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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18:10-14)


천국에서 누가 크냐 하는 질문은 천국에서는 누가 소중하냐 하는 질문으로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큰 자인가? 어린 아이와 같이 스스로 작게 여기는 그 사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는 누가 소중한 자인가? 역시 어린 아이와 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그 사람이다. 주님이 소자(小子)라고 일컬은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아무 가치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그도 하나님이 지으셨고 하나님이 그를 위해 보내신 천사의 섬김을 받고 있고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이 있는 사람이다.

누가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그 작은 자인가? 우리가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현 상태에서 그대로 다 받고 사랑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사랑 받는 그 사람을 받고 사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과 달라서 하나님이 받는 사람은 받지 않고 하나님이 안 받는 사람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시각이 하나님과 일치한다면 우리는 다만 하나님이 우리 곁에 두시고 우리에게 붙이신 몇 사람들을 받으면 된다.

우리에게 있는 소자 곧 우리가 받아야 할 일차적인 작은 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소자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소자란 믿음이 적은 자 곧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롬14:1-15)

믿음이 약한 형제란 영적 체험과 지식이 적은 사람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그들은 교회 안에서 소위 영적 수준이 높다고 하는 신자들로부터 업신여김 또는 판단이나 정죄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은 앞선 형제들이 이런 사람들을 반드시 용납해야 하며 사랑으로 오래 참고 기다려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목적(영광)에 이르기까지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소자란 그리스도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하나님이 물리적으로 우리 곁에 두신 약하고 못난 사람들이다. 못났다는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크게 여김 받기(사랑 받기) 어려운 이런 저런 사유를 가졌다는 것이다. 단지 약하면 불쌍히 여기기 쉬운데 못나고 더 나아가서 못됐기까지 하다면 그렇게 하기 어렵다. 불쌍한 것이 아니라 밉고 싫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우리 곁에 있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정한 것도 아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들을 섬기며 살리도록 우리 곁에 그들을 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떠함은 곧 그들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판단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변수가 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섬김을 바라며 우리 곁에 서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의 소자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따지지 말고 받으며 섬겨야 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며 또한 선심 쓰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이고 천국 사역이고 의무이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면 잘못했을(안했을) 때 처벌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어떤 소자를 실족케 하면 목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져 죽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소자를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이 악평을 받도록 만드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가를 지적하신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일차적으로는 우리의 의무와 일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대해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자를 사랑해야 할 입장에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 자신이 소자로서 하나님과 사람의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을 사랑하러 나서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죄와 허물과 못남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사람들을 통하여 사랑해주시고 끝까지 받으시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일(섬김)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의 방식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이 땅에 아들(하나님,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 이것이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상대해야 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로 온 세상을 향하여 어떤 일을 하라고 하시지 않고 다만 우리 곁에 있는 소자를 사랑하며 받으며 그를 끝까지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우리가 직접 접촉하여 상대하며 사랑과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몇 명 아니면 몇 십 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우리 곁에 있는 한 두 사람 또는 몇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세상을 구원하며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과연 얼마나 기여하겠으며 얼마나 효과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왜 우리로 이렇게 일하게 하시는가?  

해 보면 알겠지만 우리가 사람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세심한 배려를 필요로 하고 얼마나 많은 수고와 인내와 희생을 필요로 하는지 다 말할 수 없다. 그것도 한 두 번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받으며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저히 여러 사람에게 무제한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우리로 소자를 사랑하며 섬기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도는 다만 우리로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 곧 아들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나타날 때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세상에 표현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세상에 임하여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의 실질적인 실현이며 마귀를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한 소자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그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단지 우리 곁에 있는 그 한 사람을 사랑하는 행동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우주 가운데서 자신의 왕 되심과 세상을 실제로 다스리고 계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많은 일을 하고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몇 몇 사람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지만 그가 세상에 계실 때 접할 수 있었던 사람은 제한적이었고 섬긴 사람 역시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끝까지 사랑했다. 이것을 통해 그는 세상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나타내었다.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기도를 통해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는 것은 그가 제자들을 사랑하며 섬긴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주님의 관심사는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세상에 표현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자기에게 붙여진 제자들을 끝까지 진심으로 사랑하셨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서는 문제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이다. 구제 활동이나 기타의 사회 복지 사업들은 그 사회 전체에 대해 얼마나 도움을 주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한 두 사람에게 집중하여 뜨겁게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다르다.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역은 세상 일과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 일의 성과를 따지며 효율을 따진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주님은 양을 잃은 목자 이야기를 하신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에도 나온다. 주님은 비유에서 백 마리의 양 중 단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나머지 양들을 놔두고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고 말씀하셨다. 나머지 양들은 어떻게 되는가? 혹시 그것들마저 잃어버릴 수도 있지 않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는 잃어버린 바 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처럼 어리석지 않고 똑똑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들은 현재 곤경에 빠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자는 멀쩡한 그들은 놔두고 어리석은 양을 챙기러 나서는 것이다. 만일 그들도 잃어버려진 바가 된다면 목자는 그들도 찾으러 나설 것이다. 길 잃은 양은 소자이다. 작고 못났고 뭔가 남보다 못한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들에게 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그 첫째는 목자가 양 백 마리 중 잃은 양 한 마리의 양을 찾아 길을 나선다는 방금 그 비유이고 둘째는 열 개의 동전(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은 여자가 그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는다는 비유이다. 셋째는 유명한 탕자 비유 곧 집 나간 둘째 아들의 비유이다.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 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相距)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15:11-24)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그를 정죄하지 않고 용서한 것은 물론이고 잔치를 베풀며 크게 환영을 해주었다. 그러자 집에 있던 맏아들은 기분이 언짢아져서 아버지께 항의를 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25-32)

한 보잘것없는 죄인을 긍휼히 여길 때 우리는 때로 그 일이 주변의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과 폐를 끼치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추운 겨울 밖에서 떨고 있는 거지를 받아들여서 방으로 들이는 것은 그 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히 불편을 준다. 왜냐하면 그의 몸은 더럽고 냄새가 심하게 나기 때문이다.

죄인은 무릇 향기롭지 못한 냄새를 피우는 존재이다. 이런 사람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언제나 어려움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효율과 능률이라면 우리는 많은 문제와 희생을 감수하고 몇 몇 죄인들을 영접하며 뜨겁게 사랑하는 일을 하지 않는 편이 전체를 위해서 나을 수도 있다.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생각이 그러했다. 이스라엘의 무지한 대다수의 민중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라고 말한 바리새인들의 말처럼 별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보잘것없는 작은 자들 곧 소자였다. 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무지뿐 아니라 각종 좋지 못한 버릇들과 고집까지 있었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은 그들을 단지 골치 아픈 존재로만 여기고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이 가난하고 질병으로 시달릴 때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을 조금도 긍휼히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그런 일을 당할만한 죄인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근거한 사랑, 우리에게는 이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과 자격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받아들이도록 종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그러한 행동이 온 세상 사람을 구원하는 큰 역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받아들이도록 종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칙은 말하자면 열 사람에게 밥 한 숟가락씩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밥 한 그릇 전체를 주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모른다. 다만 하나님이 그의 지혜로 일을 잘 하실 것을 기대할 따름이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지금 우리 안에서 이끄시는 대로 다만 따라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이해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일하신다. 그것을 통해서 다만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게 하신다.

이렇게 하면 일이 안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천국은 이런 작은 일들이 모여서 큰 역사를 이루는 과정 속에서 서게 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의 싸움이 겉으로 보이는 어떤 일이나 환경이나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 싸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귀와의 씨름이다. 눈에 보이는 일들은 다만 껍데기에 불과하다.

권세에 복종하는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이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그렇게 할 때 '일'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고 또한 그와 같이 사람에게 위임된 하나님의 위임 권세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그것이 일하는 데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리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동안 하나님의 일이 안 되었던 것을 알아야 한다.  

사울에게 쫓기며 긴 세월 동안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산 다윗은 그런 상황을 타개할 수많은 기회와 그런 행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수많은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즉 권위를 무시하고 사울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만일 자기와 가족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생각했더라면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미친 왕에게 시달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했더라면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기회를 봐서 사울을 없애고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것을 단지 실현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렇게 무리한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이 일이 단지 자기 삶의 안위 문제나 국가의 안위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의 싸움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과 마귀와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어두움의 주관자인 하늘의 악한 영들 곧 마귀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계시를 통해서 강조하고 계시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만일 그가 이런 저런 명분으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기 주를 쳤다면 그는 하나님과의 싸운 것이 되며 마귀와의 싸움에서 진 자가 되었을 것이다. 훗날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했을 때 나단 선지자는 그 일이 하나님의 원수로 하나님을 조롱하며 멸시할 거리를 만들어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릇 하나님의 위임 권세자, 하나님의 일을 대리할 사람이 범죄하는 것은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만드는 것이다.(삼하12:14) 적어도 사울에게 쫓길 때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권세를 거스려 반역하지 않은 것이다.

지난 주에 우리는 욥이 하나님 앞에서 큰 시험을 받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을 통과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일부 불평이나 원망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욥은 시험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행동했다.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이 다 날아갔을 때 욥은 도리어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다음과 같은 찬송을 불렀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0,21)

첫 번째 시험이 통하지 않자 마귀는 욥의 몸을 쳤다. 욥이 문둥병 비슷한 지독한 피부병에 걸려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그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 그때 욥은 이렇게 답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2:10)

욥기 저자는 이러한 그의 행동에 대해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재난이 마귀의 시험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가 그 싸움에서 승리했음을 증거했다.

다윗의 일이나 욥의 일은 세계적인 큰 사건이 아니요 단지 한 개인이 그 삶 속에서 겪은 작은 일들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은 우주적인 일이다. 그들의 승리는 우주적인 승리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기초석을 놓는 것과 같은 중요한 일인 것이다.

한 사람의 (한 사람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마귀가 태초부터 사람과 합작하여 항상 해왔던 불순종과 거역의 고리를 끊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종을 나타낸 일, 그리고 한 사람의 (시험을 이긴) 진정한 찬송을 통하여 마귀가 태초부터 사람과 합작하여 항상 해왔던 불평과 불만, 원망의 고리를 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의 본래 자리를 회복한 일, 그리고 한 소자(小子)를 조건 없이 사랑함으로써 마귀가 태초부터 사람과 합작하여 항상 해오던 바 선악을 따라 사람을 판단하며 다투고 미워하며 살인하는 일의 고리를 끊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우주적인 역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우리의 어떤 작은 행동들이 단지 사소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중요한 싸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싸움은 사람과의 싸움도 일과의 싸움도 아니고 오직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마귀와의 싸움이라는 사실도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제자들의 마음에 크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그에 따라 작은 자를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지난 번에 제자들이 귀신 들려 고통을 당하는 한 청년을 믿음이 없어서 고치지 못함으로 주님께 책망을 들은 것을 생각했다. 그때 그들의 문제는 믿음이 없다는 것이었다. 즉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선생인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것을 이루는) 역사에 대해 깊이 알고 순종하고 있었지만 제자들에게는 그런 인식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주님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주님은 자기 마음(생각과 감정)으로 사는 분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는 분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선생과 달랐다.

이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게 되었다.(요13:33-35)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었다. 그때 주님은 다시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이 말을 주님이 죽으러 간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말했다.(요13:36,37) 베드로는 주님이 죽으러 가기 때문에 자기들이 주님을 따를 수 없다면 같이 죽으면 되지 않느냐 하는 심정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의 이면에는 주님이 아직도 자기들을 주님과 같지 못한 자 곧 주님의 길로 온전히 행하지 않는 자들로 여기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지금도 주님과 같고 그의 길을 따르고 있으며 그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는 내가 가는 곳에 오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이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전에 주님이 유대인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을 상기시키셨다. 요한복음 7장과 8장에서 주님은 자기를 거절하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고(요7:33,34) 또한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요8:21)
이 주님의 말씀은 주님과 그들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님은 하늘에 속해 있고 그들은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2-24)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우리는 위로부터 난 사람인가 아니면 아래로부터 난 그대로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인가 아니면 하늘에 속한 사람인가? 우리가 만일 선악을 따라 판단하는 자라면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며 아래로부터 난 사람이다. 우리가 만일 (선악간에 판단하여) 우리 육신이 좋아하는 사람, 우리 마음에 드는 사람만 영접하는 자라면 우리는 주님이 가신 곳 즉 주님이 계신 곳에 가지 못할 것이다. 천국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다른 많은 양들이 멀쩡히 잘 있지만 작은 한 어린 양이 길을 잃은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그것을 찾고 영접하는 자라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천국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 작은 자를 단지 그가 하나님께서 내게 두신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그가 하나님이 내게 두신 머리라는 이유만으로 존중히 여기며 마음 깊이 받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수십 억 명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단지 두 사람 곧 아담과 그리스도 또는 첫 사람과 둘째 사람 이 둘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배후에는 성령과 악령, 그리스도와 마귀 이 둘이 있다. 우리가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요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할 줄 아는 자요 사람을 그 지으신 분으로 인해 사랑할 줄 아는 자라면 우리는 마귀를 이기는 자요 그것으로 세상을 회복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이다.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지 말라.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의 수십 억 명의 사람들에게 다 복음을 전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부유하심을 다 전달할 수 없다. 그들에게 먹을 양식과 정치적 자유와 육신의 평안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다만 우리 곁에 있는 작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영접하며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주적인 일임을 알아야 한다.

마귀는 항상 사람에게 큰 일을 하라고 부추긴다. 어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구원할 기세를 가지고 나선다 할지라도 마귀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작은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마귀는 두려워한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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