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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제 (마12:46-50) / 2005. 4. 10

2010.04.30 15:02

이상봉 조회 수:3793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눅8:21)


위로부터 거듭난 사람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사람이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요 천국에 속한 사람인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인간 관계, 아니 유일한 참된 인간 관계는 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 '형제들'과의 관계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족 관계이며 진정한 친구 관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법적 문화적 호칭이 아니라 실제이다. 실제로 같은 데서 났고 같이 살고 같은 운명을 지녔기 때문에 형제라고 하는 것이다.

형제라는 말은 형과 동생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사람을 오직 생명 안에서 분별(구분)한 것이다. 생명이 큰 자를 형이라고 하고 작은 자를 동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사람의 관계를 결정짓는 유일한 기준은 생명이다. 하나님의 나라에도 질서가 있다.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으며 이끄는 자가 있고 따라가는 자가 있다. 아버지가 있고 주(主)가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그것을 결정하는가? 오직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의 어떠함(분량)이다.

세상에서는 생각이 다르고 성품이 다르고 길이 다르고 목표가 다른 사람도 (형식적이고 수단적이기는 하지만) 연합하며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한(같은) 생명이 아니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으며 어떤 공동체나 연합체도 이룰 수 없다. 사실상 교제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 생명이 매우 배타적이며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빛이 어둠과 공존할 수 없으며 타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 있는 사람(형제들)끼리는 인간적으로나 혈통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을지라도 매우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관계는 부부관계나 부모 자식관계보다 더 깊고 긴밀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생명 자체가 그런 (연합과 교통의)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다른 이유와 조건들로 엮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한 가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엮여져 있고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아무런 다른 인간적 차이를 가리거나 차별을 가질 수 없다. 육신의 형편이 어떻게 얼마나 다를지라도 우리는 다 근본적으로 하나이다. 생명이 하나이므로 마음도 하나이고 몸도 하나이다. 우리가 각기 다른 육신(모양)을 가지고 다른 공간에 살고 있는 것은 몸의 지체가 각기 다른 모양을 가지고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팔과 다리는 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오른팔과 왼팔도 그러하다. 그것을 '다르다, 둘이다'라고 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크게 볼 때 그것들은 다 한 몸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한 몸이다.

건강한 사람은 한 몸 안에서 같은 필요와 뜻을 가지는 사람이다. 위와 장은 (속이 쓰려서) 술을 넣지 말라고 요구하는데 머리와 손과 발은 술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입으로 넣는다면 그는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건강하려면 그야말로 '손발이 맞아야' 한다. 이것이 한 몸의 유지를 위한 원리이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한 몸의 지체들이다. 그러므로 마음과 뜻이 같아야 하며 생각과 행동도 일치해야 한다. 아주 작은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큰 틀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1-14)

연합은 사람이 필요해서 억지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로 엮어놓으셨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고 나타내는 차원에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우리의 담을 허무는 여우(마귀)이다. 우리 안에 다른 생각을 넣어 연합을 깨게 만드는 자를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간에서 구별과 차별, 다툼과 분열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을 좇지 않고 육신을 좇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대로 살지 않고 육신대로 살기 때문이다. 영(성령) 안에서 우리는 아무 차이가 없다. 그가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은 일관되며 동일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가 어떻게 다르든지 우리 안에 어떤 문제가 있든지 결국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모든 것이 다 문제가 되고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을 다 잃게 되고 말 것이다.

성령은 한 몸 안에 있는 지체에게는 하나는 이렇게 하라고 하고 다른 지체에게는 저렇게 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님은 오직 몸 안의 모든 지체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 같이 움직이게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4:1-4)

다시 말하지만 우리 안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생명의 분량(정도)의 차이'뿐이다. 교회 안에서 생명이란 영적 생명을 말하는 것이므로 생명의 분량(정도)의 차이란 결국 영적 수준의 차이를 말한다. 그러나 영적 생명의 수준(차이)이란 정확하게 분별되기 어려울 수도 있고 굳이 그것을 판단하여 나눌 필요도 많지 않으므로 그것을 그렇게 따질 필요가 없다. 그것은 특별히 판단할 필요가 있을 때 즉 영적 수준과 은사를 따라 사역의 내용을 결정할 때 등을 제외하고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육신적 생명의 분량뿐이다. 육신적 생명의 분량이란 결국 나이를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대할 때의 유일한 차별 기준은 나이이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는 오직 생명을 따라 사람 간에 관계를 맺는다. 이것이 원칙이다. 교회에서는 나이가 많으면 형님이고 적으면 동생일뿐 다른 차이는 없다. 인종과 지역, 지식과 능력, 심지어 남녀(기능상의 차이는 존재한다) 차별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세우신 질서는 (교회든 아니든) 나이가 많고 적음을 따라 연장자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사실 연장자에 대한 순종과 공경도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케 하신 것에 불과하다. 연장자에게 순종함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몸의 다른 지체들 특히 머리를 대표하는 연장자나 영적 권세자에게 순종함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공급받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질서)이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지 나이가 많고 적은 것 자체가 무슨 큰 의미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크게 보면 나이도 문제가 아니며 생명의 차이라는 것은 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생명을 받아서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이것이 워낙 큰 사실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의 차이라는 것은 미미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결국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하나이다. 그래서 한 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의 형제 됨은 우리의 기호나 취향, 우리의 필요나 선택에 따라 되어진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 안에서 사람 차이는 오직 생명을 기준으로 판단하며 그 생명의 차이는 오직 나이나 은혜와 은사의 분량을 기준으로 판단되는 것이지 다른 인간적 조건으로 판단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다 하나님의 아들(대리자)이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흘러나오는 통로로 생각하고 대해야 한다. 특히 연장자와 영적 은사를 풍성하게 가진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이것은 사역적 차원이나 권세에 복종하는 문제 이전에 생명의 문제이다.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은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성령으로 거듭날 때 우리가 받은 생명으로서 우리 육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생명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생명) 안에서 하나로 엮는다. 이 생명은 십자가를 거쳐 나온 생명이므로 자기를 부인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형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어떤 사람이 나와 한 생명인지 즉 그가 하나님의 생명 또는 아들의 생명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뜻대로 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생명을 즐거워하고 하나님 안에서 함께 지음 받은 형제를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는 사람이면 형제이다.


왜 우리가 이 관계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해서는 안되는가에 대해 잠깐 언급하겠다. 그것은 이것 외에는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이 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그 어떤 관계보다 사상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데올로기 즉 사회 변혁을 위한 새로운 사상이 그 사회에서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 관계는 그것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형님 동생 또는 사장님 선생님 하던 것이 이제는 동무, 동지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공산주의의 동지, 동무는 이제 물 건너 갔다. 공산주의 뿐 아니라 민주화 투쟁을 하던 사람들, 독립운동, 민족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그런 것이 남아 있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 무너지고 껍데기만 남았다.

왜 갔는가? 왜 그것이 끝까지 유지되지 못하는가? 그런 사상과 지식과 이데올로기들이 다 인간 삶의 실제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급할 때 서로 동지로 부르며 함께 투쟁하던 사람들이 변하게 되고 그것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배가 몹시 고프게 되거나 배가 부르게 될 때이다. 그때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내려놓거나 뒤로 제쳐놓고 원초적인 세계로 다시 돌아간다.

오늘날 소련, 중국, 심지어 북한까지를 포함한 모든 나라들의 혁명과 투쟁은 어떻게 되었는가? 과거에 그것은 모든 인민이 평등하게 다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그냥 잘 먹고 잘 사는 것, 다 안되면 얼마라도 즉 나라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돈을 버는 것,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것, 이것이 바로 지상(至上)의 과제요 최고의 이데올로기요 투쟁 목표가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이 인간 삶(생명)에 부합되는 실질적이고 진정한 필요이기 때문이다. 즉 육신의 요구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육신은 내가 먹을 밥을 원하고 돈을 원하지 이웃과의 평등한 삶을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한 백 년 또는 오십 년 몸부림쳐보다가 그만 두게 된 것이다.
사람은 다 할만한 일을 하게 된다. 자기 생명의 요구대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것을 깨닫고 바로 그대로 행하는 것은 아니다.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비로소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과거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나 그 비슷한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등을 하는 사람들은 다 고생을 했다. 고생을 하다가 너무 괴로워서 타락을 해서든 의미를 잃어버려서든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런 일을 시작했는가? 왜 가족이다 친구다 하는 관계를 넘어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들과 동지요 동무요 하면서 어려운 일을 했는가? 그들이 한 일은 인간적 정을 넘어서는 일이요 육신의 욕망을 넘어서는 어려운 일이었는데 왜 그렇게 하려고 했는가?

그것은 그들 안에 육신의 욕망 외에 영적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내 배만 부르면 다 되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사람이 정의다 평등이다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 내면의 영적 욕망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내면적 속성 때문이다.

물론 의와 진리는 육신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나 혼자만으로는 잘 살 수 없고 다른 사람들도 잘 되어야 나 또한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과 질서가 유지되어야 하고 모두가 어느 정도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타락한 우리 인간은 그렇게까지 멀리 내다보며 내 육신의 필요를 위해 의와 진리, 정의와 평등, 이웃 사랑을 추구할 만큼 현명하지 못하며 여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사람이 무언가 의를 추구하는 것은 일단은 그 육신적 욕구 때문이 아니라 내면적 욕구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육신의 욕구를 능가하도록 강력하기 때문에 그들은 육신적 고생을 감수하면서도 사상을 위한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성공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영적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영적 생명이 그 속에서 강력하게 역사해야 하는데 사람들 안에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속성이 그러하고 생명의 능력이 역사한다면 사람들은 거창한 운동이나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결국 그런 것을 이루어내고 말 것이다. 그러나 속에 있는 지식이 뒷받침할 만한 생명이 없는 것이다. 즉 영적 역사를 영이 아닌 육으로 이루어내려고 하니 될 리가 없는 것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영적 역사를 이루는 곳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공산주의자나 사회운동가나 민주화 투쟁가들이 이루려고 했던 그런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운동가나 투쟁가, 이념가와 교회가 다른 것은 지식과 사상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속의 생명이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된 이 형제 관계를 온전히 유지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고 이 생명으로 살기를 힘써야 한다. 다른 것들은 우리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영원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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