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두 소경을 고쳐주신 주님은 그들에게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마태복음 12장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마12:15,16)
주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다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상하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마12:10-16)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이 자기의 소문을 내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은 주님을 대적하고 그 사역을 훼방하는 원수들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이 자기의 소문을 내지 말라고 하신 것은 천국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달라붙어서 엉뚱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은밀한 곳에서 특정한 사람들만 볼 수 있도록 전개되지는 않는다. 주님은 만인이 볼 수 있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천국 사역을 수행하셨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주목하며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무엇을 하는가? 무관심하거나 대적한다. 자기 세계와 자기 일을 옹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대적하고 훼방한다.

주님이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셨을 때 유대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죽이려고 했다. 거기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큰 구원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전통과 기득권과 쌓아놓은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일은 감추어질 수밖에 없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6:9,10)

이것은 거역하는 자들 곧 마음을 강퍅케 하여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일어났던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거역에 대한 심판을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물론 주님이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이나 세상을 심판하려 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주님의 오심은 그를 거절하는 악한 세상에 대해 심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17-21)

이런 이유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는 구약시대든 신약시대든 시대를 막론하고 결과적으로 조용하고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공개적이고 보편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이면서도 은밀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보면 공개적인데 실제 내용으로 보면 은밀하고 선택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의 외침, 주님 당시의 말씀과 표적, 신약 시대의 성경 말씀과 설교 말씀 등은 분명히 공개되어 있다. 어디서든지 듣고자 하면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접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의 원리이다. 주님이 자기의 사역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수행하신 것에 대해 마태는 그것이 하나의 영원한 사역 원리를 따라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2:15-21)

산과 들판과 시내 거리를 다니면서 외치는데도 조용하고 은밀하게 일이 진행되어 사람들이 도무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영원한 사역의 원리이다.

결국 주님이 이스라엘과 이방을 구원하는 대 사역을 수행하심에 있어서 공개적이면서도 한편으로 은밀하게 사역을 수행하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자기 이익을 위해 그릇되게 이용하려는 자들이나 하나님의 일에 저항하고 훼방하는 세력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동일하게 나타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사야가 주님에 대해 이러한 예언을 해 놓은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사역에서든지 하나님의 일은 항상 이런 문제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세상을 분쇄하고 대적하기 때문이다. 만일 세상이 오해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 곧 구원 받기로 작정되어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열린 사람들 안에서만 하나님의 일이 환영 받고 받아들여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공식이며 원리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일이 전개될 때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관심한 사람도 있고 기를 쓰고 반대하며 저항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오직 그의 택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일을 조용히 처리하려 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돼지에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도 이러한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다. 주님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 하실 때 그 사회에서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틀림없이 주님을 반대하고 대적할 것이다. 주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때로 말씀을 비유로 이야기하시고 때로는 자기의 행한 기사(奇事)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경계하기도 하신 것이다.

세상에서의 자기의 왕국을 옹호하려는 자들,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패역한 무리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오직 자신을 의지하며 육으로 행하려는 불신앙적인 자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는 하되 그것을 오직 자신들의 육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받아들이려는 자들,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표적과 기사가 전해지면 그들은 주님이 기대하지 않는 방식으로 주님께 반응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말씀과 사역을 제한하신다.

이와 같은 주님의 제한을 받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 그보다 더한 저주는 없다. 그것은 구원의 기회를 원천 봉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일이 급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자기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에게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은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영접하는 자뿐 아니라 대적하는 자까지를 다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몸 전체를 살리려면 암세포는 죽여야 한다. 둘 다 살리는 길은 없다. 그러므로 남은 문제는 우리가 어느 위치에 서느냐 하는 것이다. 주님을 믿고 누리는 위치에 설 것인가 아니면 주님을 대적하다가 주님으로부터 제한을 받는 위치에 설 것인가?


주님이 자신이 행하신 표적과 기사(奇事)를 널리 알리지 못하도록 제한하신 것은 그런 것 때문에 주님이 정말로 알리고자 한 내용들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정말로 알리고자 한 내용은 무엇인가? 주님의 관심사는 오직 천국 복음의 전파에 있었다. 즉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있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치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눅4:41,43)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눅8:38,39)

주님은 자신이 행한 이적들이 주님 자신이나 그의 말씀(복음)보다 더 부각되어 증거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귀신의 입을 통해서나 다른 이상한 방법으로 자신이 증거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반드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증거되고 또한 사람은 반드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과 진리의 말씀이다.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표적과 기사를 보고 호기심을 가지고 종교적인 체험을 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고자 하시는 그 생명의 말씀을 받고 누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주님이 눈먼 자와 귀머거리와 앉은뱅이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신 것은 그의 말씀 곧 하나님이 사람을 건지시고 해방시키시고 자유케 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경이 눈을 뜨고 죽은 아이가 나았다는 사실만 보아서는 안되고 반드시 그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마9:32-34)

앞에서 주님을 대적하며 그 사역에 저항하는 자들에 대해 생각했지만 다시 한 번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곧 천국이 땅에 임하는 것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자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 즉 이스라엘 사회의 기득권층들이 주님의 사역에 반발하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사회든지 국가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나려 하면 그 변화로 인해 기득권을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하는 기득권층들과 잃어버릴 것도 없지만 어쨌든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변화에 반대하며 저항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마 여러분도 이번 신 행정수도 이전 특별법 위헌 판결이나 행정수도 이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반발을 보면서, 그리고 노대통령이 등장한 이후 보수적인 기득권층이나 상당수의 일반 국민들이 보이는 불안감이나 저항을 보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변화를 두려워하는가를 느낄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의 부분적 변화 정도가 아니라 세상 자체를 뒤집어엎고 완전한 새 나라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역사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실제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각과 계획과 습관과 생리를 부정해야 함을 느끼게 되며 그로 인해 육신의 저항과 두려움이 나타나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의 통치는 많은 경우에 우리의 주권을 빼앗는 것이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육신대로, 육신에게 익숙한 습관대로, 육신의 욕망대로 살면 편한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길을 제시하시고 강요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간섭에 대해 한편으로 동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불편과 저항을 느낄 수 있다.
성령을 따라간다는 것, 성령께 복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육신에게 있어서 일시적으로 고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주님을 따르기를 포기하거나 육신의 요구대로 저항해서는 안된다. 잠시 고통을 참고 생명의 길로 갈 때 우리의 영혼과 육신이 다 같이 안식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지만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롬8:12,13)

사람이 주님과 그 진리를 저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생명의 길을 반대하고 거부하려면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사역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방법으로 택한 것은 그의 사역이 귀신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참소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무리하고 억지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할 수만 있었다면 그런 방법을 쓰지 않고 다만 주님의 사역에서 도덕적 율법적 티를 잡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주님이 그런 흠과 티를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안되었을 때 그들은 할 수만 있었다면 주님의 증거(말씀)가 근거 없는 혼자만의 주장이며 가짜라고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주님은 표적을 통하여 당신의 말씀이 사실임을 뒷받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그들은 주님의 표적이 눈속임의 마술이거나 귀신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사악한 술수라는 식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하게 사탄의 손아귀 안으로 들어간 것이며 자기 무덤을 판 것이다.

진리를 거스르고 진리에 도전하는 일은 무모하고 무리한 일이다.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이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처음에 선지자들을 거절하던 유대인들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주님을 거절한 유대인들은 결국 주님을 귀신 들린 자로 몰았고 주님께 신성모독죄라는 어이없는 죄를 뒤집어씌워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왜 유대인들이 그렇게까지 되었는가? 그것은 그들이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끝 단추도 안 맞을 수밖에 없다. 거짓말에게는 다리가 없다는 속담이 있다. 한 거짓말은 그것을 감추기 위해 계속 다른 거짓말로 부축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처음 시작이다. 첫 출발이 진실치 않은 것으로 시작되면 끝은 결국 사탄의 거짓말과 살인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의 실패는 처음에 주님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의 죄가 드러날까봐 그랬든 또는 자존심이 상해서 그랬든 또는 자기들의 기존 왕국과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서 그랬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거절했다는 것이 바로 문제였다. 그것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시작이 나빴으므로 끝도 나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은 주님을 터무니없는 이유를 붙여 무리하게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귀의 거짓말로 시작한 그들의 길은 마귀의 살인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빛(진리) 가운데 행해야 한다. 만일 (빛이 비침으로) 자신이 어둠 가운데서 행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자기를 부인하고) 빛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기를 합리화하거나 이전의 삶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결국 빛과 대적하는 위치에 서게 되고 말 것이다. 주님은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을 부르러 오심과 동시에 어둠 가운데서 빛을 지향하는 사람을 부르러 오셨다. 주님을 만나자마자 따른 세리와 창기들에게는 빛이 없었지만 그들 안에 빛을 향해 열린 마음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틀렸으며 그 자리에서는 안식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불러주는 분이 나타났을 때 그를 따른 것이다. 생명의 길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죄가 없고 문제가 없어야 빛(그리스도)으로 나아오고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실상(죄)을 보고 생명을 열망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실패는 이것이 안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의와 교만에 빠져서 자기의 진정한 모습(실상, 어둠)을 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자신들과 비교할 수 없는 빛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누릴 수 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9 성령을 훼방함 (마12:22-32) / 2005. 2. 27 이상봉 2010.04.30 3572
98 주님의 구원 사역과 심판 사역 (마12:9-21) / 2005. 2. 20 이상봉 2010.04.30 3513
97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마12:1-8) / 2005. 2. 13 이상봉 2010.04.30 3890
96 그리스도의 멍에를 멤 (마11:28-30) / 2005. 2. 6 이상봉 2010.04.30 3726
95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 (2) (마11:28-30) / 2005. 1. 30 이상봉 2010.04.30 3575
94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 (1) (마11:28-30) / 2005. 1. 23 이상봉 2010.04.30 3553
93 지혜는 그 자녀로 인해 옳다함을 얻음 (3) (마11:20-30) / 2005.1.16 이상봉 2010.04.30 3628
92 지혜는 그 자녀로 인해 옳다함을 얻음 (2) (마11:16-19) / 2005. 1. 9 이상봉 2010.04.30 6420
91 지혜는 그 자녀로 인해 옳다함을 얻음 (1) (마11:16-19) / 2004.12.26 이상봉 2010.04.30 4352
90 흔들리는 갈대와 부드러운 옷 (마11:7-10) / 2004. 12. 19 이상봉 2010.04.30 4268
89 세례요한의 의문 (마11:1-15) / 2004. 12. 12 이상봉 2010.04.30 4014
88 보냄 받은 사람 (5) (마10:21-39) / 2004. 12. 5 이상봉 2010.04.30 3592
87 보냄 받은 사람 (4) (마10:17-31) / 2004. 11. 28 이상봉 2010.04.30 3467
86 보냄 받은 사람 (3) (마10:11-42) / 2004. 11. 21 이상봉 2010.04.30 3498
85 보냄 받은 사람 (2) (마10:7-39) / 2004. 11. 14 이상봉 2010.04.30 3504
84 보냄 받은 사람 (1) (마9:36-10:15) / 2004. 11. 7 이상봉 2010.04.30 3527
83 사람을 불쌍히 여김 (마9:35-38) / 2004. 10. 31 이상봉 2010.04.30 3861
» 주님의 사역이 방해받음 (마9:32-34) / 2004. 10. 24 이상봉 2010.04.30 3707
81 하나님께 대해 눈 멀고 귀먹고 입이 막힘 (마9:27-34) / 2004. 10. 17 이상봉 2010.04.30 3866
80 천국복음과 표적 (마9:18-27) / 2004. 10. 10 이상봉 2010.04.30 3467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