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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을 전하는 자]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0:11-15)

보냄 받은 자(전도자)는 평안을 전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본래 평안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는 세상에 저주와 심판을 가져오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평안을 가져오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말하고 천국(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말할 때 그것은 결국 평안(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는 안식)을 전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평안은 매우 포괄적이고 전인적인 것이어서 단순한 (삶의) 평화나 안정이 아니라 구원이고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이 순간은 내가 이 사람을 살리고 그의 모든 문제에서 그를 건져내는 순간이구나" 하고 알아야 한다. 진실로 큰 평안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을 빌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평안은 물론 위에서 말한 광범위하고 전체적인 평안 곧 생명의 구원(삶의 전체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 여기서는 그보다 폭이 좁은 평안 곧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반적인 평화와 안식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우리가 빈 평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평안이 우리에게 되돌아와서 우리 평안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여기서 말하는 평안이 단지 구원이라면 이미 생명의 구원을 받은 제자들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사람들에게 갈 때 그의 평안을 빈다는 것은 단지 주님의 구원을 그에게 전한다는 의미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평안은 전도의 수단으로서의 평안인 것을 알 수 있다. 주님 자신도 그러했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병 고침의 권세와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내용이지만 제자들이 그것들을 사용할 때 그것은 전도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구원의 내용인 동시에 그러한 구원을 이루기 위한 표적(表蹟)적 수단인 것이다.

주님이 자기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시는 평안은 궁극적이고 영원한 생명의 평안이다. 그러나 그러한 평안은 주님을 깊이 알 때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이 곧 평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주님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일단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도자를 영접할 때 그러한 평안이 임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런 사람에게 임하는 평안은 하나의 표적으로서의 평안이다. 주님은 전도자들에게 이러한 평안을 던질 권능을 주셨다.

이것은 무슨 얘기인가?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때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의 평안을 그에게 전할 때 그가 마음을 열고 우리(복음)를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평안은 선물로서의 평안이다.

나중에 보면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있고 난 후 사도들은 복음을 전한 후 그것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며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평안이든 성령이든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이고 하나님의 목표이고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일단 선물의 형태로 사람에게 먼저 주시기도 하는 것이다.

집을 방문할 때 우리는 선물을 준비해서 주인에게 선사한다. 이것은 사랑의 표시이고 친목과 화평의 표시이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은 일단 선물로서 평안을 주신다. 그러한 평안은 아마도 그 집에 어떤 육신적 문제나 생활적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이 해결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그의 마음에 복잡하고 풀리지 않는 답답함과 어두움이 있는 것이 해결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여러분은 우리가 이러한 평안을 형제들에게나 이웃들에게 선사할 수 있는 자인 것을 아는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인류의 궁극적인 평안으로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사람을 진정하고 영원한 평안의 세계로 이끌 수 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사람을 그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은사와 표적으로서의 평안을 제공할 수 있는 또 다른 권세도 주셨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볼 때 어떤 때는 너무나 초라하고 무력한 모습을 본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매우 유능하고 자랑스런 자신의 모습에 마음 뿌듯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육신에 속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보아야 할 진정한 자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아 곧 그리스도의 생명의 지배를 받는 새 피조물로서의 자아이다. 이 사람은 (스스로는) 부끄러워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우리는 지난 주에 보냄 받은 자로서의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고 담대하게 일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심지어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역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엄청난 사람이고 우리가 수행하는 사역이 너무나 엄중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하나님의 사자이다. 우리의 한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도 하고 사망에 이르게도 할 수 있으니 두렵고 떨리는 것이다.

이런 위치에서 우리가 행사하는 하나의 권세가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우리 자신으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역자로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 안에서 행한다면 우리는 사람에게 엄청난 복과 안식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슨 평안을 안겨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도 아닌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각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온 생각이다. 이런 생각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죄에 갇혀 꼼짝 못하는 지극히 무력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권세와 영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그가 우리를 보내시면 우리는 가는 것이고 그가 우리를 보내시며 권세와 영광을 부여하시면 우리는 영광스럽고 권세 있는 자가 되어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나타내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질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평안을 전하도록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안을 전하지도 않으며 평안을 말할 때도 확신도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 속에 하나님의 평안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평안하지 않은데 다른 사람에게 무슨 평안을 줄 수 있겠는가?

우리 안에 평안이 없으면 우리는 평안을 전하지 못한다. 우리 안에 평안이 있다는 것은 삶의 모든 문제 곧 모든 육신적 환경적 문제들이 다 순조롭고 형통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안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평안이시다. 즉 주님은 평안의 주인(peace maker)이시다. 주님을 알 때 우리는 삶의 문제가 어떠하든지 안식할 수 있으며 그러한 마음의 평안이 있을 때 그것은 또한 우리의 외적(육신적 환경적) 문제들을 시간차를 두고 해결해 나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전도자로서 세상의 평안 없는 자들에게 반드시 그리스도의 평안을 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속에서 주님의 평안을 깊이 체험해야 한다. 그런 안식을 지닌 자는 다른 사람을 안식케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역을 위해 사람들에게 특별한 선물로서의 평안을 안겨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큰 보너스가 있지 않은가!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평안을 전했는데 그가 그것을 받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보상이나 선물을 바라고 복음을 전하지는 않는다. 주님 자신이 이미 우리의 보상이고 선물이며 또한 장차 주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했을 때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보상과 선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땅 위에서 우리의 육신적 삶을 돌아보사 평안을 누리게 해주시든지 아니면 고난과 수고 가운데 두시든지 상관없으며 다만 주님이 부여하신 우리의 일을 해나갈 따름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평안을 전할 때 먼저 우리 안에 (영적인 것이든 환경적인 것이든) 평안이 있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며 항상 우리의 평안을 도모하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이와 같이 주님은 평안을 주시는 분이다. 물론 이 평안은 일차적으로 환경적 평안은 아니라 영적(마음의) 평안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님이 당신의 종들의 환경적 평안을 원치 않으시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환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악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체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당장 다 멸하시고 그의 자녀들을 고난에서 즉각 구원하시지 않는 이유는 그 때가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그 때는 곧 최후의 심판날이다. 그 날이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그 속에 있는 생명의 능력(아들의 생명, 부활 생명)으로 세상을 이기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때로는 평안을 가져다 주기 위해 특별한 손길을 펴신다. 이 평안이 바로 마태복음 10장에서 전도자들에게 약속된 그 평안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를 의뢰하는 자와 그를 위해 헌신하는 자에게 평강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반드시 그것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믿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의 위협을 이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고 나아가는 자도 질병과 굶주림을 당하며 각종 고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을 참으로 믿고 나아간 사람이 그러한 질병과 굶주림 속에서 할 일을 못하고 그것 때문에 쓰러져 간 사람은 드물다.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간수하셨으며 그들의 환경에 어떤 식으로든 역사하셔서 그의 신실함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셨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주님은 세상에 평안을 전하는 사람을 통해 세상에 평안을 주시지만 그 이상으로 평안을 전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더욱 평안을 주신다. 그러므로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는 말씀은 평안을 전하는 자가 자기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을 만난 경우에만 그 자신에게 주님의 평안이 임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평안을 전하는 자는 남에게 평안을 주는 것처럼 자신도 주님으로 말미암는 평안을 누린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리 속의 양]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마10:16-18)

양이 이리떼 가운데 있음, 바로 이것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위치이다. 그리스도인은 양이고 세상은 이리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순전한 존재이고 세상은 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줌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결코 힘으로는 세상을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도 말해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힘으로 세상과 맞서려고 해서는 안된다. 어린양의 길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린양은 세상에 나가자마자 일도 못하고 죽임을 당하며 잡아먹혀 버려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 같았던 주님은 세상에서 아무 일도 못하고 바로 이리에게 잡아먹혀 버린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일을 다 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셨다.

그렇다면 양은 어떻게 이리떼 가운데서 견딜 수 있으며 사역할 수 있는가? 양의 무기는 무엇인가? 양의 생존과 사역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이 주님을 정하신 때까지 보존하시다가 때가 되매 그를 무리에게 내어주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 아래 있다. 그러므로 양의 무기는 하나님께 복종하며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한편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양의 무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양의 무기는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지혜와 순결(진실)이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에서 순결이란 단순 솔직함(진실함) 또는 순전(純全, 純眞)함을 말한다. 기만적이거나 잔꾀를 부리는 상태가 아닌,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단순하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순결이다. 이 지혜와 순결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 지혜만 있고 순결이 없어도 안되고 순결만 있고 지혜가 없어도 안된다. 지혜만 있고 순결이 없으면 그 지혜는 교활함과 잔꾀가 되고, 순결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그 순결은 어리석음과 무지가 되고 만다.

그러나 사실 이 두 가지 곧 지혜와 순결은 함께 공존하기 어려우며 서로 상충되기 쉽다. 육신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이 둘은 서로 조화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지혜로우면 순결하지 않고 순결하면 지혜롭지 않게 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지혜롭고 동시에 순결할 수 있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오직 성령을 따라 행하면 된다. 성령의 지혜는 깨끗하고 진실하고 화평을 도모하고 부드럽고 기타 모든 하나님의 선한 성품을 그 속에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지혜가 나타날 때 결코 교만하거나 거짓되거나 치우치지 않으며 하나님의 모든 목적을 원만하게 이루게 된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3-18)

그러므로 지혜롭겠다고 하지도 말고 또 순결하겠다고 하지도 말고 오직 성령 안에서 행해야 한다. 우리가 조용히 주님을 바라보며 따르면 우리는 자연히 지혜롭고 총명하며 또한 순결하고 순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이룰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뱀 같이 지혜롭고 동시에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은 곧 오직 성령으로 행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혼자 행해서는 안되며 자신으로 행해서는 안된다. 언제든지 오직 아들(하나님)의 이름(생명)으로 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지혜롭기를 신경 쓰지 않아도 자연히 지혜로우며 진실하고 순진하기를 힘쓰지 않아도 자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아들의 생명이 최고의 지혜이며 아들의 생명이 최고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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