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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여 가르치신 까닭 -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막4:33,34)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은 많은 진리를 비유의 형식을 빌어 증거하셨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첫째, 비유가 사람들이 진리를 잘 이해하고 깊이 새길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비유는 영적 감각이 둔해지고 진리에 무디어져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진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때 막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막4:21-25) 이 말씀은 비록 어떤 진리들이 일시적으로 비유 안에 감추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구히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 곧 참으로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결국 들려질 것이므로 비유를 잘 이해하여 진리를 깊이 깨우치라는 말이다.  


둘째,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진리)에 순종할 생각도 없이 주님을 따라 다니며 말씀을 듣고는 티를 잡으려는 사람들을 따돌리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13:10-17)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막4:11,12)  

이러한 말씀에 의하면 주님이 진리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어떤 부류들로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차단하기 위함이 분명하다. 주님을 따르는 무리 중에는 하나님과 그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데 목적이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말씀을 잘 듣지도 않고 들어도 못 알아듣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이용하고자 하거나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특히 주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티를 잡아서 옭아 넣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자들을 떼어버리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를 위해 주님은 처음에는 진리를 비유의 형식으로 말씀하고 나중에 그것을 듣고자 하는 참 제자들에게 그것을 다시 설명해 주는 방법을 쓰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사람의 마음과 태도가 어떠한지를 드러낸다. 영생과 진리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 형식이 비유든 일반적 형태의 말씀이든 관계없이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 지식(생명)이 풍성하게 될 것이다. 또 권세 있는 사람이 말하는지 보잘것없는 사람이 말하는지도 상관없다. 그러나 생명과 진리에 마음이 없는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어디선가 걸려서 그 마음이 상하게 됨으로써 기왕에 있던 말씀(진리에 대한 관심)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비유는 이처럼 옥석(사람)을 가려내는데 유용하게 사용된다. 그러므로 비유는 한편으로는 진리의 말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진리에 대한 궁금함과 깊은 인상을 더하게 함으로써 더 분명하고 생생하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만드는 수단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에 관심이 없는 자들을 가려내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셋째, 주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여 진리를 가르치신 것은 본래 하나님 자신이 비밀에 속한 분이요 그의 진리 역시 비밀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주님의 말씀 진리 자체가 비밀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유 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다 성질상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어차피 위로부터 온 지혜(계시)가 있어야 한다.

또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많은 내용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미리 예언하신 말씀들의 성취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시편 기자 아삽은 시78:2에서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라고 말함으로써 장차 오실 하나님의 사람이 비유의 형식으로 진리(비밀)를 증거하게 될 것을 예언한 바 있다. 이것이 주님에게서 성취된 것이다.



 - 뿌려진 씨의 비유 -

이제 주님의 첫 비유의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3-23)

이 비유에서 씨는 왜 '좋은 땅' 즉 부드러운 흙으로 된 밭에만 뿌려지지 않고 길가와 돌밭과 가시덤불에도 뿌려졌는가? 그것은 팔레스타인의 파종법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밭을 갈고 난 다음에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씨를 뿌리고 난 다음에 밭을 간다. 옛날에는 비료가 없었기 때문에 한 땅에서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곧 토질이 나빠져서 농사가 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토를 나누어서 일부는 농사를 짓고 일부는 쉬게 하는 방법을 썼다. 그때 휴경기(休耕期)에 속한 밭은 잡초와 가시덤불 등으로 엉망이 된다. 그리고 사람이 다니는 곳으로는 길도 난다.

이 비유의 농부는 이러한 휴경기의 밭에 씨를 뿌린 것이다. 지금까지 묵혀두었던 밭이 순서가 되어 농사를 지을 땅이 되었기 때문에 농부는 갈아지지 않은 밭 위를 지나면서 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 때 길바닥에 떨어진 씨는 새들의 눈에 쉽게 띄어 밭이 갈리기 전에 먹히고 만다. 가시덤불 근처에 떨어진 씨도 있는데 이것들은 나중에 땅이 갈릴 때 가시 씨와 함께 묻히게 된다. 그러므로 곡식이 자라다가 함께 자라난 가시덤불에게 걸리게 되는 것이다. 같은 밭이라고 해도 부식토(腐植土)의 지층이라 고르지 못하다. 그래서 어떤 곳에는 흙층이 매우 얇고 밑에는 돌이 깔려 있기도 하다. 그런 곳에 떨어진 씨는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해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쬘 때 얼마 자라지 못하고 말라죽고 만다.

주님이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첫째, 세상 상황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 세상은 엉망이 되어 있는 밭과 같다. 하나님이 지으실 때의 상황은 이렇지 않았지만 타락 후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는 혼돈과 공허의 상태가 질서와 충만의 상태로 변했다. 그러나 사람이 마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질서와 충만의 상태가 다시 혼돈과 공허의 상태로 변했다. 왜 밭에 길도 있고 돌도 있고 가시도 있는가?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밭이 밭이 아니라 버려진 황무지가 된 것이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일반 세상에 대해서이기도 하지만 특히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씨 곧 생명의 말씀을 뿌리신 곳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눈이 연초부터 연말까지 항상 그 위에 있는 복지이다.(신11:12)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말씀이 떨어졌을 때 결실을 할 수 있는 곳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많은 부분이 소출을 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라 마귀가 이방 나라들보다 일곱 배나 더 강하게 역사하는 완전한 황무지가 되었다.  
요컨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이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도 결실할 수 없는 어려운 곳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무지와 교만과 불신앙과 탐욕으로 황폐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 정확하게 그렇다. 오늘날 교회의 사정 역시 이와 같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형편이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욕심과 두려움, 무지와 교만, 불신앙과 사탄의 훼방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형편, 심지어 우리가 속해 있는 기독교 또는 교회라는 세계의 형편, 그리고 우리의 존재 즉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육신의 형편이 총체적으로 하나님과 그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부적합한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율로 보더라도 1/4이다. 그러므로 교회에만 나오면 모든 것이 저절로 다 될 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선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표준이며 약간의 문제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세상에 자기 같은 사람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듣거나 사람을 대하거나 할 때 조심하지 않는 것이다. 다윗이 자기 입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기도했을 때는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이며 자기 안에 얼마나 악한 것이 들어 있는지 하나님의 계시와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게 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될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결실할 수 있다.

우리가 참으로 우리의 세계 그리고 우리의 인격이 부드러운 흙으로 된 밭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져진 길과 돌밭과 가시덤불들도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를 돌아보게(내려놓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게 될 것이다.


둘째,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이제 사람들에게 마지막 때 곧 구원과 심판의 때가 다가왔는데 그것(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은 전적으로 생명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용하느냐 하지 않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천국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들을 수 있는 특권을 얻은 사람 중에서도 복음을 깊이 받아들여서 정말로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주님의 비유는 바로 이 사실을 경고한 것이다. 바로 말씀의 중요성, 복음의 절대적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때 건성으로 듣거나 딴 생각을 하지 말고 천국을 정말로 소유할 수 있도록 마음을 비워서 주님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막4:24)는 말씀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듣는 내용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거짓된 씨를 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와 함께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눅8:16-18)라는 말씀과 같이 말씀을 듣는(받는) 태도도 중요하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이 말씀처럼 말씀을 듣는 것은 생명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확실하게 받지 않으면 안된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행17:11) 이 말씀에서 신사적이라는 것은 신중하고 열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열고 깊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만이 예수를 제대로 믿고 구원을 얻었다.


셋째, 주님의 비유는 주님을 가까이하며 말씀을 듣는 사람은 많지만 그 말씀을 깊이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최종적으로 결실을 맺는 사람은 매우 적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것은 결국 세상 상황이 어렵다는 첫 번째 사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만 구원 얻는 자는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나라가 전개되는 모든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방해를 한다. 말씀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말씀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사탄은 온갖 종류의 시험을 던지며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훼방한다. 심지어는 말씀이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사람에게조차 마귀는 시험을 던진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낙오하고 만다.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소수의 사람들만 시험들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아들로 굳게 선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넷째, 이 비유는 역설적으로 사탄이 아무리 방해하고 훼방해도 그리스도의 말씀 사역은 결국 성공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못 받아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여서 결국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된다는 것이다. 타락하여 하나님께 대해 죽은 죄인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결실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 기적이다. 오히려 다 못 받아들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므로 일부라도 죽은 자가 살아나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고 하나님의 분명한 승리이다.

사탄의 극렬한 방해 속에서 죄로 오염되고 타락한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거둔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탄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더라도 일부의 사람이 살아남아서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로 회복되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승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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