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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이것은 세상 죄인을 대하는 주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사람을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그리스도의 길이다. 형제가 범죄했을 때 무슨 건수나 잡은 것처럼 신이 나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떠벌리고 심판자처럼 나서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길이 아니다.

옛날에 안창호 선생이 대성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몇몇 학생들이 학교 일에 불만을 품고 교장실로 뛰어들어와서 안창호 선생을 폭행했다고 한다. 그때 안창호 선생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보지 않기 위해 즉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고 한다. 나중에 그 일을 안 다른 선생들이 왜 그들을 누군지 알아놨다가 잡아서 벌하지 않고 그렇게 얼굴을 가렸느냐고 물었다. 그때 도산 선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그 아이들은 다 내 제자들이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 크게 쓰여야 할 아이들입니다. 이 일은 젊은 아이들이 혈기로 잠깐 잘못을 저지른 것인데 만일 내가 누가 그런 일을 했는지를 알게 되면 나도 인간인지라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감정을 가지고 공평하게 대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앞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지장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나는 누가 나를 때렸는지 알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누가 그런 일을 했는지를 모르면 시간이 흐른 후 이 일은 그저 지나간 작은 일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고 큰 뜻이 있는 사람은 시련이 닥쳐와도 그것들을 헤치고 결국은 뜻을  이루게 된다. 대성학교는 안창호 선생이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는 청년들이 좋은 교육을 받아서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나도록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자신이 세운 학교였다. 이처럼 나라를 사랑하고 청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학교를 세운 도산 선생은 어떻게든 아이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내어야 할 목표와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혼내고 때려잡을까 하고 생각할 수 없었고 오직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게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작은 명예나 이익에 매이지 않고 큰 뜻을 추구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볼 때는 큰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을 사소한 일로 돌림으로써 거기에 걸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선생에게 배운 아이들이 결국 또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키워줄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할 때 무엇을 보고 있으며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죄인들의 냄새나는 흔적들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하늘의 보화로 단장한 새 사람, 하늘에서 내려오는 어린 양의 신부를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가 교회를 주님의 몸이요 영광스러운 신부가 되도록 키워지는 존재로 안다면 그 속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반드시 적극적인 소망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소망을 가질 때 우리는 형제들의 문제에 대해 전향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로 대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합당하게 형제의 문제를 다루는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전향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로 형제를 대하는 것인가? 주님은 먼저 문제 있는 형제를 조용히 권면함으로써 생명의 길로 돌이키게 만들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갈라디아교회에게 한 바울의 다음 말씀을 상기하게 된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6:1-5)

바울은 우리에게 형제의 범죄를 대할 때 세 가지 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첫째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를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18장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조용히 형제를 권면하여 죄를 버리도록 도우라는 것이다. 둘째는 그 일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이 자기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오늘 그 형제의 실패는 내일의 내 실패일 수 있으며 그 형제는 이 죄를 지었지만 나는 저 죄를 짓고 있을 수 있음을 깨닫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죄에 빠지지 않도록 근신하며 회개할 것이 있으면 회개하라는 것이다. 셋째는 형제의 문제는 그 사람 개인의 문제가 아니요 교회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여 형제의 짐을 나누어지라는 것이다. 지체의 문제는 곧 몸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를 살리고 온전케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기에 필요하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형제의 회복을 위해 우리가 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짐은 그를 정죄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며 받아주는 것이다. 문제가 없는 사람, 좋은 사람을 받는 것은 쉽지만 문제가 있고 못난 사람을 받는 것은 나까지 문제 있는 사람의 반열에 들게 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짐을 진다고 하는 것이다. 일은 저 사람이 저질렀는데 해결은 내가 해야 한다면 그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공동 운명이라는 것이 본래 그런 것이다.

어제 뉴스에 보니 한 가난한 가정의 아들이 수신자부담으로 걸려온 국제전화를 2달 동안 매일 몇 시간씩 받았더니 전화요금이 2500만원이 나와서 결국 그 아버지가 전세금 2000만원을 빼서 그것을 갚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아버지는 한 달에 100만원밖에 못 벌기 때문에 정부에서 보조금을 50만원씩 받아서 사는 가난한 사람이고 그 집은 이십 년 동안 노력해서 그나마 겨우 전셋집이라고 하나 얻어놓은 것인데 엄동설한에 길바닥으로 나앉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아들은 고등학교 2학년인데 중국에 유학 가 있다는 한 여대생과 채팅을 하다가 알게 되어 매일 서로 전화로 몇 시간씩 이야기를 주고 받아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는 그 전화가 저쪽에서 걸려왔기 때문에 자기가 요금을 내야 하는 줄 몰랐다고 한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울화통이 치밀고 뭐 그런 놈이 있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지만 그 아버지는 아들을 정죄하고 심판하기보다는 그를 어떻게든 키워내야 하니 아들의 잘못을 자기가 안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의 길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형제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결국 그를 (내가 그를) 용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내고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만들고 그리하여 그를 살려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이 마음이 없다면 결국 교회는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이리저리 찢겨져서 마귀가 원하는 대로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은 죄인을 정죄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납하고 나의 생명을 그에게 줌으로써 되는 것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과 같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이것은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임 권세가 어떠한가를 말해준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하며 하나님의 권능을 행사함으로써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표한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라고 표현한다.

이 권세는 가히 무제한적인 권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2-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누구에게 이런 권세가 위임되는가? 주님을 믿는 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거하는 자이다. 곧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하는 그 사람에게 이런 권세가 주어지며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통하여 이 땅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신다.

사람을 묶거나 푸는 일을 생각해 보라.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우리는 감히 생각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묶거나 푸는 것이 단순히 사람의 육신적 형편을 좋게 해주거나 곤란하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묶거나 푸는 것이라면 이것은 참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 이런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설사 이런 권세를 행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시행되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는가?

이것은 결코 형식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세가 아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일 자체도 엄청난 일이거니와 그보다 더한 것은 이 일이 자기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아버지, 보내신 분)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만일 일이 잘못되면 하나님이 불의한 분이 되거나 마귀에게 조롱과 참소를 당할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이런 일을 위임하시지 않으며 오직 그의 생명을 받아서 온전히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람에게만 이런 일을 위임할 수밖에 없다.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오직 보내신 분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자 즉 십자가를 철저히 거친 자만 하나님의 위임 권세를 구사할 수 있다. 목사나 신부나 교황이라는 직위나 누군가가 준 임명장이 이런 일을 가능케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일을 하고 싶어서 자기가 스스로 나선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직 그 생명과 인격, 그 마음의 어떠함이 관건이다. 주님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서 사람을 진실로 살리기를 원하고 사람을 사랑하여 자기를 기꺼이 주기까지 하려는 사람만이 사람을 살리고 온전케 할 수 있다.

자기가 어둠(죄)을 사랑하고 빛을 싫어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그 인생을 밝히고 해방시킬 수 없으며 자기 속에 사람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하며 구원을 수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십자가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사람을 살려주고 풀어주고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위임 권세를 절대로 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의 죄를 모르는 그 사람, 자기를 옳다 하며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오래 참음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르면 하나님의 사랑을 대행할 수 없다. 자기가 죄가 없고 온전한(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필요도 없고 따라서 그것의 의미 즉 용서와 긍휼과 은혜의 의미를 알 수도 없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용서)를 베풀 수 없는 것이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판단하고 정죄하기 바쁘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던 주님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그 형제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와 실패에 대해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과 그 무리들을 하나로 생각하기조차 싫어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민중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는 정죄와 심판 아니면 고작해야 "나로 네 눈에 있는 티끌을 빼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자신의 눈에 티끌보다 몇 십 배나 큰 들보 같은 것이 박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대표자가 될 수 없었고 권세가 없었고 사람을 건지지도 온전케 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은혜를 모르는 자, 긍휼과 용서와 조건 없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리인이 될 수 없다. 세상(죄인)을 사랑하사 아들을 아끼지 않고 보내신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건지는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同官)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15-17)

다른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곱 번도 많지 않은가? 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잘못을 일곱 번씩 저지른다면 우리는 그것을 용서하기가 무척 어렵게 될 것이다. 하물며 주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문제의 답은 오직 '너희는 (너희 자신이)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몇 번이나 용서를 받기를 원하는가 하는 문제의 답을 적용하면 된다. 여러 분은 몇 번이나 용서를 받고 싶은가? 만일 하나님이 범죄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면 또는 (지금은 예수를 믿는 것으로 천국에 들어가니)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거나 성령께 순종을 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자신 있는가? 자신이 없다면 용서를 받아야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의 정신으로 무조건 봐줘야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용서를 몇 번이나 받으면(해주시면) 됐다고 하겠는가? 일곱 번 정도 같으면 우리는 벌써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 7x70 해 가지고 490번 용서를 해 주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491번째 용서를 바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 중 아무도 낯짝이 있지 그렇게까지 어떻게 용서를 바랄 수 있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방도 마찬가지 처지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접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느냐 못하고 있느냐 하는 바로 이 한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율법과 선지자 즉 성경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위의 예에서 나온 왕의 신하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며 자신을 모르는 것이며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2,13)

자유의 율법이란 그 앞에서 야고보가 말한 최고의 법(2:8)과 같은 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나타난 정신 곧 은혜의 정신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의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의 법이란 신자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그리스도)의 생명(마음) 자체를 가리킨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역사한다. 우리가 이 생명을 따라 행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형제들을 용서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생명은 우리로 우리의 죄인됨을 깨닫게 하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게 만들 것이다. 또 그로 인해 나보다 약하고 못난 형제들을 멸시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게 만들 것이다.

사람이 일반 율법대로 심판을 받는다면 그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살인을 하지 않은 자라도 간음을 하는 경우가 있고 살인과 간음은 하지 않아도 다른 죄를 저지른 경우에 그는 살인과 마찬가지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의 벌-삯-은 사망이다.) 오직 아무 죄도 범하지 않은 자만 심판을 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일반 율법대로 심판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된다면 그것은 곧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무리 선한 사람일지라도...

그것말고 자유의 율법 곧 최고의 법인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의 원리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때는 생명의 법에 충실한 사람은 심판을 통과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생명의 법에 충실하다는 것은 아버지(하나님)의 마음에 충실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긍휼의 정신을 가지고 사람을 대했느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2-15)

야고보가 말한 바 긍휼을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따를 것이라는 말씀이나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의 과실을 용서치 않으실 것이라는 이 말씀이나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인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말씀은 모두 같은 말씀이다. 하나님이 그 자녀들에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시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어떤 생명이며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그 안에서 거듭난 사람의 정상적인 모습(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우기 위함이다.

나는 형제들이 다른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용납하는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오늘 이 자리에게 여러분들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강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또 하나의 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요구하고 싶지 않다. 내가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나와 여러분을 오래 참고 용납하며 사랑해 오셨고 그 덕에 여러분과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너그럽고 더 조건 없이 사람을 사랑하는 어떤 분들을 우리 앞에 두심으로써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표현해 오셨다. 그들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누렸다. 나는 다만 이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앞으로 그럴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누려온 것보다 더 많이 체험하고 더 많이 누리고 싶다. 나는 지금도 나를 책망하고 판단하며 가르치는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고 용납하며 따뜻하게 격려하는 사람을 훨씬 더 필요로 한다. 물론 내 죄를 지적하고 내 허물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유익을 얻고 성장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보다는 나를 사랑하고 격려하며 용납하는 사람들의 사랑 안에서 유익을 얻고 성장한 부분이 훨씬 크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나고 살찌고 죄의 길에서 돌아서는 것은 지식의 많아짐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들어와서 역사할 때 되는 것이다. 물론 가르침과 교훈과 책망은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성령의 손에서 쓰일 때 효과가 있는 것이다. 교회 역사를 통해 볼 때 성령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정죄하는 말을 통해서 역사하기보다는 사람을 사랑하고 오래 참고 용납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의 음성을 통해서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변화시켜 오셨다. 나의 체험과 여러분의 체험이 그것을 말해준다.

나는 내 개인적으로 앞으로도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 체험하기 원한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내 곁에 두신 사람들의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나를 더 깊이 사랑하고 용납해주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더 깊이 체험하고 그 사랑과 은혜를 더 깊이 알게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형제들을 사랑하고 살리시는 역사를 할 때 내가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표현해내는 사람으로 영원히 남기를 원한다. 심판 역할은 모세가 맡아서 하고 나는 주님처럼 사람을 사랑하고 용납하며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

우리는 다 서로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가르침과 판단과 정죄는 성령께서 각 사람 안에서 직접 하시든지 아니면 형제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나 다른 방법으로 하시도록 맡겨놓고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하는 자로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이 저를 일시적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하거나 비방하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그것을 내게 달려와서 고지해주지 않기를 바란다. 안창호 선생처럼 나는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온유한 책망을 받기에나 합당한 수준의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어떤 사람이 형제들 안에 있는 더 큰 것(하나님의 마음)을 끄집어내어서 내게 전달해 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여러분도 서로 그와 같이 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12: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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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오직 예수만 (마17:1-8) / 2005. 9. 25 이상봉 2010.04.30 3531
127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함 (마16:20-26) / 2005. 9. 18 이상봉 2010.04.30 3614
126 교회의 권세 (마16:15-19) / 2005. 9. 11 이상봉 2010.04.30 3780
125 교회의 기초 (마16:13-20) / 2005. 9. 4 이상봉 2010.04.30 3855
124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마16:13-20) / 2005. 8. 28 이상봉 2010.04.30 3784
123 하늘로부터 온 표적 (마16:1-12) / 2005. 8. 14 이상봉 2010.04.30 3990
122 하나님의 나라와 믿음 (마15:21-28) / 2005. 8. 7 이상봉 2010.04.30 3873
121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 (마15:11-20) / 2005. 7. 31 이상봉 2010.04.30 5839
120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마15:1-20) / 2005. 7. 24 이상봉 2010.04.30 4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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