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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1.요한의 죽음으로 인해 떠나심

마태복음 14:13을 보면 주님은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 사람들이 있는 곳을 떠나 따로 빈들로 가셨다고 되어 있다. 마가복음 6:29-32, 누가복음 9:7-11에도 이 내용 즉 주님이 세례 요한의 죽음을 들은 후 무리를 떠나 빈들로 갔다는 기사가 나와 있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에 대해서 마태복음과 마가, 누가복음의 설명이 다르게 되어 있다. 마가, 누가복음은 주님이 빈들로 떠나신 것은 사역이 너무 분주한 나머지 식사나 휴식을 취할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에 잠시 쉬려고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주님이 단지 세례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듣고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오직 마태만이 주님이 헤롯의 죄악에 반응하여 빈들로 떠나신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도 주님은 요한의 일로 인해 그 계시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물러가신 적이 있었다. 사역 초기에 주님은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그 머물고 계시던 유대 지역을 떠나 갈릴리로 물러가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2-14)

이 사실을 기록해 놓은 성경 역시 마태복음뿐이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마태는 마치 주님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자들)의 죄 때문에 종종 이스라엘을 떠나고자 했다는 느낌을 준다. 주님이 유대에서 갈릴리로 물러가신 것은 마태복음 4장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소위 빛의 고을이라고 하는 곳에서 흑암과 사망의 고을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으로 이동하신 셈이다. 이것은 결국 주님이 유대와 예루살렘을 버리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유독 마태만 주님의 행동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려 했을까? 그것은 마태복음이 바로 유대인들을 향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마태는 이스라엘 곧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히고 싶었으며 스스로 선민이라고 하는 그들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셨는지를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마태에 의하면 주님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헤롯의 악행으로 대표된 이스라엘 사회의 절망적 상황으로 인해 일시적이나마 사람들을 피해 조용한 빈들로 가신 것이다. 주님은 잠시나마 사람들을 떠나 홀로 있고 싶었다.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유대(예루살렘)를 떠나 갈릴리로 왔지만 갈릴리에도 죄인들이 군집해 있었으므로 (헤롯은 갈릴리를 다스리는 자였다) 그곳의 모든 마을들로부터도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마태의 해석에 의하면 주님이 잠시나마 무리를 떠나신 것은 그의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의롭고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이유로 잡히고 죽임을 당할 수 있는가? 이 나라가 도대체 무슨 나라이며 이 백성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주님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멸시를 받고 죽음을 당하는 일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권세 있는 자들은 언제까지 그 권력으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약자들을 밟을 것인가? 이것이 주님의 마음을 일시적이나마 답답하고 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주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사랑하셨다. 온 죄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셨다. 그래서 결국 주님은 그가 있는 빈들까지 따라왔던 무리들을 다시 거두고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까지 베푸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과 인류의 어리석고 악한 행위들이 인정되고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을 따름이다. 불쌍히 여겨서 은혜를 베푸셨지만 그들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솔직한 주님의 마음이었다. 사역은 사역이고 연합은 연합이다. 주님은 그들과 같이 있으나 연합할 수는 없었다.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13:33-38)

그렇다면 이러한 이스라엘(인류)을 위한 주님의 봉사는 무엇이며 주님의 사역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떡을 주고 병을 고쳐주는 것은 그들을 위한 궁극적 봉사가 되지 못한다.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궁극적인 봉사는 그들의 죄를 지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주님이 유대를 떠나고 무리들을 떠난 것은 그들이 싫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그들과 생명이 다르고 길이 달라서 그들과 하나로 연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의 말씀처럼 나중에 제자들과는 하나로 연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생명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주님이 무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세상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어서 떠나심

주님이 따로 빈들로 가신 또 하나의 이유는 마가복음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주님이 무리들의 세상적 요구에 다 부응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의 상황 설명에 의하면 사람들의 요구는 끝이 없었고 따라서 주님은 정말로 해야 할 일(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 자신을 전하는 것)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무리들의 무의미한 세상적 욕망을 끝없이 채워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주님은 그것을 잠시 피하고 싶었다.

주님이 세상에서 하실 일은 무리들이 요구하는 그런 일이 아니었으며 그 이상의 것이었다. 힘있는 자들이 권력으로 하나님을 멸시하며 의를 무시하고 약자들을 억압할 때 힘없는 민중들은 오직 육신의 필요를 위해서만 하나님을 찾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러한 일이 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을 일시적이나마 답답하고 상하게 만든 내용이며 일시적이나마 무리들을 떠나게 만든 내용이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2:23-25)

주님이 사람들에게 그 몸을 의탁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며 따르는 동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거나 주님의 진리의 말씀 또는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을 따름이며 그들의 육신적 욕망과 필요를 주님이 채워주시기를 원했을 따름이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1-15)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2-27)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셨으나 의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들과 연합하실(자리를 같이 하실) 수도 없었다. 그것은 그들과 주님의 길이 달랐고 생명이 달랐기 때문이다. 주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은 그가 무리들을 피해서 빈들로 가셨지만 거기까지 무리들이 따라와서 주님을 바라보자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이적을 일으켜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신 데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 일을 행하신 후에도 주님은 여전히 그들을 피하실 수밖에 없었다. 무리들은 주님이 그들의 병을 고치주실 뿐 아니라 양식문제까지 해결해 주시자 더욱 의지하며 따르고자 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환영하시지 않았고 그들의 육신적 요구에 더 이상 부응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하셨다.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2:1-4)

가나 혼인 잔치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은 주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모친의 요구를 받은 주님은 결과적으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심으로써) 그 요구를 수용하셨지만 그 일을 하기 전에 분명하게 "이 일이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런 일을 할)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을 함으로써 자기의 일이 사람들의 일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따위의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근원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셨다. 주님이 이적을 일으켜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그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표적적 역사이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은 한편으로 분명히 잔치집의 일상적인 필요를 채워주신 것이다. 이것은 그가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불쌍히 여기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것이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오병이어의 표적을 일으키신 주님의 마음이다.


죄인의 행태(行態)는 그들의 형편에 따라 두 가지로 나타난다. 힘있고 배부를 때의 모습과 힘없고 배고플 때의 모습이 다르다.

육신으로 배부른 자들(권세자들)의 행태는 어떠한가? 그들은 오직 세상에서 확보한 자기의 이익을 유지하고 보전하는데 관심이 있다. 그것을 위해 약자들을 밟으며 하나님의 의를 밟으며 죄인을 구원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반대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오직 세상에서 영원히 부와 권세를 누리는 것이다.

육신으로 배고픈 자들의 행태는 어떠한가? 그들은 오직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데만 관심이 있다. 육신의 곤고한 형편에서 벗어나 배부르게 되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복음)에 관심이 있다. 그것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오직 육신의 필요와 관련해서만 받아들인다. 그렇게 밖에는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비롯한 힘있는 자들은 주님을 배척하고 세례 요한을 죽였지만 배고픈 이스라엘의 민중들은 주님이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따로 떠나도 먼저 그곳으로 걸어가서 그 곁에 있기를 원했다.

이런 점에서 분명히 같은 죄인이라도 부유한 죄인들보다 가난한(곤고한) 죄인이 더 복이 있다. 가난해야만 하나님을 찾고 인생의 참 길을 찾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죄인에게 적합한 자리는 가난하고 곤고한 자리이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편치 않은 것이 죄인에게 적당한 자리이다. 그래야 자기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 나아와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마음이 높고 부유한 자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주님은 이 두 부류의 죄인들에 대해 각각 어떻게 대하셨는가? 주님이 오신 것은 한편으로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하기 위함이다. 어떤 죄인이 구원을 받으며 어떤 죄인이 심판을 받는가? 마음이 가난하고 은혜를 갈망하는 죄인이 구원을 받으며, 마음이 높고 은혜를 멸시하는 죄인이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주님은 힘있는 자, 배부른 자들을 가까이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멀리 떠나기를 원했다. 그리고 버림받은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을 가까이하며 건지기를 원하셨다. 주님은 전체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을 부유하고 교만한 죄인의 부류로 보셨다. 그들은 하나님(하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고 땅의 영광,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 자기 영광을 추구하였다.(요5:44) 그들이 외형적으로 볼 때 로마의 압제 하에 놓여 있었고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는 어려운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부유한 나라로 간주된 것은 그들에게 다른 나라에는 없는 많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첫째, 율법이 있었고 약속이 있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있었고 선지자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큰 자부심과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할 정도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편으로 이스라엘 안에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심판하시며 물리치는 태도를 취하셨다. 이스라엘은 결국 (로마에 의해) 망했다. 그것은 그들의 헛된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이 그들을 물리치셨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의 일생과 사역은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러 왔으며 그 일을 수행하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였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가운데 사역을 전개하기까지 홀로 빈들에서 살았다.(눅1:8) 그리고 예루살렘이나 기타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들어오지 않고 광야에서 외치며 사역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만한 죄인으로서의 이스라엘을 대하신 태도이다.

주님의 모친 마리아의 찬송을 들어보면 이스라엘 더 나아가서 인류(죄인)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1:46-53)

사무엘의 모친 한나의 기도 역시 마찬가지 사실을 노래하고 있다.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삼상2:1-8)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며 반대로 마음이 높고 교만한 자들을 버리고 내치시는 것이다. 주님이 세례 요한의 죽음 소식 및 민중들의 추종을 피하여 빈들로 떠나신 것 그리고 자기를 따른 무리들을 위해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은 다 이러한 그의 사역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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