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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과 생명 (마19:1-12) / 2005. 12. 11

2010.04.30 15:34

이상봉 조회 수:3658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혼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즉 이혼이 정당한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일인지를 물었다. 그들이 그것을 물은 것은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주님이 이혼이 가능하다(옳다)고 하면 주님을 결혼의 신성함을 무시하는 자라고 비난할 것이고 이혼을 불가능하다(그르다)고 하면 '율법(신명기 24:1-4)에 이혼할 때 이혼증서를 주어 아내를 내보내라는 말씀이 있는데 당신은 어째서 모세를 무시하고 율법을 무시하는가?' 하고 비난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주님은 아무런 정치적 고려도 없이 분명한 태도로 이혼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여기서 주님은 사람들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형편(결혼하고 이혼하는 현실)이 어떠하냐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무엇이냐 즉 하나님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계시며 어떻게 정해놓으셨느냐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혼의 현상(現狀, 현실적으로 이혼이 일어날 수 있느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혼의 실제(實際,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여러분이 바리새인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답하겠는가? 내가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질문을 한 사람에게 반문하겠다. '몸은 둘로 나누어질 수 있는가 없는가?' 아마 나누어질 수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왜 그런가? 산 사람이라도 칼로 두 쪽 내면 나누어지기야 하지만 실제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므로 '몸은 나누어질 수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전혀 어렵고 복잡한 문제가 아니고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한 몸은 둘로 나누어질 수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이혼도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늘 (진리가 아니라) 현상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종종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매사에 성령을 따르는 것이며 속에서 역사하는 생명의 흐름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것이 우리 삶의 원리이다. 이것이 영(아들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의 마땅한 태도이다. 우리가 영을 따라 행한다면 아내를 버리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이혼은 오직 상대가 나를 버리거나 간음으로 인해 스스로 떨어져 나갔을 때만 가능하다.(고전6:16-18)

간음을 한 경우에 이혼이 가능한 것은 음행이 하나로 연합된 몸(두 지체)을 찢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간음하는 사람은 몸이 상대방 간음자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6,17) 창녀와 자는 사람은 창녀와 한 몸이 되는 것이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 몸이 된다. 이것이 연합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간음한 사람은 상대 음행자와 한 몸이 되며 이전의 몸은 찢어진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이혼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개가 손가락을 물어뜯어서 손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개가 손가락을 물어뜯어서 먹어버렸다면 그것은 이미 개의 몸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분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물론 배우자가 간음을 하더라도 그것을 용납하고 그대로 살 수도 있지만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로 연합된 두 몸은 (사고로) 찢어지기 전에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간음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로봇과 같은 기계는 모르겠지만 사람은 필요하다고 해서 팔이나 다리를 떼어내는 일을 할 수 없다. 그것은 생명의 길이 아니다. 그것은 분리가 아니라 찢는 것이며 사망의 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은 아내나 남편을 내어버릴 수 없다.  

지금 말하는 이것은 길과 진리를 말하는 것이며 하나의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능하다고 해서 무엇이라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생명의 속성을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생명의 길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 세상에는 없는 일이 없고 못하는 일이 없다. 세상은 그 육신의 욕망과 필요에 따라 무엇이라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우리 삶은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길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격 차이나 상대가 무능하다거나 하는 이유로 하나님의 자녀가 배우자를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허락이나 금지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다.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게 욕을 하는 사람은 공회에 잡히게 되고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라.(마5:22) 율법도 이런 율법이 없다. 이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형 선고이다. 십자가도 이런 십자가가 없다. 이런 원칙이 적용된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세상과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대로 살면 망한다. 욕을 하든지 안하든지 망한다. 그리고 이혼을 하든지 안하든지 망한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지 않고 육신대로 사는 사람은 아내를 패고 쫓아내는 사람이나 늙도록 오순도순 사는 사람이나 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이혼을 하느냐 안하느냐가 아니라 육으로 사느냐 영으로 사느냐이며 정당한 사유로 이혼하느냐 부당하게 아내를 내버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자기대로 행하느냐 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살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행한다면 이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형제를 욕하는 일도 할 수 없다.

오늘날 사람들이 마음대로 결혼하고 마음대로 이혼하는 것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것은 생명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다.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절박하고 타당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만 가지 이유를 대더라도 그것은 다 육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결혼하고 마음대로 이혼하는 것은 그들이 생명을 잃어버렸거나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이 내신 길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행할 수는 있으나 '무사히'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명의 길을 벗어나서 행하면서 생명을 풍성케 하고 온전히 보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결혼의 목적이나 이혼의 목적은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길로 행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누릴 수는 없다. 어떤 결혼은 실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잘못된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물리고 싶고 돌이키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물론 그것도 자신의 선택이므로 자신이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잘못된 선택을 돌이키기 위해 이혼이라는 손쉬운 방법을 택한다. 그러나 그것은 고려할 수 없는 방법이다. 그것은 마치 삶이 힘드니까 죽음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문제 해결의 방법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결혼 생활이 어려우니까 이혼을 생각하는 것은 팔이 불편하니까 잘라내 버리려는 것과 같다. 정말로 그럴 마음이 있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문제 해결을 도모할 수 있다. 살려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가야 한다. 살려면 생명의 길로 가야지 죽는 길로 가면서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만일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성령께 복종한다면 아무리 어렵게 꼬인 결혼 생활도 다 풀 수 있다.  

문제는 결국 사람이 영을 좇아 행할 것인가 아니면 육을 좇아 행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육적 요구를 만족시킬 것인가 아니면 생명(영)의 요구를 만족시킬 것인가? 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성령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우리의 근본 원리는 오직 아들(영)의 생명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사랑과 긍휼의 정신으로 행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으며 참고 기다리시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배우자에 대해 '도저히 안되겠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마음에 안 드는 남편이나 아내를 버릴 것 같으면 주님이야말로 매일 그렇게 하실 일이다. 우리를 불러 당신의 신부로 삼으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버릴 사유'를 찾는다면 매일 그런 사유가 나오지 않겠으며 따라서 매일 버림을 받아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은 우리가 온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은혜로 대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 문제이다. 우리는 형제를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이나 아내를 용납하고 받아주는 것을 선악간의(율법적) 판단 기준으로 행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법적으로 하면 우리는 벌써 하나님께 저주와 버림을 받았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나 음녀를 받아서 용서하고 아내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탕자를 용서하고 집으로 받아들이신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여기 있는 것이다. 이 체험을 한 사람들은 이러한 정신으로 행함으로써 은혜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이혼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있어서 이혼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상대방이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상대방이 나를 버린다면 일이 가장 간단하다. 그럴 때 우리는 버림을 받는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다. 내가 잘났는데도 상대가 못 알아봐서 버림을 받아도 괜찮고 내가 실제로 버림을 받을 만큼 못났기 때문에 (합당하게) 버림을 받아도 괜찮다. 내가 버림받을 만한 이유가 없이 (잘 났는데도) 버림을 받는다면 우리는 매우 억울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상대를 만족시킬 수 없는 못난 사람이어서 버림을 받는다면 우리는 수치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느 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상이 어리석고 악해서 나를 버려도 그럴 수 있는 일이고 세상이 사랑이 없고 여유가 없어서 (못난) 나를 버려도 그럴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사람인 나를 버리는 사람은 그가 세상이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여유, 하나님의 관용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망할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그리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 육은 분노와 수치, 두려움과 절망으로 끓어오르겠지만 우리 속에 있는 주님은 그것을 자유와 해방으로 보시며 새로운 삶으로의 도약 기회로 보신다. 그러므로 혹 우리가 (우리의 못남으로 인해) 버림을 받았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한 상대방이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요구할 때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 질 수 없는 짐을 거부하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상대방이 폭력과 억압을 행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도 있다. 즉 도망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 올 때 그것을 피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결혼과 이혼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삶)을 보존하느냐 보존하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은 결혼이고 뭐고 다 놔두고 도망가서 그 생명을 보존해야 한다. 하나님은 결혼의 의무를 위해 약자더러 강자에게 깔려죽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이럴 때는 문제가 간단하다.

그러나 내 사정으로 인해 상대방이 원치 않는데도 내가 그를 버리는 일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참으면 될 일이라면 참아야 한다. 어느 정도까지가 아니라 끝까지 참아야 한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는 한계가 없다. 그런 인내와 용납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다. 또 내가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더라도 우리는 그것과 맞써 싸우거나 도망갈 궁리를 하기 전에 먼저 그것을 하나님께 내놓고 의뢰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정 그래도 안될 때 피하거나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과 믿음이다. 계속 사느냐 이혼하느냐 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참된 믿음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그것을 넘어선다.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사람과 일 자체를 먼저 보지 않고 하나님을 먼저 보는 것이다. 저 사람이 내게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지 않고 저 사람이 왜 저렇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이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마귀의 시험 때문일 수도 있고 내 잘못 때문일 수도 있고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우리 자신이  마귀에게 속아서 별 것도 아닌 문제를 엄청나게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이 전부가 아니다. 신자가 겪는 모든 일의 이면에 여러 가지 영적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상황 속에서 이것을 보면 사람에 대한 원망과 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다. 문제의 관건은 하나님과 마귀이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영적 세력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마귀는 대적하고 하나님은 가까이하는 것이다.

이혼을 하는 것은 정확하게 마귀가 좋아하는 대로 상황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혼뿐 아니라 다른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상황을 부정적이고 어두운 쪽으로 설정하고 그 방향으로 풀어 가는 것은 옳지 않다. 상황을 생명의 길과 반대되는 쪽으로 설정하고 그쪽으로 타개하려 하는 것은 마귀에게 속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일의 쉽고 어려움을 떠나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그쪽으로 나가야 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누구하고 같이 사느냐 헤어지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그보다 더 큰 문제이다. 어떤 사람과 함께 살든지 안 살든지 그것으로 인해 우리 자신이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것으로 인해 우리 삶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도 없다. (우리가 엄청나게 생각하는 그) 사람이란 껍데기에 불과하며 물질이나 환경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인해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사람은 놔두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환경 문제는 환경을 조성하시는 분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사람의 현재 상황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환경은 얼마든지 새로 조성될 수 있고 사람 역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육신의 정욕은 마땅히 제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이혼은 간음을 비롯한 육신의 정욕이 그 원인이다. 육신의 정과 욕심은 가정을 깰 뿐 아니라 이 교회도 손상시킨다. 정욕과 혈기는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을 깨고 분쟁과 분열을 가져온다. 구원의 핵심적 내용은 육신이 정욕의 노예가 된 상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여전히 정욕의 노예가 되어 있다면 즉 하고싶은 것은 기어이 하고야마는 사람이라면 그는 참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참으로 역사하고 있다면 육체의 욕망은 결코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 영에 속한 사람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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