주님은 무엇을 보여주셨는가? 무슨 원리를 가르쳐 주셨는가? 주님이 이 사건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내가 행사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더 큰 목적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A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B라는 다른 뜻(방법)을 사용하여 이루시고자 할 때 나는 '막바로 A가 성취되어야 합니다' 하고 고집하지 않고 그것과 상충되는 듯이 보이는 B라는 하나님의 뜻(방법)을 받아들여 순종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주님은 단지 성전세를 '안 내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내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내는 것은 주님이 성전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포기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칙 문제, 명분 문제이므로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의 독생자가 세상에서 영광과 존귀를 받는 것이며 만물의 주가 되어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양보하거나 희생할 수 없는 문제이다. 주님이 양보하시고 희생하는 것은 주님 개인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성취되느냐 마느냐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하신다면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이 될 터이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가 일단 낸다고 했고 또 거두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이상 그 돈을 안내면 이 두 사람이 실족하게 될 것을 우려하셔서 '내서는 안 되는 돈'을 기꺼이 내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주님에게 있어서 '십자가'였다. 다른 사람의 생명(유익)을 위해 자기를 낮추시고 희생한 것이다. 세상에서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십자가의 길로 일관하셨다.

주님은 자신이 이 길로 걸을 뿐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이 길을 제시하셨다. 겉으로 볼 때 상충되는 듯이 보이는 두 요구가 주어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하는 것과 관련된 A라는 뜻을 보여주시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거침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쓸 수 있는 그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관련된 다른 뜻 B를 보여주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 바로 그 답이다. 주님의 십자가 안에는 능히 자기가 쓸 수 있는 권세를 남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담겨져 있다. 성전세 면제라는 특권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뜻과 연약한 자를 실족케 하지 않기 위해 그 특권을 희생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조화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그 두 뜻의 조화의 길로 인도하시며 그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먼저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 사람이 두려워서 사람의 눈치를 보아서 어떤 대책을 세우고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올무와 속박이며 우리는 그런 모든 올무에서 해방되었으며 또 마땅히 해방되어야 한다. 책임으로 따지면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요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이므로 사람에게 무슨 책임과 의무도 없으며 따라서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매이며 하나님만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가진 권리를 다 향유하거나 주장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런 특권을 가지지 못한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은 제한과 구속을 받는다. 우리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이 남을 배려하고 고려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해 양보하고 생명 주는 자가 생명 얻는 자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은 크다. 우리는 우주의 주인이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우주를 다스릴 뿐 아니라 지금 현재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큰 자유와 권세와 특권을 가지고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는 자이다. 이 권세에 근거하여 우리는 많은 일을 주저 없이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 까닭에' 그 일을 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우리는 이 뜻을 A라고 하자)  그런데 우리가 이 자유와 권세를 행사해 보면 우리는 금방 이 권세를 우리 마음대로 쓰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하늘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주위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와 권리를 행사할 때 우리는 부모나 형제, 직장이나 교회의 다른 사람들과 자연히 부딪히며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그들과 조화를 이루며 그들을 배려하고자 하는 하나의 부담을 안게 된다. 이 문제 역시 우리가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뜻을 B라고 하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의무도 면제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셨으나 다른 한편으로 남을 노하게 하거나 실족케 하지 말고 살리고 세우도록 하는 의무도 주셨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 A와 B가 충돌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A뜻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B뜻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은 성경의 한편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에게 순종하라' 또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시며 '가족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신다. 앞의 명령을 따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 역시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질 때 따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완전하신 지혜와 방법을 따라 종종 우리로 때를 기다리게 하시며 '가족을 돌보라'는 후자의 명령에 먼저 복종하도록 요구하신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상을 버리고 주님을 좇는 일도 매우 어려운 십자가이지만 한 번 그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기로 한 사람이 그것을 유보하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 B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뜻 A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큰 십자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두 뜻은 서로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지혜롭고 완전한 분이어서 그가 한 번 내신 뜻은 절대로 놓치지 않으신다. 그가 A라는 뜻을 한 번 내셨다면 그것은 언젠가 반드시 성취된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아울러 우리 자신의 뜻과 의지, 우리 자신의 혈기와 열정으로 그것을 수행하느냐 아니면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일하심으로만 그 뜻을 수행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을 따름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함에 있어서 오직 그의 생명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종종 명백한 뜻 A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B라는 다른 뜻을 중간에 내셔서 우리로 앞도 뒤도 안보고 A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섬기신 것처럼 우리도 한 번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나면 문제가 되는 것은 A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B에 순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후자에는 인간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상대해야 하므로 우리의 자아가 상하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체로 그것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 A라는 뜻을 추구할 때 발생하는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관계뿐이므로 다른 사람들과의 마찰이나 자존심 문제는 그다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B라는 뜻을 추구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우리의 자존심을 꺾고 우리의 뜻을 꺾고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마음이 상하게 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두 뜻이 함께 요구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자아가 손상되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서도 순종할 수 있는 A라는 뜻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싫어하는 뜻 B를 주신 이도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걸림이 되는 그 요소를 단순히 인간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일이 인간적 장애물에 걸려서 방해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분명한 뜻 A를 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B라는 뜻을 또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먼저 내신 뜻 A를 포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우리로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먼저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가운데서 그것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 지혜와 방법으로 반드시 그가 내신 뜻 A를 이루신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믿는다면 B라는 답답하고 다소 마음에 안 드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이다.

주님은 항상 이 길로 걸어가셨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 자체가 바로 이 십자가의 원리에 따른 순종의 절정이다. 십자가는 사실 가장 미련하고 답답한 방법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이 오직 그것밖에 없었겠는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가장 미련하고 답답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아버지께서 그 방법을 택하셨다면 주님의 선택은 한 가지뿐인 것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의 뜻이 과연 십자가인지를 확인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러했다. 그때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 하면서 그 길을 갔다. 이처럼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 자체가 바로 십자가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오늘날에 우리에게도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 십자가가 있다. 우리는 날마다 이것을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주님에게는 문자 그대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십자가가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각각의 형편에 따른 다른 십자가가 있다. 그러나 그 공통점은 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다. 자존심과 혈기와 자기 지혜와 자기 능력을 완전히 박살내지 않고서는 아버지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으며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돌보며 섬길 때 우리는 '내'가 그것을 하거나 '억지로' 그것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모든 일을 온통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면 일은 주님이 다 하신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맡은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온갖 문제(그것이 방해이든 지연이든)에 대해 초연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예기치 않은 문제(어떤 사건이나 어떤 사람)로 말미암아 우리의 일이 온통 좌절되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다. 역사상 많은 실패는 첫째 십자가를 지는 데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 둘째 십자가를 지는 데서 일어났다. 많은 성실하고 열심 있는 신자들이 여기서 실패하였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누가 감히 방해하느냐" 하면서 불도저로 밀어붙이듯이 모든 장애물들을 단번에 제거해 버리고 할 일을 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이 다치며 일은 되었는데 사람은 어디로 날아가 버리고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기를 원하신다.

유대인들에게 이 실패가 있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막7:7-13) 하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네 소유를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 중 후자를 선호한다. 세상 사람들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더 쉽고 자연스런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우선하려고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런 태도는 육신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온 영적 행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하는 대신 그만큼 그의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는 일은 적게 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육신적인 태도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둘 다를 요구하신다. 그렇게 할 때만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결국 자기를 철저히 낮추고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려울 것 같지만 사실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위임 권세자인 부모나 형제를 섬기는 것이 그보다 더 어렵다.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통해 안 보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십자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자아를 드러내며 경건과 거룩의 표를 내고 본때 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언제나 자기를 낮추어 실제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원하신다. 우리는 이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는 순종하려고 하고 보이는 사람에게는 순종하기 꺼려하는 것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대충해도 표가 안 나고 자존심도 그다지 상하지 않으며 간섭도 없고 명분도 서지만, 보이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은 어지간히 잘 해서는 표도 안나고 자존심을 팍팍 낮추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만큼 존경스럽지 않은 흠 있는 인생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꺼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런 사람들을 배려하고 거기에 순종하며 제재를 받도록 우리를 인도해 놓으셨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수행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또 다른 말씀으로 우리의 행동을 저지하고 나서는 듯이 보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이 내신 그 처음의 뜻을 수행하시기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제로 어떤 일을 추진해 나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한다. 우리가 조급함을 드러낼 때 이미 그것은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순종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아가 그 일에 개입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 자아는 너무 쉽게 하나님을 뜻을 수행하려고 발을 내밀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때와 방법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의 때와 방법대로 그 일을 성취하실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을 빌미로 자아가 비대해지고 성장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명색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이 자기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확장시키는 일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육신적 일을 할 때는 도리어 자아를 공개적이고 떳떳하게 드러내기 어렵다. 그러나 어떤 일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이 붙게 되면 즉 '내가 선을 행한다', '진리를 위한다', '하나님을 위해 이 일을 한다'는 명분이 붙게 되면 그의 마음은 안심하고 자아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여건이 형성될 때 인간의 열심과 고집은 아무도 못 말리는 것이 되고 만다.

이 세상에서 제일 고집불통 중 하나는 자기가 성령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계시나 무슨 지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그래서 자기는 어떤 하나님의 사명을 띠고 왔다는 사람들은 아무도 못 말린다.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자기에게 이러저러한 계시를 주셔서 자기가 이런 저런 일을 추진하게 되었으니 누구든지 끽 소리 하지말고 따라오라고 하는 사람을 누가 말리겠는가? 이런 상황에는 거의 틀림없이 사탄에 의해 교묘히 자아가 개입되기 마련이다.

자기 이익과 욕심을 따라 어떤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 자기가 생각하고 계획하여 어떤 일을 추진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중간에 그것을 바꾸거나 고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선한 일이며 하나님이 시킨 일이며 진리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도 그 일을 멈추게 하거나 변경시킬 수 없다. 그는 마음놓고 자기 고집과 열심, 자기 지혜와 능력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 자체는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뜻을 친히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그 분 자신이 우리 안에서 모든 지혜와 모든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전파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지 그것을 희석시키는 일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처음 뜻 A는 우리의 구원과 영광, 우리의 거룩함과 형통과 존귀,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다른 만물들을 구원하고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변함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 A가 성취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그 길과 방법, 과정을 정하시며 그것을 아신다. 그의 지혜가 우리를 우리 되게 만들며 그의 능력이 우리를 처음 정하신 뜻 A대로 빚으신다. 이때 하나님의 때와 방법,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펼쳐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 B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 뜻 B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시작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만큼 시행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A는 받아들이면서 B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실제로 하나님의 뜻 A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저나 여러분이나 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 A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러한 뜻 A를 막는 듯한 하나님의 다른 뜻 B를 만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육신적인 성향 때문에) 그 모든 일이 참으로 하나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여러 면에서 십자가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모든 주님의 신실한 종들은 다 이런 훈련을 받았으며 바울 역시 그러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악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8:4,7-9) 그는 주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종종 약한 형제들을 배려하여 자기의 자유를 제한했다.

베드로 역시 머지 않아 이 원리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 길로 갔다. 처음에 베드로는 이런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나 어느 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대신하여 죽으실 필요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자기도 그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되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그는 스스로 그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했을 것이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남에 의해서 자기 삶이 희생되도록 허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큰 자유와 생명의 여유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베드로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은 더 이상 베드로에게 이 문제를 강요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는데 그것은 베드로에게 한 비유로써 분명히 이 진리를 말씀하시기 위해서였다.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으리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나와 너를 위하여"이다. 어떤 사람은 이 이적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행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주님 자신을 위하여 반 세겔 그리고 베드로를 위해 반 세겔을 지불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지불하신 것이다. 이 한 세겔 안에서 우리는 두 사람을 위해 성전세를 내시는 주님의 은혜를 본다. 또한 이 속에서 우리는 한 몸인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종들과의 친밀한 연합을 본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9 이혼과 생명 (마19:1-12) / 2005. 12. 11 이상봉 2010.04.30 3658
138 죄의 용서 (마18:21-35) / 2005. 12. 4 이상봉 2010.04.30 3618
137 형제를 용서함 (마18:15-35) / 2005. 11. 27 이상봉 2010.04.30 3944
136 범죄한 형제에 대한 태도 (마18:10-17) / 2005. 11. 20 이상봉 2010.04.30 3581
135 하나님의 마음 (2) (마18:1-14) / 2005 . 11. 13 이상봉 2010.04.30 3534
134 하나님의 마음 (1) (마18:1-14) / 2005 . 11. 6 이상봉 2010.04.30 3579
133 누가 큰 자인가 (마18:1-14) / 2005. 10. 30 이상봉 2010.04.30 4584
132 믿음의 주 그리스도 (마17:24-27) / 2005. 10. 23 이상봉 2010.04.30 4003
131 능력과 믿음과 하나님의 뜻 (마17:19-21) / 2005. 10. 16 이상봉 2010.04.30 3590
130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마17:14-20) / 2005. 10. 9 이상봉 2010.04.30 3887
» 베드로의 훈련 (마17:22-27) / 2005. 10. 2 이상봉 2010.04.30 3775
128 오직 예수만 (마17:1-8) / 2005. 9. 25 이상봉 2010.04.30 3531
127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함 (마16:20-26) / 2005. 9. 18 이상봉 2010.04.30 3614
126 교회의 권세 (마16:15-19) / 2005. 9. 11 이상봉 2010.04.30 3780
125 교회의 기초 (마16:13-20) / 2005. 9. 4 이상봉 2010.04.30 3855
124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마16:13-20) / 2005. 8. 28 이상봉 2010.04.30 3784
123 하늘로부터 온 표적 (마16:1-12) / 2005. 8. 14 이상봉 2010.04.30 3990
122 하나님의 나라와 믿음 (마15:21-28) / 2005. 8. 7 이상봉 2010.04.30 3873
121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 (마15:11-20) / 2005. 7. 31 이상봉 2010.04.30 5839
120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마15:1-20) / 2005. 7. 24 이상봉 2010.04.30 4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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