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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우리는 주님이 광야에서 행하신 오병이어 기적의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했다. 주님이 일으키신 이적은 그것을 목도(체험)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메시지)을 담은 표적이었다. 우리가 지난 주에 함께 생각한 오병이어 표적의 의미는 두 가지였다.

첫째, 하나님이 사람 곧 자기 백성 이스라엘 무리들을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주님이 이스라엘 무리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주린 배를 채워주신 것은 그것이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주님이 고통당하는 인생들을 사랑하시며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이러한 마음이 있다. 이것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로 보내게 된 배경이다.  

둘째, 주님의 기적은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을 나타내는 표적이었다. 고작 오병이어로 일만 명 이상의 사람을 넉넉히 먹일 수 있다면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생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마음이다. 그런데 앞에서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는 마음도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하고 능력이 그러하다면 이스라엘은 왜 굶주리고 질병과 환난에 시달려야 했던가? 그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하고 싶었던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그들이 바라고 추구해야 할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양식은 위로부터 오는 떡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생명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에 이어서 오늘은 세 번째와 네 번째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3.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권력자들은 주님을 배척했지만 가난한 자들은 주님을 어디든지 따랐다. 그들은 궁핍하고 곤고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자가 필요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몰랐지만 그들이 배고프며 곤고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돕는 자는 알아보았다. 이것이 그들이 주님을 따른 까닭이다.

이스라엘의 가난한 군중들은 주님이 빈들로 갔을 때도 따라갔다. 저녁이 되었을 때 제자들은 주님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라고 말했다. 우리는 제자들이 한 이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제자들이 한 행동은 무엇인가? 주님께 '무리들이 주리고 있으니 동네에 가서 먹을 것을 사먹고 오도록 말해 주라'고 조언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그것은 선한 마음에서 나온 좋은 말이다. 그들은 주리고 있는 불쌍한 무리들을 생각해서 좋은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을 보면 그것은 아들의 마음과는 일치하지 않는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제자들의 요청에 대해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으로 대답하셨다. 제자들은 주님께 무리들로 하여금 마을로 가서 스스로 음식을 사 먹게 하라고 청했지만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과 제자들이 서로 다른 사람(인격, 생명)임을 보게 된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 자들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율법에 속한 자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주님은 어떤 분인가? 그는 사람들에게 누릴 것을 주는 분이었다. 이것은 그가 은혜에 속한 분임을 나타낸다.

천국에서는 옳고 바른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여기 제자들은 선하고 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생명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은 사람의 잘 잘못을 따져서 구원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었다.

언제나 문제는 '선한 마음, 옳은 생각'이다. 선악과를 먹은 후 인간은 언제나 이것이 전부인 줄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따르라는 것이다. 더러운 죄인이었던 여자가 주님께 와서 그 발을 눈물로 씻으며 사랑하는 것을 받아주셨을 때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속으로 '왜 저런 더러운 자를 용납하시는가' 하고 판단했다.

유대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대한 태도와 주님의 태도를 비교해 보라. 옳고 바른 것은 유대인들 쪽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머리를 써서 선악을 판단했을 뿐 아버지의 마음을 읽지는 못했다.

우리는 율법적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고 은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 자는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이다. 그러나 무엇을 주며 누리게 하는 자는 은혜를 따라 행하는 자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판단하고 가르치고 요구하는 입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이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기를 원하셨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주님의 말씀에 내포된 보다 본질적인 메시지는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사실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늘 창고지기로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퍼내 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으로? 제자들에게는 돈이 없었고 가진 음식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문제(음식)조차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자신의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이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구원할 만한 힘이 없다. 사실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빈약하고 초라해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이것을 아시면서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 자신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를 따르는 제자들 곧 우리 역시 자기 이름으로 살거나 자기 이름(능력)으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며 아버지의 일을 하며 아버지의 권세와 능력으로 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대할 때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아무개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권세를 대표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행사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2-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7,8,1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위치와 태도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주는 자요 살리는 자로서의 우리의 위치를 분명하게 깨닫고 하나님의 권세를 행사해야 한다. 자신의 육신적 형편이 어떠한지를 보아서는 안되고 오직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권세를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무엇보다도 우리는 세상에 대해 비굴하거나 무엇을 바라거나 도움을 청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직 세상을 다스리며 가르치며 세상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하는 자로서 행하게 될 것이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아담 안에 있는 사람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차이점은 이것이다. 우리는 단지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본받아 지음 받은 새 피조물인 우리에게 부여하신 기본적인 권세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 말씀은 주님이 사람들에게 생명 주는 영으로서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무엇을 주었는가? 세상이 주는 것을 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을 주었다. 하늘에 속한 것 즉 영생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환경을 초월한 깊은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 이것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주님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훗날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은 결국 자신들의 이러한 위치를 깨닫고 세상에 생명을 주는 자로서 살았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3-6)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돈이 없었을 뿐더러 돈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이 그들에게 있었으므로 그것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었고 그 생명의 권세였다. 그것은 거지에게 돈을 주는 것보다 훨씬 크고 근본적인 도움을 주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이 위치에 서기를 원해야 한다. 즉 사람들을 살리고 사람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고 싶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겁내고 피하고 혼자 있고 싶어하거나 사람들에게 도리어 동정과 도움을 구하려 할 것이 아니라 아들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해서 사람들을 먹이고 살리기를 추구해야 한다.

바울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롬:11) 그는 부르지 않아도 가고 싶어했고 가면 언제나 할 일이 있었다. 자기에게 하늘(하나님)의 부와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4.가장 작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붙들리게 될 때 크게 쓰일 수 있다.

주님이 남자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먹이신 것은 아이가 가진 작은 도시락 안에 있는 떡과 고기를 축사하심으로써 이루어졌다. 그것은 작은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을 위한 생명의 양식을 제공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인생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바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쓰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쓰일 것이다. 바치는 것은 사람의 몫이고 쓰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특히 우리는 자신을 그리스도와 그의 생명의 말씀, 그의 복음 진리를 전하는 도구로 드리기를 힘써야 한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이것이 가장 가치 있게 쓰이는 것이며 가장 크게 쓰이는 것이다. 의사가 되어 사람들에게 건강을 주거나 부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줄 수 있다면 그것도 귀한 일이지만 생명의 말씀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 이상 가치 있게 쓰이는 일은 없다.

우리의 능력, 우리의 체험, 우리의 일생은 아이의 도시락과 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의 매일의 삶이 실패와 고난과 뼈저린 반성의 연속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그것은 큰 역사를 일으키는 도구가 된다. 우리의 고통스런 체험들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세계로 이끄는데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서 하신 것처럼 주님은 마음만 먹으면 아무 밑천도 없이 하늘에서 떡이 떨어지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먹이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아이의 작은 도시락을 사역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고 싶어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주님이 굳이 아이의 오병이어를 사용하여 무리를 먹이신 것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6-9)

동역자라고는 하지만 하나님이 주로 일하시고 사람은 다만 하나님의 일을 받드는 일을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고 미미하다. 그러나 그런 작은 사역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도우며 하나님의 일에 수종(隨從)들기를 원하신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그 떡이 떼어져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떡이 주님의 손에 맡겨지지 않았다면 역사가 벌어질 수 없었을 것이고 또한 그 떡이 주님의 손에서 떼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많은 양식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빵은 밀이 아니고 밀가루로 된 것이다. 밀을 갈아서 부드러운 가루로 만든 후에야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빵은 또 사람들에게 나누어지기 위해 쪼개졌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쓰일 우리의 운명을 나타내며 우리 사역의 필수 불가결한 특징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고와 희생 곧 자기 부인이 따라야 한다. 자기 뜻과 야망, 계획이 분쇄되고 꺾여지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궤도 수정이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이 곧 떡이 쪼개지는 것에 해당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 멸시와 박해를 받는 것이 또한 이에 해당한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삶에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안된다. 생명은 오직 쪼개지고 심겨질 때 확대되고 충만케 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가진 도시락 자체는 많은 무리를 배부르게 할 수 없다. 우리 자신도 그러하다. 우리 자신으로서는 아무도 살릴 수 없고 아무도 하늘의 풍성함으로 부유하게 만들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하나님은 길가의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으며 마른 막대기에서 꽃이 피게도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상황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원하시며 그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배필로서, 그의 동역자로 생각하시며 그와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문제는 사람의 여건이나 능력이 아니라 마음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유능하고 부유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를 믿으며 그를 향하여 마음이 열려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의 아들과 대리자가 되어서 그의 모든 뜻을 이룰 수 있다.

많은 신자들이 이것을  모르고 언제나 '나는 약하다. 이 약하고 작은 것으로 무슨 일을 하겠는가 이것이 어떻게 세계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라는 식으로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어떤 일에 직면하면 '하나님이 다 하시고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 나는 그저 요구만 하고 구경만 하겠다' 라고 생각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모든 자리에는 작든 크든 다 사람의 헌신이 있었고 또한 주님에 의해서 그것이 쪼개지고 다루어지는 역사가 되었다. 그럴 때 거기에는 언제나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거기에 부응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긍휼의 정신과 생명 주는 영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모든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제공해야 한다. 우리가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찢어지고 상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생명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풍성케 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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