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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귀신이 들려 발작을 자주 일으키는 아들을 고쳐달라고 했다. 그는 그의 아들을 주님의 제자들에게 먼저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이 고쳐주지 못하더라는 말을 하며 주님이 직접 고쳐주시기를 부탁했다.
이때 주님은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이러한 주님의 책망은 주님의 제자들과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뿐 아니라 온 인류가 다 이 책망을 받아 마땅하며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이다.

왜 주님은 이러한 책망을 하셨는가? 말씀 그대로 사람들이 너무나 '믿음이 없고 악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고 악하다는 책망은 하나님이 이미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며 약속을 주시며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아무 빛도 없을 때 어둡다고 책망하지는 않는다. 빛을 비추었는데도 어두운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책망을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고 패역하다고 책망을 하신 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책망을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마땅히 알아야 할 바는 무엇이었나?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가 자기들을 택하사 친 백성으로 삼으시며 자기들의 그동안의 죄와 거역과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버리거나 잊지 않고 돌아보사 구원의 약속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때가 차매 이제 그 약속(의 구원)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들 앞에서 실제로 구원 역사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역을 시작한 첫 날부터 쉴새 없이 천국 복음(하나님이 친히 세상을 구원하시며 다스리신다는 소식)을 전하시며 그 증거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각종 표적을 일으키셨다. 주님이 이스라엘과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이런 명백한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찌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크고도 명백한 구원을 보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책망은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백성들보다 주님을 오래 따라다닌 제자들에게 더 해당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주님을 따랐지만 실제로는 믿음이 없었다. 하나님(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해서 믿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의 능력에 대해 실질적으로 아는 것이 없었고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님은 사역을 위해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보내셨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의 권세(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위임하셨다. 그들은 아들(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는 아버지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었다. 그들이 무엇이든지 매면 매일 것이고 풀면 풀릴 것이며 구하는 것은 다 얻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마가복음 9장을 보면 상황이 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막9:14-19)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막9:20-24)

처음에는 제자들이 믿음이 없어서 책망을 받았지만 아이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도울 수 있는 구원자인 줄 알고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무엇을 할 수 있거든" 도와달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마음은 오늘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대다수의 신자들의 상태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별로 기대하지는 않지만 급하고 아쉬우니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또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주님을 붙드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주님께 나아온 것은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주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병자들을 고치며 이스라엘을 이모저모로 구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주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상태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과 그 약속을 실제로 이루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확신과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바로 온 이스라엘의 총체적 불신앙을 나타내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오늘 여기 있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온 인류의 타락한 마음 곧 하나님과 그 약속을 향해 무디어지고 닫혀 있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제자들이 주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하고 물었을 대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일이 없으니라." 마가복음에는 같은 질문에 대해 주님이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대답하셨다고 되어 있다.(막9:29) 지금 우리 성경에는 (마17:21이) 빠져 있지만 어떤 성경 사본에는 마가복음처럼 마태복음에도 앞에서 한 답변(17:20) 다음에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주님처럼 하지 못한 까닭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과 권세 위임과 그로 인한 능력을 실질적으로 믿지 않은 것이다. 둘째는 그들이 기도와 금식으로 표현된 그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다.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위임된 일들 곧 주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서 펼친 일들은 사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그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기도와 금식(으로 표현된 그 무엇)을 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기도와 금식을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것은 다 '자기 부인(自己否認)'을 나타내는 것이다. 기도와 금식은 다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즉 기도와 금식은 '나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주님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제자들은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가?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고 창조자로서의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지만 제자들은 그렇지 않은 보통의 인간들이기 때문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만일 그것이 그렇다면 주님은 제자들이 병든 자를 고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책망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은 이 일이 사람의 능력 부족에서 나온 일이 아니라 사람의 믿음 없음에서 나온 일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은 이전 선지자들이 오랜 세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알지 못하며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자를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거나 하늘에서 떡이 내려오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초자연적인 일이다.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람으로서는 전혀 할 수 없는 일이다. 여러분은 주님과 제자들과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일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자연적인 방법은 바른 섭생(攝生), 효과적인 제독(除毒), 적절한 운동, 편안한(긍정적인) 마음가짐, 이 네 가지이다. 즉 몸의 해독을 제거하고 잘 먹이고 잘 쉬게 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게 함으로써 병을 고치는 것이 바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의료 행위의 전부이다. 이것은 다 자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베푸신 구원 및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펼치도록 요구받은 사역은 이러한 자연적 의료 행위가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국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펼치는 일이었다. 그 중에 한 수단이 바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병을 못 고쳐서가 아니라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람의 일을 하지 못한 것은 사람의 성실성 부족과 의지의 부족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결국 '내가 한다'는 것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믿음이 없는 것과 (일을) 자기가 하려고 것이 어째서 같은가?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없으니) 나말고는 일할 사람이 없게 되니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나밖에 없는 것이고 나밖에 없으면 내가 계획하고 내가 지혜와 열심을 내서 일하는 것말고 다른 길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하지만 그것이 잘 안되는 이유는 하나님 대신 자기가 나서서 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일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내려놓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잘 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범사에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을 깊이 알아야 하며 자기를 깊이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반드시 그의 말씀(약속, 복음)을 깊이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큰 구원을 실제로 믿어야 한다.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인 죄인이며 하나님을 전혀 기쁘시게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임을 깨닫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을 이루셨으며 또한 그의 영을 통해서 우리로 그의 승리를 누리게 하시는 것에 대해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를 도우시며 이끄시며 우리로 그의 모든 뜻을 이루도록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께 복종하는 것은 생각이나 의지만 가지고 되지 않으며 반드시 계시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

기도와 금식은 이러한 믿음과 자기 부인을 나타내는 표현 형식이기 때문에 주님이 그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기도하거나 금식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님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른 표현 방식이므로 그 형식 자체에 주의할 필요는 없다. 기도와 금식, 안식일과 절기들의 준수, 할례, 제사 등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표현 방식이므로 오늘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형식은 어떠하든지 간에 믿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을 향한 부드럽고 열린 마음, 이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영원히 있어야 할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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