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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용서 (마18:21-35) / 2005. 12. 4

2010.04.30 15:33

이상봉 조회 수:3618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우리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왔는데 그 까닭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허물을 가진 죄인이요 또한 그런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용서하고 모든 문제를 다 덮고 넘어간다면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되며 하나님의 공의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용서는 문제를 덮고 적당히 넘어가는 행위가 아니라 다만 일을 내 손에서 하나님의 손으로 넘기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용서란 없다. 죄는 용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죄는 다 심판되어야 하며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성질과 맞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에서 죄는 용납될(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결국 사람이 형제의 문제를 직접 다루지 말고 하나님의 손에 넘기라는 말이다.  

내가 어떤 (범죄한) 형제를 용서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참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며 존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내 생각과 견해를 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과 조치를 인정하며 존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란 실상은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몇 번이나 용서를 해야 하는가 하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주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비유를 드셨다. 이 비유에서 주인공은 빚진 관리이지만 중심은 그에게 돈을 꾸어준 임금이다. 임금이 중심인 까닭은 그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권세자이기 때문이다. 관리는 왕의 긍휼로 인해 빚을 탕감 받았고 또한 그의 분노로 인해 도로 감옥에 갇혔다. 여기서 임금은 물론 하나님을 말한다. 우리 삶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모든 일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다. 나도 아니고 상대방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그를 의식해서 하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 즉 죄 지은 자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도 있지만 바깥에도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권세 때문이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우리 자신도 죄인이고 우리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유로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라면 용서의 이유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용서가 믿음의 문제와 연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형제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는 문제뿐 아니라 무릇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신 모든 율법과 행위들은 다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믿고 존중하느냐 하는 것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용서도 그와 같이 믿음의 표현 차원에서 신자에게 요구된 것이다. 형제를 용서하고 안하는 이 행위를 통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사람을(나를) 긍휼과 인애로 받으셨는가 하는 것과 우리의 수많은 죄와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만일 앞에서 말한 바들을 믿고 있다면 나는 형제를 그의 행위와 자격과 조건에 관계없이 용서하고 받아주게 될 것이고 믿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근거가 나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라고 참으로 믿고 있다면 이제 우리의 행동 원리는 사람의 행위를 선악간에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과 긍휼의 정신으로 행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따라 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를 용서하라는 것은 단순한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든지 이것은 해도 되고 저것은 하면 안된다든지 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은 우리의 모든 행동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기준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다른 것들은 그만큼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이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우리 행동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동료에게 100 데나리온을 빌려준 관리가 그를 닦달해야 할지 봐주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자기 기분이나 마음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견해도 아니고 오직 왕의 마음이다. 왕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을 안다면 그는 무조건 자기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우리 삶은 진실해야 한다. 그리고 진실한 삶이란 모든 것을 진리를 따라 행하는 삶이다. 무엇이 진실한 삶인가? 어떻게 살아야 진실하게 사는 것인가? 진리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므로 진실한 삶이란 바로 이것을 따라 사는 삶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삶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것을 실행한다는 것은 삶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여유를 나타내는 것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4,5,12,13)
이것이 바로 믿음이고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 까닭에 여유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려워하지 않음, 안식함, 남의 허물을 용서함, 남의 것을 탐하거나 빼앗지 않음, 나눠주기를 좋아함, 권세자에게 복종함, 심판을 하나님께 미룸(내가 직접 심판하지 않음)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용서는 사랑일 뿐 아니라 믿음이고 공의를 이루는 것이다. 용서가 어떻게 의를 이루는 것이 되는가?

첫째, 내가 직접 심판하지 않고 하나님이 심판하게 함으로써 완전한 공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의 심판은 불완전하며 진실하지 못하다. 인간의 심판은 죄인이 죄인을 심판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자격 문제뿐 아니라 언제나 지나치고 왜곡되기 쉽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다. 인간의 심판은 종종 마귀의 사주를 받아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혈기와 분노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심판은 언제나 지나치며 공정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그 심판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세우지, 나타내지) 못한다.

둘째, 내가 심판할 때는 심판밖에는 안되지만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는 그의 아들의 희생을 통한 구원이 가능하다. 내가 심판할 때는 공의는 이루어지지만 사랑과 구원 즉 사람을 건져내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공의와 사랑이 다 이루어진다.

내가 직접 심판하면 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며 구원을 이룰 수 없는가? 사람 안에는 의가 없기 때문이다. 의가 없어서 자기도 심판을 받는 마당에 무슨 수로 남을 구원하며 하나님의 의를 이루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심판하시면 (그 사람에게는 의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그를 의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의 전가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의가 없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자기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 또한 자기 자신도 의로우심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의 특징이며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의다. 이것은 단순한 의가 아니라 사랑을 내포한 의다. 이것은 사람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셨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0-26)

우리의 의가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 이것이 바로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얻어내는 의다. 그러므로 죄인이 사람의 손에 맡겨지면 아무 희망도 없지만 하나님의 손에 맡겨지면 희망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죄를 범했을지라도 바로 심판하려고 나설 것이 아니라 그가 죄 가운데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는 의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의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먼저 나서서 직접 심판하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손에 먼저 맡겨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7-21)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취소서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을 주소서 ...열방을 징벌하시는 자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자가 징치하지 아니하시랴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 판단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좇으리로다"(시94:1-15)

이 시에서 시인은 두 가지 징계(심판)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는 교만한 자에 대한 심판 곧 의인 또는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하나님의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교육 차원에서의 징계이다. 같은 심판이라도 하나님은 죽일 자를 죽이고 살릴 자를 살리는 심판을 하시는 것이다. 자기 백성에 대한 심판과 원수에 대한 심판이 다른 것이다. 사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이것을 한다면 누가 그렇게 대상을 구분하여 적절히 처리할 수 있겠는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오직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를 직접 징계하지 말고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만 한다.

다윗이 자기를 멸시한 나발이라는 악인을 심판하러 나섰을 때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이 다윗을 가로막고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삼상25:26-31)

아비가일이 한 말은 무엇인가?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무죄한 피를 흘렸다는 말을 듣거나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않고) 친히 원수에게 보수(報 ,복수)했다는 말을 듣는 일이 없도록 신중히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나발을 치려던 자기의 행동을 중지하며 아비가일을 통해 자기의 걸음을 막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리고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행동을 칭찬했다.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삼상25:32,33)

다윗이 자기 원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은 것이나 나발을 직접 징계하지 않은 것은 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그 권세와 주권을 존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사울은 전쟁터에서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었고 나발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징계로 인해 갑작스럽게 죽었다.
보수(심판)는 하나님의 것이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직접 징계와 심판을 집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에 따라 공의롭게 진행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안에서 사사로운 징계와 복수는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구약 시대 각 성읍마다 있었던 도피성은 고의성 없이 살인을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이것은 결국 긍휼히 여김 받을 여지가 있는 죄인이 그대로 사람의 손(심판)에 넘겨지지 않고 하나님의 손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마련하신 장치였다.

다윗은 이런 원리를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가 임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다.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 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삼하24:10-14)

우리 자신이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도 우리 손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빠지도록 해 주는 것이 합당하다. 그 길은 우리가 직접 심판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대접이요 마땅한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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