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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7)


지난 주에 우리는 소자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며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다. 오늘 여기 나오는 범죄한 형제 역시 그와 같이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소자(小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범죄한 형제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는 두 요소는 형제라는 것과 범죄했다는 것이다. 이 두 단어 속에 우리가 범죄한 형제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가 들어 있다.

범죄한 형제를 조심스럽게 대해야 할 첫째 이유는 그가 우리의 형제이기 때문이다. 형제라는 말은 그 역시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라는 말이다. 더러운 것이 묻어도 아들은 아들이다. 범죄해도 형제는 형제이다. 죄는 청산하고 용서받으면 되고 잘못된 길은 돌이키면 그만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심정이다.

둘째 이유는 그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범죄한 그 사람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그와 마찬가지로 죄인이다. 오늘은 그가 이러한 실패를 하고 내일은 내가 그 실패를 하는 것만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실패를 했지만 나는 저러한 실패를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심판자처럼 행할 수 있겠는가?

범죄한 형제를 대하는 교회의 입장은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가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십자가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십자가의 의미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주님이 그(의 죄)를 위해 이미 죽으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나 역시 그러한 이유로 주님을 죽게 한 죄인이라는 사실이고 셋째는 형제를 판단하고 심판하고자 하는 나 자신 역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의 태도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형제가 범죄했을 경우 그것은 다음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첫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 피해나 영향을 미치지 않은 범죄 곧 하나님 앞에서만 문제가 되는 범죄를 저지른 경우이고 둘째는 교회나 주위에 영향을 미칠 범죄를 저지른 경우이다. 이에 대해 주님은 어느 쪽이든 문제를 여러 사람들 앞에서 떠벌리지 말고 조용히 그 사람에게 가서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문제를 처리하라고 말씀하신다. 전체의 질서를 세우며 덕을 세우는 것과 개인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반드시 조화를 이루며 함께 추구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를 포기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확정되기까지는 최고로 신중하게 행동하여 양자를 다 추구하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형제의 범죄에 대해서 우리는 최후의 상황까지 갔을 때 비로소 교회에 말하고 교제의 단절이라는 징계를 내릴 수 있다.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심정, 형제의 심정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이 역시 소자에 대한 배려와 섬김의 태도를 강조하신 것이다. 어떤 죄인이 불쌍히 여겨야 할 소자의 입장에 설 것인지 아니면 교만하여 물리쳐야 할 마귀의 입장에 설 것인지를 그가 결정할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최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의 입장에서 다가가서 그가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를 접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불행하게도 그가 마귀의 교만을 나타내는 쪽으로 나온다면 우리는 그를 물리치는 쪽으로 결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형제를 살리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결국 그리스도가 승리하느냐 마귀가 승리하느냐 하는 영적 전쟁의 문제이다. 그리스도는 이미 승리하셨으며 그 생명으로 세상을 건지셨다. 문제는 이것을 나타내느냐 못 나타내느냐 하는 것이다. 지난 주에 조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로 이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 곧 아들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나타날 때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세상에 표현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세상에 임하여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의 실질적인 실현이며 마귀를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한 소자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그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단지 우리 곁에 있는 그 한 사람을 사랑하는 행동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우주 가운데서 자신의 왕 되심과 세상을 실제로 다스리고 계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많은 일을 하고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몇 몇 사람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지만 그가 세상에 계실 때 접할 수 있었던 사람은 제한적이었고 섬긴 사람 역시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끝까지 사랑했다. 이것을 통해 그는 세상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나타내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싸움은 어떤 일이나 환경이나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 싸움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귀와의 씨름이다. 눈에 보이는 일들은 다만 껍데기에 불과하다.

권세에 복종하는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이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그렇게 할 때 '일'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고 또한 그와 같이 사람에게 위임된 하나님의 위임 권세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그것이 일하는 데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리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동안 하나님의 일이 안 되었던 것을 알아야 한다.  

사울에게 쫓기며 긴 세월 동안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산 다윗은 그런 상황을 타개할 수많은 기회와 그런 행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수많은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즉 권위를 무시하고 사울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만일 자기와 가족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생각했더라면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미친 왕에게 시달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했더라면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기회를 봐서 사울을 없애고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것을 단지 실현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렇게 무리한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이 일이 단지 자기 삶의 안위 문제나 국가의 안위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의 싸움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과 마귀와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어두움의 주관자인 하늘의 악한 영들 곧 마귀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계시를 통해서 강조하고 계시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만일 그가 이런 저런 명분으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기 주를 쳤다면 그는 하나님과의 싸운 것이 되며 마귀와의 싸움에서 진 자가 되었을 것이다. 훗날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했을 때 나단 선지자는 그 일이 하나님의 원수로 하나님을 조롱하며 멸시할 거리를 만들어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릇 하나님의 위임 권세자, 하나님의 일을 대리할 사람이 범죄하는 것은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만드는 것이다.(삼하12:14) 적어도 사울에게 쫓길 때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권세를 거스려 반역하지 않은 것이다.

지난 주에 우리는 욥이 하나님 앞에서 큰 시험을 받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을 통과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일부 불평이나 원망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욥은 시험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행동했다.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이 다 날아갔을 때 욥은 도리어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다음과 같은 찬송을 불렀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0,21)

첫 번째 시험이 통하지 않자 마귀는 욥의 몸을 쳤다. 욥이 문둥병 비슷한 지독한 피부병에 걸려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그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 그때 욥은 이렇게 답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2:10)

욥기 저자는 이러한 그의 행동에 대해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재난이 마귀의 시험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가 그 싸움에서 승리했음을 증거했다.

다윗의 일이나 욥의 일은 세계적인 큰 사건이 아니요 단지 한 개인이 그 삶 속에서 겪은 작은 일들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은 우주적인 일이다. 그들의 승리는 우주적인 승리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기초석을 놓는 것과 같은 중요한 일인 것이다.

한 사람의 (한 사람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마귀가 태초부터 사람과 합작하여 항상 해왔던 불순종과 거역의 고리를 끊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종을 나타낸 일, 그리고 한 사람의 (시험을 이긴) 진정한 찬송을 통하여 마귀가 태초부터 사람과 합작하여 항상 해왔던 불평과 불만, 원망의 고리를 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의 본래 자리를 회복한 일, 그리고 한 소자(小子)를 조건 없이 사랑함으로써 마귀가 태초부터 사람과 합작하여 항상 해오던 바 선악을 따라 사람을 판단하며 다투고 미워하며 살인하는 일의 고리를 끊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우주적인 역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우리의 어떤 작은 행동들이 단지 사소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중요한 싸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싸움은 사람과의 싸움도 일과의 싸움도 아니고 오직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마귀와의 싸움이라는 사실도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제자들의 마음에 크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그에 따라 작은 자를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지난 번에 제자들이 귀신 들려 고통을 당하는 한 청년을 믿음이 없어서 고치지 못함으로 주님께 책망을 들은 것을 생각했다. 그때 그들의 문제는 믿음이 없다는 것이었다. 즉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선생인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것을 이루는) 역사에 대해 깊이 알고 순종하고 있었지만 제자들에게는 그런 인식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주님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주님은 자기 마음(생각과 감정)으로 사는 분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는 분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선생과 달랐다.
이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게 되었다.(요13:33-35)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었다. 그때 주님은 다시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이 말을 주님이 죽으러 간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말했다.(요13:36,37) 베드로는 주님이 죽으러 가기 때문에 자기들이 주님을 따를 수 없다면 같이 죽으면 되지 않느냐 하는 심정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의 이면에는 주님이 아직도 자기들을 주님과 같지 못한 자 곧 주님의 길로 온전히 행하지 않는 자들로 여기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지금도 주님과 같고 그의 길을 따르고 있으며 그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는 내가 가는 곳에 오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이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전에 주님이 유대인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을 상기시키셨다. 요한복음 7장과 8장에서 주님은 자기를 거절하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고(요7:33,34) 또한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요8:21)
이 주님의 말씀은 주님과 그들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님은 하늘에 속해 있고 그들은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2-24)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우리는 위로부터 난 사람인가 아니면 아래로부터 난 그대로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인가 아니면 하늘에 속한 사람인가? 우리가 만일 선악을 따라 판단하는 자라면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며 아래로부터 난 사람이다. 우리가 만일 (선악간에 판단하여) 우리 육신이 좋아하는 사람, 우리 마음에 드는 사람만 영접하는 자라면 우리는 주님이 가신 곳 즉 주님이 계신 곳에 가지 못할 것이다. 천국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다른 많은 양들이 멀쩡히 잘 있지만 작은 한 어린 양이 길을 잃은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그것을 찾고 영접하는 자라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천국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 작은 자를 단지 그가 하나님께서 내게 두신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그가 하나님이 내게 두신 머리라는 이유만으로 존중히 여기며 마음 깊이 받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수십 억 명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단지 두 사람 곧 아담과 그리스도 또는 첫 사람과 둘째 사람 이 둘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배후에는 성령과 악령, 그리스도와 마귀 이 둘이 있다. 우리가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요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할 줄 아는 자요 사람을 그 지으신 분으로 인해 사랑할 줄 아는 자라면 우리는 마귀를 이기는 자요 그것으로 세상을 회복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이다.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지 말라.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의 수십 억 명의 사람들에게 다 복음을 전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부유하심을 다 전달할 수 없다. 그들에게 먹을 양식과 정치적 자유와 육신의 평안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다만 우리 곁에 있는 작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영접하며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주적인 일임을 알아야 한다.

마귀는 항상 사람에게 큰 일을 하라고 부추긴다. 어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구원할 기세를 가지고 나선다 할지라도 마귀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작은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마귀는 두려워한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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