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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표적 (마12:38-45) / 2005. 3. 20

2010.04.30 14:59

이상봉 조회 수:3859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어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나아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다. 이에 주님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 동안 주님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명백한 표적을 이미 다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 동안 권세 있는 말씀과 갖가지 선한 일과 표적(기적,奇蹟)들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그리스도)임을 명백하게 선포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다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만국 가운데 주와 그리스도로 인정되실 일만 남겨 놓고 계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요나의 표적으로 상징되는 부활 사건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보여줄 표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미 제시한 명백한 표적들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자꾸 더 새롭고 완전한 표적만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주님은 구약 시대의 앗수르 니느웨 성읍 사람들과 솔로몬을 방문했던 시바의 여왕을 들어 책망하셨다. 니느웨 사람들은 그 성에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러 간 요나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였다. 그 때 요나의 선포는 회개를 촉구하는 간절한 전도가 아니라 마지못해 하는 억지 선포였다. 요나는 3일 길을 다니면서 외쳐야 할 도성에서 단지 하룻길만 다니면서 그 성의 멸망을 선포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수였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형식적인 선포만 듣고도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에 비해 유대인들은 하나님 자신이 친히 사람으로 오셔서 온갖 표적과 권능 있는 말씀과 사랑을 베푸셔도 그를 믿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님은 심판 날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주님 당대의 유대인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의 지혜에 대해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그 당시로는 이스라엘의 땅 끝이라 할 수 있는 먼 곳에서 기꺼이 올라왔음에 비해 유대인들은 자기들 곁에 스스로 찾아오신 완전한 지혜자 예수님을 못 본 채 하고 무시했다. 그러므로 심판 날에 그 여왕이 일어나 유대인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 더 심하게 귀신 들림 --

주님은 이어서 유대인들에게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모든 죄인들 가운데서 먼저 부르셔서 자기 백성이라고 이름하시고 다른 이방인들과 구별지으셨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깨끗한 집을 만들어 그 속에다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집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참 인간'이 되도록 역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분명히 이방인들에 비해서 '청소된 집'이라고 불릴 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깨끗하게 청소된 목적이 자기의 깨끗함을 자랑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그리스도)을 받아들여서 자신들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첫 열매요 대표요 목표요 목적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배격했다.

이것을 두고 주님은 빈집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다. 즉 유대인들이 자기들 안에 채워야 할 내용인 그리스도를 거절하자 그 결과로 그리스도 대신 전에 쫓겨나갔던 귀신들이 더 많이 들어와 그들을 점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상태는 더욱 절망적으로 악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자기 主인 그리스도를 거절한 후 그리스도와 그 복음은 이방인들에게로 건너갔고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이방인들보다 더 강하게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강퍅한 삶을 살았고 구원을 얻지 못한 채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악하고 음란한 세대 --

악하고 음란한 세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시는 시각이다. 물론 이방인들도 다 악하고 음란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기를 스스로 선하고 거룩한(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 중에서도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악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어떤 고집? (사탄에게 속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감정대로 기어이 하겠다는 고집이다. 즉 육신대로 살겠다는 고집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의 복, 영원한 생명에 관한 약속에 소망을 두지 않고 육신의 정함없는 욕망(소망)을 끝까지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악(惡)이다.

다음으로 음란이다. 악한 자들은 대체로 음란하다. 그리고 음란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육체가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악한 자란 결국 육체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런 사람은 당연히 육체의 소욕대로 살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결국 음란하게 되는 것이다. 음란이란 다름이 아니고 육체의 (성적) 즐거움을 위해 이것 저것 (법과 질서를) 가리지 않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음란이란 무질서하고 바르지 못한 성적 관계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기준 또는 도덕적 기준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육체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냥 '즐거움'이다. 오히려 더 큰 즐거움이다. 더 재미있고 더 신나고 더 즐거운 것이다. 한 여자와 알고 지내는 것보다 두 여자나 세 여자와 알고 지내는 것이 더 즐겁고 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하나님과 이 우상 저 우상을 두루 섬기는 것이 더 재미있는 것이다. 이것이 육체의 생각(성향)이다.  

이처럼 음란을 사실은 좋아하면서도 사람들은 자기를 음란하다고 말하는 것은 또 싫어한다. 그것은 지식(양심) 때문이다. 육체가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지식(양심)이 싫어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좋으면서도 그리고 버릴 생각도 없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종교와 지식으로 무장된 죄인의 실상이다. 육체로는 하고 싶은 것을 (법, 도덕 따질 것 없이) 다 하고 싶어하면서도 지식으로 인해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이름(명예)도 또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속으로는 하나님께 관심도 없고 오직 자기 육체의 즐거움과 세상 삶에만 관심이 있고 거기에만 소망을 두지만 겉으로는 언제나 하나님을 추구하며 경건한 체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5-28)

이런 사람들이 겉으로나마 경건한 체 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가 바로 이단성 시비이다.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 '이것이 진짜냐 가짜냐' 하고 따지다가 결국은 '너는 가짜다' 하고 몰아붙여 거절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편리하고 그럴듯한 수단이다. 하나님의 뜻을 그냥 그대로 거절하기는 어려우니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 '너는 이런 저런 문제가 있어 보이니 가짜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고 거짓 선지자다' 라고 하며 물리침으로써 교묘하게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서 하나님이 그동안 이스라엘에 보내신 거의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거절당하며 고통당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마23:29-34)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판단하며 거절할 때 쓰는 방법 중 하나가 '표적을 요구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증거를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보여 보라'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방식은 곧 육체가 접수할 수 있는 방식을 말한다. 영(영적 감각)이 어둡고 죽어 있으므로 말씀이나 거룩한 삶 같은 것은 소용없고 오직 눈으로 볼 때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정도의 쇼킹한 행동(기적)을 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표적도 육적인 자들에게는 안 통한다. 그것이 그들의 악한 마음을 열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가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수많은 표적을 이미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것을 보고 더 위기 의식만 느끼고 주님을 죽이려고 생각했지 주님을 믿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표적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에는 표적을 구하는 불신앙도 있지만 표적을 구하지 않는 불신앙도 있었다. 이사야 7장을 보면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의 유다 왕인 아하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북쪽의 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의 침략 위협을 항상 받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유다를 한번 쳤으나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아람과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아하스 왕이 심히 근심하자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셔서 이스라엘과 아람의 도모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염려 말라고 안심시켰다. 그래도 아하스가 하나님의 그 같은 말씀을 믿지 못하자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무엇이든지 좋으니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아하스는 그것을 거절하며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했다. 얼핏 보면 그의 이러한 행동은 신앙적인 행동 같이 보이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철저히 불신하는데서 나온 불신앙적이고 패역한 행동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들에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 임마누엘 표적'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셨다. 이 표적은 멀지 않은 날에 유다가 그렇게 염려하던 아람과 이스라엘이 앗수르 군대에 의해 침공을 받아 멸망을 받게 될 것이며 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지 않던 유다 백성들도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표적이었다. 이것은 또한 장차 처녀로부터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표적을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불신앙적 사람들이 심판 받게 될 것을 예고하는 표적이 되었다.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신실하심을 항상 체험(시험, 경험)하기를 즐겨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기 때문에 어려움을 만날 때 (전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표적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을 시험치 않고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기대한다. 그러므로 표적을 구하느냐 구하지 않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느냐 신뢰하지 않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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