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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9:35-38)

주님은 할 수 있는 한 이스라엘의 모든 지역을 다니시며 말씀을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주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천국 사역을 혼자 다 수행할 수 없어서 사람들을 불러 제자로 삼으시고 그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다른 지역으로 가지 말고 먼저 이스라엘 민중들에게로 가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10:5,6)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들이 특별한 백성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그들을 당신의 이름을 위한, 당신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선택하시고 '자기 백성'과 '자기 아들'로 삼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자신은 그동안 그들의 '왕'이요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무시했으며 그 종들을 배척해왔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주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도 다수의 사람들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5-11)

이것이 주님이 세상에 왔을 때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며 불쌍히 여기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은 일방적이고 은혜적인 것이다. 주님은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사실 주님이 행하신 여러 기사와 표적들은 주님의 적극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파생적으로 나온 것이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14:14-16)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힘써 돌아보신 것은 그들이 잃어버려진(되찾아져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보는 주님의 시각이 일반적인 시각과 달랐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스라엘 무리를 보실 때 그들의 행위를 보지 않고 그들의 존재와 행동 배경을 보셨다. 사람들은 문제를 볼 때 문제를 일으킨 사람 자신과 그의 행위만 본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 배경을 보신다. 언제나 어떤 사람의 인격과 행위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거나 사탄의 역사(거짓말)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난과 저주와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목자 없음과 무지(영적 무지) 때문이라고 보셨다. 이스라엘의 근본 문제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없는 것이다. 즉 목자가 없고 빛이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이스라엘(인간)이 자초한 것이다. 생명과를 거절하고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이미 인류는 고아가 되고 소경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추구했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는 빛이 없었고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소경이 되어 이리저리 방황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스라엘을 정죄하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알고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속아서 즉 무지해서 헛된 일을 하고 어둠 속에서 헤맨 것이다. 그러므로 꾸짖고 심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 돌보고 먹여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천년 이상의 세월 동안 하나님을 대적하고 괴롭게 하며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훼방하고 지연시킨 원수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그런 시각으로 보지 않고 다만 사탄에게 속아서 허덕이고 있는 불쌍한 자기 백성으로 보셨다. 하나님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무지와 가난과 저주와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그들이 더 괴롭고 불쌍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의 기본적인 마음이다. 일을 하려면 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일이 되려면 이 마음이 있어야 한다.

언제나 주님은 사람의 선악(행위)을 보시지 않고 존재와 형편을 보신다. 이 마음이 있어야 사람을 살린다. 행위와 외적 형편이 어떠하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인간이고 또한 하나님의 이름(영광)을 위해 일찍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소유(백성)였다. 그런 자들이 목자가 없어서 길 잃은 양이나 소경처럼 헤매고 있으니 다른 일은 나중이고 일단 불쌍히 여기고 살려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시각을 반드시 본 받아야 한다. 언제나 일보다 사람, 행위보다 존재, 사람의 외적 형편보다는 내적 형편을 먼저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형편을 보실 때 주님은 그들의 외적 형편(가난과 고통과 그것의 원인이 되는 불순종과 죄)도 물론 안타깝게 여기셨지만 그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낸 배경인 그들의 영적 형편을 더 안타깝게 여기셨다. 그것이 바로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말씀이 없고 빛이 없어서 영적 소경이 된 것이다. 언제나 문제의 해결책은 거기에 있다.

참으로 주님은 '이스라엘이 사탄에게 속은 것'을 보셨다. 자기는 다 안다고 떠들지만, 자기는 잘났다고 떠들지만, 자기는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사탄에게 속아서, 심지어 너무 깊이 속아서 자기가 속은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사탄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시고 그것을 불쌍히 여기셨다.

인류는 언제나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고 주인이고 주권자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날마다 사탄의 뜻대로 행하고 사탄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아셨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시고 불쌍히 여기사 우리의 목자가 되셨다.

인생이 사탄에게 속아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인류는 여러 가지 어이없는 일을 저질러놓고서도 지나고 나서는 자기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모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가 이런 일을 했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고 의아해한다. 누가 전쟁을 원하는가? 누가 사소한 일 아니 중대한 일로도 살인을 하기 원하는가? 누가 사소한 일로 치고 박고 싸우며 독한 말로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기 원하는가?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또 아무도 자신이 그런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항상 그런 일이 벌어진다. 그러니 어떻게 이것이 자기가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사람은 주권자가 아니다. 아담이 자기의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사탄의 거짓말에 속은 그 날부터 인생은 자기 마음으로 살고 자기 뜻으로 사는 자가 아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사탄에게 속은 인생이 그 속은(거짓된) 생각으로 인해 서로 고통을 주며 고통을 받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사람의 진정한 문제는 돈이 없고 병이 들었고 전쟁과 억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그 대신 사탄의 거짓말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사람의 문제를 이런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없으며 사람을 살릴 수 없다. 사람을 살리려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며 사랑하며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문제를 주님의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사람 자신이 밉기 때문에 그들을 용납할 수 없고 따라서 살릴 수 없다.

정죄하고 심판해서 문제가 풀릴 것 같으면,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설 것 같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정죄하고 처벌해도, 심지어 죽여 없앤다 하더라도 죄는 여전히 세상에 남으며 문제는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이 계속 왕노릇하며 사람들을 속이고 지배하기 때문이다. 죄인 한 사람을 처벌하여 없앤다 할지라도 사탄은 또 다른 사람을 불러서 같은 죄인으로 만들며 같은 일을 계속하게 만들 것이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도 없다. 그리고 사탄의 왕국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인데, 사탄에게 지배를 받는 사람이 있으면 사탄의 나라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서려면 사탄의 거짓말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전쟁이 있고 가난이 있고 질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생명)이 없고 사탄의 거짓말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가난과 질병과 각종 저주와 고통으로 나타난 것이지 그것들이 먼저는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스라엘이 굶주리고 병들고 얽매여 있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말씀에 굶주리고 영적으로 병들고 사탄에게 얽매여 있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의 마음이 사랑과 긍휼로 충만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한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항상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은 먼저 사람을 살리고 온전케 할 생각을 해야 한다. 사람을 얻을 생각을 해야 한다. 눈에 차지 않는 사람들, 성에 차지 않는 사람들을 다 쫓아버리고 다 물리쳐버리는 일은 쉽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문제, 저 사람에게는 저런 문제가 있어서 우리는 주위를 돌아보면 아무도 같이 있고 싶지 않고 그런 사람들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설 것 같아 보이지 않을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사실 현재적 형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원수이며 심판의 대상들일 뿐이다. 그러니 성질대로 할 것 같으면 다 물리쳐버리고 싶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사탄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만들어서 증오의 대상이 되게 만들고 감옥에 넣고 사형을 시키며 지옥에 보내기를 원한다. 그것이 사탄의 목적이다. 나도 죄 짓고 너도 죄 짓고 그리하여 나도 정죄 받고 너도 정죄 받고 모두 다 망하여 세상에는 아무도 남지 않고 다 사탄과 함께 지옥으로 가는 것이 사탄의 의도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내 감정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해야 한다. 사실은 우리의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사탄에게 깊이 속아 있는 것이다. 사탄의 거짓말이 무엇인가? 형제가 오백 데나리온 빚 졌다는 것은 생각하면서도 나 자신이 일만 달란트 빚 진 자라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의인이며 심판자이며 누구를 미워하거나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장 근본적인 거짓말(거짓된 생각)이다. 우리는 주님처럼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을 얻으려면 먼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사람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본래 복음은 가난한 자의 것이다. 즉 죄인의 것이며 한심한 자들의 것이다. 불쌍한 사람들이 불쌍히 여김을 받기에 합당하지 불쌍하지 않은 자들은 불쌍히 여김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이다. 무슨 복음이든지 복음은 문제가 없는 자, 부유하고 건강하고 편안한 자에게 복음(좋은 소식)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자,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스러운 자에게 복음(좋은 소식)이다. 물론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죄인이고 하나님의 징계가 그들 위에 드리워 있음으로 인해서 되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님도 긍휼의 마음보다는 괘씸한 마음과 미운 마음이 먼저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주님이 이스라엘을 보실 때 그들이 그들보다 더 큰 어떤 자에게 속고 있다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속아서 행하고 있으니 불쌍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고통은 알지만 그 고통이 어디서 왔는지 왜 생겼는지 따라서 해결책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아프고 괴롭다는 것만 알 따름이다. 주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의 문제는 빛이 없고 진리가 없고 말씀이 없는 것이다. 미워하고 화를 내고 꾸중을 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 일깨우고 무언가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한 번도 하나님을 제대로 본(체험) 적이 없고 한 번도 하나님의 음성(약속)을 제대로 귀를 열고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은 오직 마귀의 거짓말만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부를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삶의 근본 원리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먹이고 고치심으로 그리고 말씀으로 일깨우심으로써 그들을 돕고자 하셨다.

이것이 바른 사역의 방향이다. 우리의 모든 일은 이런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자녀를 돕거나 이웃을 돕거나 다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모든 일, 모든 사역의 바탕은 긍휼의 정신이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사람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주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그가 죄의 첫 원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오직 사탄이 그 원인자인 것이다. 마귀의 거짓말이 그 원인자인 것이다.


주님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우리에게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나 신랑이나 의사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목자임을 보여준다. 목자는 양을 돌봐주는 자이다. 주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둥병자와 같았고 중풍병자와 같았고 소경에다 귀머거리에다 벙어리였고 귀신들려 있었고 여러 모로 불쌍하고 가련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모두 그들에게 돌봐줄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은 꼴을 먹지 못하여 굶주리며 이리 저리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40:11)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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