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복음 전파를 위해 일군을 부르심]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9:36-38)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10:1)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약속(구원)도 모른 채 무지와 고통 속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님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으로 생각하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찾고자 오셨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힘써 사역했을 뿐 아니라 함께 일 할 일군들을 찾으셨다. 그렇게 해서 불려온 사람들이 바로 열 두 제자를 비롯한 제자들이다. 주님은 그들로 하여금 어둠 속에서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3-15)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그들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귀신을 내어쫓게 하는 것이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이제 곧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임을 전하는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귀신을 내쫓는다는 것은 천국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세상에서 마귀를 내쫓는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지금 세상이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거나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마귀가 현재 많은 사람들을 (그의 거짓말로)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 안에서 사탄의 거짓말을 몰아내고 육체(귀신들림)까지 사로잡고 있는 사탄의 인간 지배를 분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서려면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의 활동을 제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주님과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할 때 그 의미는 육체적인 사탄의 지배(귀신들림)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그것보다 더 일반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사탄의 지배는 '정신적인 귀신들림' 즉 사람이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허탄하고 망령된 생각을 가지고 그런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이 헛되고 악한 삶을 사는 것은 스스로 그런 것 같지만 실은 그를 지배하는 악한 자의 사주로 인한 것이다. 사람의 생각 속에 사탄의 독이 들어감으로써 세상에 죄와 악이 횡행하고 허무하고 미친 일들이 편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이 부여받은 귀신 쫓아내는 사역은 사람들의 영혼을 마귀의 거짓말에서 해방시켜 진리의 말씀으로 온전케 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의 말씀(복음)으로 사람을 마귀의 지배 아래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돌이키는 것이 천국 건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 사역이다.  


제자들의 사역과 관련하여 또 하나 생각할 것이 있다. 마가복음 3장은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첫째 목적이 '그들로 주님과 함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단지 일을 시키기 위함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을 하려면 먼저 주님을 알아야 하고 주님을 알려면 먼저 주님을 먹고 마시고 누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궁극적인 일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의 목적 곧 하나님의 목적이자 우리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즉 제자의 일은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일하는 시간보다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었다. 주님이 땅에 계실 때의 상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일은 주님이 주로 하셨고 제자들은 그러한 주님을 지켜보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으며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섬김을 받으며 가까이서 그를 누렸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사람이 해야 할 최고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요6:29) 그러므로 일을 잘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그를 알아야 한다. 우리 인생이 허무하고 허탄한 일로 소진되지 않고 주님과 그 진리를 위해서 의미 있게 쓰여지기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먼저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개인적 경건 생활에도 힘써야 하지만 교회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며 누리는 일에도 힘써야 한다. 주님의 생명을 누림 없이는 일을 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일을 하게 되면 그리스도가 전파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말하려고 하지만 다른 것이 말해지고,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이상하게도 다른 것이 되고 만다. 왜 그런가? 전하는 자 안에 그리스도가 충분히 없기 때문이다.
 


[열 두 제자]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10:2-4)

주님이 산에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일할 사람들을 불렀을 때 나온 사람들은 딱 열 두명만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었다. 주님은 그들 중에서 열 두 명을 따로 세우셔서 항상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그리고 또 다른 70명의 제자들을 별도로 세우셨다. 그렇다면 12명은 무엇인가? 12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숫자이다. 그러므로 열 두 제자는 일차적으로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구원)하기 위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은 이스라엘만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결국 온 세계를 위해 봉사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 성취) 의지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체로 보잘것없는 '가난한 자'들 곧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이었지만 몇몇 특이한 사람도 있었다. 세리 마태와 가나안인 시몬과 가룟 유다 등이 그들이다.

첫 번째로 이름이 올라 있는 제자는 베드로(게바)인데 이 이름은 주님이 붙여주신 것이고 원래 이름은 시몬(시므온)이다.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는 요나의 아들로서 갈릴리 벳새다 출신의 어부들이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 나오는 이름은 야고보와 요한인데 이들은 베드로와 더불어 주님께 각별히 사랑을 받은 제자 그룹에 속한다. 야고보는 사도들 중 최초로 순교함으로써(행12:2, 주후44년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참수당함) 그 형제 요한만큼 활동하지는 못했다. 이 둘은 세베대의 아들로서 베드로처럼 갈릴리 어부 출신이다. 차이가 있다면 베드로보다 부유했다는 것이다. 세베대는 삯꾼을 둘만큼 부유하였으며(막1:20) 그 아내는 주님의 사역을 보조해 주기도 했다(마27:55,56). 요한의 가족은 대제사장 집안과도 알고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요18:15,16) 꽤 부유하고 유력했던 것 같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성질이 급하고 저돌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성격은 아마도 그 어머니의 성질을 이어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요한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후에도 에베소에 정착하여 복음 전파를 했으며 주후 95년경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 때 밧모섬에 유배되었고, 다음 해 넬바 황제 때 에베소에 돌아와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트라얀 황제 때에 사망함으로써 열 두 제자 중 제일 오래까지 생존하며 사역했다. 그는 초대교회의 주요한 지도자인 폴리캅(Polycarp), 파피아스(Papias), 이그나티우스(Ignatius) 등을 제자로 길러내었고 요한복음을 비롯한 많은 성경을 기록함으로써 교회를 위해 크게 봉사했다.

빌립 역시 세례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른 그룹 중의 하나이며 베드로와 같은 벳새다 출신이다. 그는 주로 헬라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한(요12:20-22) 것으로 보아 헬라의 언어와 문화에 능했던 것 같다.

바돌로매는 나다나엘과 같은 인물로 보인다. 그것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데려왔고 사도들의 명단들에서도 빌립과 바돌로매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나안인 시몬은 좀 특이한 사람인데 짐작컨대 가룟 유다와 함께 열심당원이었던 것 같다. '가나안인'이란 이름은 아람어인데 헬라식 표기로는 '젤로테스'(셀롯 ; 열심가, 열심당원)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가나안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열심당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눅6:15에서는 '셀롯 이라 하는 시몬'으로 표기했다. 그러므로 짐작컨대 그는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기 전 유대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국수주의적 정치 단체인 셀롯당(열심당)의 일원이었음이 분명하다. 셀롯당은 가다라 출신 유다가 주후 6년 구레뇨 총독의 국세 조사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한 과격한 집단으로서, 유대의 독립을 위해 로마에 저항하는 투쟁 단체였다. 이들로 인해 일어난 유대전쟁은 나중에 결국 (로마 군대의 침공을 불러와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져왔다. 그러나 주님 당시에는 그 활동이 그리 대단치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인물은 가룟 유다이다. 그는 주님을 팔고 자살한 인물로 유명하다. 가룟(이스카리옷)이라는 이름에 대해 어떤 학자는 그가 남쪽 유다의 한 지역인 가룟(Kerioth)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 출신지명이 붙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학자는 열심당원들의 운동을 나타내는 라틴어 시카리우스(sicarius)를 아람어로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한다. 둘 다 맞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는 시몬처럼 열심당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다는 주님의 제자들 중 회계를 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마도 그는 제자들 중 비교적 총명하고 치밀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자기를 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었고 물욕과 야망이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께 정직하지 못했고 결국 주님께 충성되지 못했다.

열심당 시몬과 가룟 유다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데 공통점은 둘 다 이스라엘의 회복(주권 회복, 독립)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주님을 따랐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전자는 주님의 뜻이 거기에 있지 않음을 알고 순종(순응, 포기)했지만 후자는 극단적 방법 곧 주님을 원수들에게 팔아서 자극하는 것을 통해서라도 기어이 자기 뜻을 실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자아가 강하고 자기 목표와 생각이 너무 분명한 사람은 세상에서는 좋겠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다지 좋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둘씩 짝지어 사역함]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막6:7)

"이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눅10:1)

제자들을 소개할 때 마태는 제자들을 한 명씩 소개하지 않고 둘씩 짝지어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했을 때도 그는 한 명씩 보내지 않고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주님은 왜 제자들을 둘씩 짝지으셨을까? 이 질문보다 먼저 있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왜 사람이 홀로 지음 받지 않고 남자와 여자 곧 아담과 하와 두 사람으로 지음 받았을까 하는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혼자 있지 않고 둘이 연합하여 함께 사는 것, 그리고 혼자 일하지 않고 둘이 연합하여 함께 일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기도할 때 혼자 기도해도 되지만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여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주님이 특별히 그 기도를 잘 들으신다는 것은 다른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그러한 형제의 연합을 원하시며 그런 모습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있기를 원하시며 함께 일하고 함께 살며 사랑 안에서 연합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아버지 혼자 계시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셋이 하나로 계시는 분이다. 그것을 사람에게 반영한 것이 바로 둘씩 짝지어 창조하신 것과 둘씩 짝지어 살게 하시며 둘씩 짝지어 일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사역하기를 배워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것보다 혼자 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런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생각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나온 생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그와 연관하여 제정된 하나님의 법칙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함께 함이며 하나님의 법칙은 홀로 일하는 것보다 둘이 함께 일할 때 일이 더 잘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여 형제와 연합하며 형제와 함께 사역하기를 힘써 추구해야 한다. 만사의 근원은 언제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제 아무리 똑똑하고 뛰어나도, 제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고 일을 형통케 하시지 않으면 일은 안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일하는 것보다 둘이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하시며 둘이 함께 할 때 복을 주시는데 어떻게 혼자서 일하는 것이 더 잘 될 수 있겠는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니 곧 영생이로다"(시133편)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저 찾음]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10:5)

주님이 제자들을 불러 사역하게 하신 일차적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그들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들이지만 주님 당시 그들은 타락하여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잃어버린 이스라엘 양들을 되찾기 위해서 제자들을 그들에게로 먼저 보내셨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만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들 곧 사탄에게 속아서 자기를 지으신 아버지를 모르고 고아처럼 헤매는 모든 인류에게 복음을 전하여 건져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위한 일군들을 얻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그러한 목적으로 먼저 부르심 받은)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먼저 이스라엘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해야 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온 세상에 확대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천국을 잉태하고 있는 모태이며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 요4:22) 천국을 위한 못자리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9 성령을 훼방함 (마12:22-32) / 2005. 2. 27 이상봉 2010.04.30 3572
98 주님의 구원 사역과 심판 사역 (마12:9-21) / 2005. 2. 20 이상봉 2010.04.30 3513
97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마12:1-8) / 2005. 2. 13 이상봉 2010.04.30 3890
96 그리스도의 멍에를 멤 (마11:28-30) / 2005. 2. 6 이상봉 2010.04.30 3726
95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 (2) (마11:28-30) / 2005. 1. 30 이상봉 2010.04.30 3575
94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 (1) (마11:28-30) / 2005. 1. 23 이상봉 2010.04.30 3553
93 지혜는 그 자녀로 인해 옳다함을 얻음 (3) (마11:20-30) / 2005.1.16 이상봉 2010.04.30 3628
92 지혜는 그 자녀로 인해 옳다함을 얻음 (2) (마11:16-19) / 2005. 1. 9 이상봉 2010.04.30 6420
91 지혜는 그 자녀로 인해 옳다함을 얻음 (1) (마11:16-19) / 2004.12.26 이상봉 2010.04.30 4352
90 흔들리는 갈대와 부드러운 옷 (마11:7-10) / 2004. 12. 19 이상봉 2010.04.30 4268
89 세례요한의 의문 (마11:1-15) / 2004. 12. 12 이상봉 2010.04.30 4014
88 보냄 받은 사람 (5) (마10:21-39) / 2004. 12. 5 이상봉 2010.04.30 3592
87 보냄 받은 사람 (4) (마10:17-31) / 2004. 11. 28 이상봉 2010.04.30 3467
86 보냄 받은 사람 (3) (마10:11-42) / 2004. 11. 21 이상봉 2010.04.30 3498
85 보냄 받은 사람 (2) (마10:7-39) / 2004. 11. 14 이상봉 2010.04.30 3504
» 보냄 받은 사람 (1) (마9:36-10:15) / 2004. 11. 7 이상봉 2010.04.30 3527
83 사람을 불쌍히 여김 (마9:35-38) / 2004. 10. 31 이상봉 2010.04.30 3861
82 주님의 사역이 방해받음 (마9:32-34) / 2004. 10. 24 이상봉 2010.04.30 3707
81 하나님께 대해 눈 멀고 귀먹고 입이 막힘 (마9:27-34) / 2004. 10. 17 이상봉 2010.04.30 3866
80 천국복음과 표적 (마9:18-27) / 2004. 10. 10 이상봉 2010.04.30 3467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